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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은 본래 청정해 결코 더러워 질 수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신수 스님, 스승에게 인가를 받지 못해
혜능 스님, 신수 스님 게송 통렬히 비판
두 스님의 게송, 천년의 돈점 논쟁 촉발

 

▲혜능 스님이 스승인 홍인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40년간 주석하며 법을 펼쳤던 조계산 남화선사. 혜능 스님의 진신상이 모셔져 있다.

 

 

다음 단락은 명게(命偈)와 신수(神秀)입니다. ‘게를 짓도록 명했다’와 ‘신수 스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홍인 스님이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합니다.

“각자 방으로 가서 게송 한 수를 지어 가져오라. 만약 그 게송을 보고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의 조사가 되게 하리라.”
그러나 대중들은 누구도 선뜻 게송을 짓지 못합니다. 이미 홍인 스님의 상수 제자로 교수사이기도 한 신수(神秀·606~706)스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수 스님이 법을 얻을 것이고 그러면 후에 신수 스님에게 의지해야 하니, 감히 게송을 지어 받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상수 제자인 신수 스님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대중들이 게송을 바치지 않은 것은 자신에 대한 기대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마침내 남쪽 벽에 게송을 지어 적어놓습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秀上座三更於南廊下中間壁上 秉燭題作偈 人盡不知(和) 偈曰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勸拂(佛)拭 莫使有塵埃)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부지런히 수행에서 몸과 마음에 때가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게송을 보신 홍인 스님은 모든 대중들에게 이 게송을 수지 독송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게송을 그대로 두어서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이를 의지하여 행을 닦아서 삼악도에 떨어지니 않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법을 의지하여 행을 닦으면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홍인 스님은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벽에 능가변상도(楞伽變相圖)를 그리려던 계획을 취소합니다. 능가변상도는 부처님께서 ‘능가경’을 설하실 당시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능가변상도를 그리지 않은 것은 ‘금강경’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습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곧 부처를 볼 것이다.” 여기에 비춰보면 그림을 그리는 것이 깨달음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홍인 스님은 신수 스님의 게송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게송이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문 앞에는 당도했으나 문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게송을 지을 것을 명령했지만 신수 스님은 다시 게송을 짓지 못합니다. 결국 인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5. 정게(呈偈)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다. 혜능은 한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 하여 말하였다.


“너는 모르는가?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저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을 지어 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곧 가사와 법을 전하여 육대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문득 남쪽 복도 벽에 모양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 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곧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고 죽음을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有一童子 於碓房邊過 唱誦此偈 惠能一聞 知未見性(姓) 未(卽)識大意 能問童子 適來誦者 是何言偈 童子答能曰 이不知大師言生死事(是)大 欲傳衣(於)法 令門人等 各作一偈 來呈看 悟大意 卽付衣法 禀爲六代祖(褐) 有一上座名神秀 忽於南廊下 書無相偈一首 五祖(褐)令諸門人 盡誦 悟此偈者 卽見自性(姓) 依此修行 卽得出離)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 찧기를 여덟 달 남짓 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에 가 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 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워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하였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 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에 예배 하였고,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어느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강의 뜻을 알았다. 혜능은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아야만 곧 큰 뜻을 깨닫느니라.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오조 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곧 큰 뜻을 잘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시어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이도 또한 아니로다!”하셨느니라.


(惠能答曰 我此踏碓八箇餘月 未至堂前 望上人引惠能至南廊下見此偈禮拜 亦願誦取 結來生緣 願生佛地 童子引能至南廊下 能卽禮拜此偈 爲不識字 請一人讀 惠<能>聞(問)已 卽識大意 惠能 亦作一偈 又請得一解書人於西間壁上題(提)著 呈自本心 不識本心 學法無益 識心見性(姓) 卽悟(吾)大意 惠能偈曰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姓)常淸(靑)淨 何處有塵埃
又偈曰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淸淨 何處染塵埃
院內徒(從)衆見能作此偈 盡怪 惠能却入碓房 五祖(褐)忽見惠能偈(但) 卽善[知]識大意 恐衆人知 五祖乃謂衆人曰 此亦未得了)


혜능 스님은 한 동자가 신수 스님의 게송을 외는 것을 듣고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게송이 아님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동자에게 게송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글을 몰랐던 혜능 스님은 다른 이에게 부탁해 자신의 게송을 남깁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무대(明鏡亦無臺)로다. 불성상청정(佛性(姓)常淸(靑)淨)하니 하처유진애(何處有塵埃)리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앉겠는가.”


신수 스님의 게송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단경에서는 불성상청정(佛性(姓)常淸(靑)淨)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도 표기하고 있는데 뜻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의 뜻이 무엇입니까. 깨달음에는 본래 어떤 형태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邈三菩提)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번역되는데 깨달음, 또는 진리에는 정해진 상(相)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모습이나 보살의 모습이나 중생의 모습이 어떤 법이나 형태로, 또는 언어로 규정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불변의 규정이 있다면 부처는 영원한 부처고 보살은 영원히 보살이고 중생은 영원히 중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에는 본래 모습이 없습니다. 또한 혜능 스님은 불성은 본래 청정함 그 자체인데 어떻게 그 곳에 티끌이 묻고 더러워 질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두 게송은 신수 스님의 북종선을 비판하고 혜능 스님의 남종선의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 ‘단경’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집어넣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이 두 게송은 중국불교 역사에 있어 천년의 논쟁을 불어온 서막이기도 합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논쟁이 그것입니다. 돈오돈수는 깨달음은 바로 이뤄지고 이뤄지는 즉시 수행을 마친다는 견해입니다. 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해 돈오점수는 깨달음이 순간에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돈점논쟁(頓漸論爭)입니다. 중국에서 천년에 걸쳐 이어졌던 논쟁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생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로 부처가 되느냐. 안됩니다. 수많은 생을 거치며 쌓은 습기(習氣)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았다하더라도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이 필요하다. 이것이 돈오점수입니다. 그러나 돈오돈수에서는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종교적으로 돈오돈수가 맞습니다. 절대적으로 가능해야 합니다. 중생이 부처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바로 부처가 되느냐면 그렇지는 못합니다. 깨달았다 해도 부처님의 복덕(福德)이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부처님만큼 열심히 자비를 실천하고 수행하지 않았는데도 깨닫는 순간 그런 복덕이 절로 생길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종교적인 천재는 분명히 있습니다. 혜능 스님이나 성철 스님 같은 분들은 종교적 천재입니다. 깨닫는 순간 부처와 똑같을 수 있습니다. 이분들의 근기에는 돈오돈수가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종광 스님

혜능 스님은 돈오돈수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에 반해 신수 스님은 점수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혜능 스님 제자 중에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혜능 스님이 남악회양 스님을 만나자 묻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회양 스님이 대답합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혜능 스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그 상태에서 다시 닦고 증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남악회양 스님이 다시 대답합니다. “따로 닦거나 증득할 것은 없지 않지만 다시 더럽혀 지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닦고 체험하는 것은 계속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범부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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