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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 스님은 나이 26세에 오대산 서대에서 오른쪽 네 손가락 열 두마디를 소지하는 연비공양을 감행한 이후 6년간 태백산에서 홀로 결사를 마쳤음에도 언제나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더불어 경전공부는 물론 책 읽기에도 한 치의 방일함이 없었다. 또한 차(茶)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에서 글쓰기 중 ‘다향산방’을 즐겼고, 조주의 끽다거를 ‘끽다거래’로 표현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갔다.
그러했기에 후학들은 스님의 사상을 사교입선(捨敎入禪), 지계청정(持戒淸淨), 자비보시(慈悲布施)로 정리했고, 일부에서는 여기에 더해 화안애어(和顔愛語), 인과윤회(因果輪廻), 광도중생(廣度衆生)으로 스승의 삶과 사상을 갈무리하기도 했다.
경전 이외에 스님이 아꼈던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경봉 스님의 일기를 정리한 ‘삼소굴 일지’다. 이 책은 경봉 스님이 19세(1910년)부터 85세(1976년)에 이르기까지 66년여 세월 동안 손수 기록한 산방일기를 엮은 것이다. 말 그대로 개인의 기록이었으나 매일의 일기 끝에 그날 감회의 일단을 다시 게송으로 읊고 적어 놓았으니, 고승의 안목으로 기록한 글은 후대에 큰 울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일타 스님은 노승의 66년 기록을 보고 “누군가는 10년 이상 일기를 계속 쓰는 이는 입지를 굳힌 사람이고, 20년 이상을 계속하는 사람은 성공을 기약할 수 있으며, 30년 이상을 끊임없이 쓰는 이는 덕을 베푸는 어른이 된다고 했다”면서 “노화상의 명구문은 이대로가 금언집이요 근대불교사의 증언이고 자료집이기도 하다. 여기에 다시 명정사의 그 능란한 솜씨로 풀이를 거듭해 이에 출판을 하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라며 경봉 스님을 찬탄하고 널리 대중들에게 읽기를 권했다.
일타 스님은 이 ‘삼소굴 일지’와 함께 조선시대 서산 대사 문하에서 선맥을 이은 편양언기 선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양치는 성자’의 일독을 권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조선 500년은 불교 입장에서 억불로 일관된 법난의 시대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때를 불자 본분의 내실을 다지는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세도가에게 아부하거나 교화가 아닌 동화가 되어 매불자 노릇을 하는 이가 없고, 고고하고 탈속하게 청정무욕을 지키면서 본분사에만 열중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정법호지의 바탕을 다지는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에 기반한 해석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 모범답안처럼 보였던 이가 바로 편양언기였다. 서산 대사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사명이 스승의 교(敎)를 전수했다면, 편양은 스승으로부터 선(禪)을 인가받았던 인물이다. ‘양치는 성자’는 바로 이 편양 선사의 행적을 소설화했다.
일타 스님은 이 책을 보고 “편양 선사의 그 고매하고 탈속무애한 생애는 모든 불교도의 광명이요 좌표로서, 발심 출가한 수행자들에게는 그 기본 정신이 되려니와 세속에 골몰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가자들에게도 한 모금 청량산이 되지 않을 수 없다”며 기꺼이 일독을 권했다. 이 책은 1980년대 후반 첫 출판 당시, 읽는 동안 저절로 불심에 동화되게 하는 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