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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 스님, 홍인 스님 금강경 강의에 단박 깨달아

기자명 법보신문

육대 조사 인가받고 법과 가사 받아 남쪽으로 떠나
혜능 스님의 인가 모습은 초기 선종의 어려움 대변
혜명 스님 첫째 전법 제자로 받아…북쪽 교화 맡겨

 

▲ 혜능 스님이 금강경을 듣고 출가했던 오조사. 홍인 스님과 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갈구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勸拂(佛)拭) 막사유진애(莫使有塵埃).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신수 스님의 게송입니다. 이 게송을 보신 홍인 스님은 이 게송을 따라 수행하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수지 독송 하라고 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게송이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게송이 아님은 앞 강의에서 설명했습니다.


혜능 스님도 이 게송을 듣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게송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게송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무대(明鏡亦無臺) 불성상청정(佛性(姓)常淸(靑)淨) 하처유진애(何處有塵埃).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앉겠느냐. 신수 스님의 게송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 수행의 의미가 명확히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명경역무대의 대(臺)는 받침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겠지요. 대는 불변의 실체, 혹은 고정된 형태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붉거나 흰색으로 고정돼 있지 않고 어떤 모양이나 상태로 규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재된 부처님의 성품, 불성은 항상 깨끗합니다. 그런데 어디에 먼지가 끼고 때가 묻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혜능 스님이 글을 몰라 다른 사람에게 게송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는 대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혜능 스님의 저술이라고 알려진 ‘금강경구결’을 보면 많은 경전들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글을 몰랐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따라서 이런 내용은 선종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들이 있는 것입니다. 선종에서의 깨달음은 지식의 유무(有無)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지식으로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기가 더 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역사적인 배경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중국은 불교를 받아들일 때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교종(敎宗)을 먼저 수용하게 됩니다. 인도 중관학파의 논저인 백론(百論)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을 중심으로 성립된 삼론종(三論宗)을 비롯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 법화경을 중심으로 법화종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종 중심의 종파불교는 대중이 접근하기에 무척 어렵습니다. 현학적이면서 귀족적이어서 이해하기에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국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해서 네 번에 걸쳐 황제가 불교를 탄압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특히 당나라 무종이 일으킨 법난은 회창법난(會昌法難)으로 당시 전국의 스님 26만 명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경전과 사찰을 불살라 버립니다. 이로 인해 교종은 상당한 타격을 받습니다. 경전이 사라지고 도량이 불타고 함께 수행하던 대중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종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저 홀로 산으로 들어가 수행하면 그뿐이고 경전도 따로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선종은 크게 융성하게 됩니다. 특히 혜능 스님의 등장은 중국 불교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글도 모르고 아직 수계도 하지 않은 나무꾼이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6. 수법(受法)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 을 설해 주셨다.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五祖夜至(知)三更 喚惠能堂內 說金剛經 惠能一聞 言下便悟(伍) 其夜受法 人盡不知 便傳頓法及衣 汝爲六代祖 衣將爲信禀 代代相傳 法以心傳心 當令自悟))


홍인 스님이 혜능 스님에게 ‘금강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혜능 스님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하는 구절에 이르러 단박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마음을 낼 때 어디에 집착하거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단박 깨치는 법은 돈오(頓悟)법을 말합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바뀌면 중생도 바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내재된 부처님이 계십니다. 불성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내재된 부처님이 중생적인 욕망에 가려 있어 현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입니다. 흐린 하늘에 가려져 있는 태양과 같습니다.


그러나 중생적인 욕망이 줄어들면 부처님은 절로 현현하게 됩니다. 홍인 스님은 혜능 스님에게 가사를 전해줬습니다. 가사는 신표입니다. 진리를 전했다는 신표이기도 하고 혜능 스님의 입장에서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또 법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라고 했는데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만이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깨달은 사람에게 법을 전하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깨달음은 수행의 기간과 관계없다는 말도 됩니다. 깨달음은 조금씩 올라가는 계단 같은 것이 아니라 불성이 내재돼 있는 자신의 마음으로 온전히 귀속되면 바로 성불할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잘 담고 있습니다.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五祖言惠能 自古傳法 命(氣)如懸絲 若住此間 有人害汝 汝卽須速去)


오랫동안 집단을 유지해 왔던 구성원에게 귀중한 것을 전하지 않고 전혀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기존 집단에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홍인 스님은 법을 상수 제자인 신수 스님에게 전하지 않고 아직 계도 받지 못한 혜능 스님에게 전했습니다. 구성원들이 볼 때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러니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저항도 만만치 않았겠지요. 그러나 혜능 스님이 법을 전해 받는 과정은 중국 불교사에 새롭게 등장한 선종의 당시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현학적이고 의례적이던 불교에 대항해 새롭게 등장한 선불교의 개혁적인 면이 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혜능이 가사와 법은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었으며, 떠날 때 문득 오조스님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 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能得衣法 三更發去 五祖自送能於九江驛 登時便 五(悟)祖處分 汝居努力將法向南 三年忽弘此法 難起(去)在後弘化善誘 迷人若得心開 汝悟無別 辭違已了 便發向南)


이 내용을 보면 처음 중국에 선종이 등장했을 때의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에 대해 지금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이해되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화엄경’이나 기타 경전을 보면 중생이 부처가 되기까지는 무수한 세월 동안 봉사와 헌신과 수행을 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시절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기존 교단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이요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였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리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셨다.(兩月中間 至大庾(庚)嶺 不知向後有數百人來 欲擬害(頭)惠能 奪衣(於)法 來至半路 盡惣却廻 唯有一僧 姓陳名惠明(順) 先是三品將軍 性行麁惡 直至嶺上 來趂犯著 惠能卽還法衣 又不肯取 我故遠來求法 不要其衣 能於嶺上便傳法惠明(順) 惠明(順)得聞 言下心開 能使惠明(順) 卽却向北化人來)


다른 육조단경에는 이 대목이 좀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혜명이라는 분이 혜능 스님을 만나서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가사를 뺏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자 혜능 스님이 말씀하십니다.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나개시명상좌(那箇是明上座) 본래면목(本來面目). 착한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너의 본 성품은 무엇이냐 이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착하기도 악하기도 합니다. 항상 하지 않습니다. 혜능 스님은 이런 선악을 떠나 내 참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분별이 있기 전, 인식이 생기기 전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 혜명 스님은 깨달음을 바로 얻습니다.

 

▲ 종광 스님

사실 착한 상태와 악한 상태는 분리가 안 됩니다. 흐린 물의 경우 물과 티끌이 구분이 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흐린 물을 맑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가만히 놓아두는 것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물을 흐렸던 찌꺼기가 조용히 내려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히 욕망을 실체를 지켜보고 있으면 욕망이 마음과 분리돼 조용히 내려앉게 됩니다. 어찌됐던 혜명 스님은 이로 인해 혜능 스님의 첫 번째 전법제자가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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