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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산천 김명희의 ‘사차(謝茶)’

기자명 법보신문

“원통 경지에서 덖은 차가 나를 바라밀로 이끄네”〈圓通〉

초의, 추사 형제와도 교유
1815년 산천과 첫 만남
학문과 차 안목 두루 겸비
조악한 수입 중국차 비판

 

 

1815년 초의 스님의 첫 상경은 조선후기 차문화 중흥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초의 스님이 추사, 정벽, 형암, 소유에게 함께 보길 바라며 보낸 편지.

 

 


초의 스님은 추사의 형제들과 깊은 정을 나누었다. 초의의 ‘봉화산천도인사차지작(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은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1788~1857)의 ‘사차(謝茶)’ 시에 화답한 것. 그가 보낸 차를 받고, 이에 대한 고마움을 ‘사차’ 시 한편에 담았다. 산천은 누구인가. 그는 추사의 아우이다. 자는 성원(性源)이며 호는 산천도인(山泉道人), 혹은 산천이라 하였다.


1810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5년이 지난 뒤 초의를 처음 만났는데 이는 그의 형 추사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의 교유가 지금까지 알려졌던 시기보다 빠른 1815년 초가을쯤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는 근자에 발굴된 초의의 편지로 인해 피력된 것이다.


당시 초의는 유산의 권유와 후원으로 1815년 여름 첫 상경 길에 올랐다. 해남에서 한양까지는 대략 20여일이 소요되는 먼 거리이다. 따라서 해남을 출발하여 수종사에 도착한 것은 늦은 여름에서 초가을쯤이라 여겨진다. 사대문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초의는 다산이 계시는 생가를 찾아 예를 갖춘 후 수종사로 향했으리라.


하지만 당시 사찰의 형편으론 추운 겨울을 나기 어려웠을 터. 수종사 사중의 형편을 고려한 유산(酉山, 다산의 아들)은 초의가 추운 겨울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학림암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바로 이 당시의 정황을 소상히 밝힐 수 있는 초의의 편지는 추사뿐만 아니라 정벽 유최관(貞碧 柳最寬), 형암 김훈(逈葊 金壎), 소유 박장암(小蕤 朴長馣)과도 함께 만났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 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편지는 초의가 상경하여 교유했던 인물들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초의사문 의순은 삼가 재배하고 소봉래(추사)선생께 글을 올립니다. 저는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아둔하여 젊어서는 배우지 못해 첫 번째로는 중설(重舌)의 갈등을 겪었으며, 두 번째로는 지식이 천박한 세속의 친구들로 인해 잘못되기도 하였습니다. 공부하는대로 막히니 의미도 모르고 문자 상의 공부만 할 뿐이어서 잠시 서책을 멀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갈팡질팡하여 마치 장님이 형상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비록 장사치라 해도 모두가 어울리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시야가 넓고 훌륭한 분들이 비천한 사람을 욕되다 여기지 않고 함께 어울릴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로써 넓은 아량이 보통을 훨씬 뛰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비길 데가 없습니다. 하물며 정벽선생께서는 화권(畵卷)을 주시고, 형암선생께서는 비를 무릅쓰고 찾아 주셨으며, 소유선생께서는 맑은 가르침을 내려주시니 모두 천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림자와 영혼에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첫 눈이 땅을 덮어 문득 다시 겨울이 되었는데 여러 선생들께서는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사이 수종사에 갔다가 잠자리와 음식이 마땅치 않아 다시 수락산 절을 찾았습니다. 머물 곳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부평초 같습니다. 새는 주머니가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너무도 그리워 이렇게 소식을 올립니다. 서쪽으로 도성을 바라보니 글을 쓰며 슬프기만 합니다. 을해(1815)년 10월 27일 사문 의순 올립니다.


이 암자(학림암)에서 도성까지는 겨우 일사(一舍: 30리)의 거리입니다. 여러 선생들께서 함께 모여 즐기는 모습이 소꿉장난하면서 땅에 그려놓은 떡을 먹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께서는 남은 향기를 아낌없이 보내주십시오. 학림암에서 편지 올립니다.’


(草衣沙門意恂謹再拜封書于小蓬萊先生足下 恂性本愚魯 少而失學 一困于重舌之葛藤 再誤于蓬心之俗友 隨例塞課 只是尋行數墨 乍離方冊 倀倀如瞽人之失相 雖賣繪粥麪之徒 皆將恥與爲伍 豈謂哲人大觀 不以卑枉爲辱 披煙寒郊惠以顔色以此知沖襟疋量 逈出尋常 感作之極 無以爲喩 矧貞碧先生之饋以畵卷 逈葊先生之衝雨命駕 小蕤先生之賜以淸誨 俱非賤品所敢當 歸而細溫 只有媿影慙魂而已 不審初雪糝地 忽復成冬 諸先生道體凝庥 恂間往水鐘 以館穀之齟齬 重尋水落之伽藍 彷徨棲屑 固是萍梗之素分 而堪恨漏囊之爲累也 慕仰之極均此布達 西望都門 臨書悽斷 乙亥十月念七日 沙門恂白此葊去都城 僅一舍之地 而千o爲ooo 諸先生鼎會爲樂 無異劃地作餠不可啗也 先生其將遺芬賸馥 無吝寄示 奉書于 鶴林葊中)


이 편지에는 실로 간절한 초의의 마음이 배어난다. 그는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한양을 찾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가 한양에서 처한 현실은 암담한 일이었다. 당시의 현실은 ‘저는 그사이 수종사에 갔다가 잠자리와 음식이 마땅치 않아 다시 수락산 절을 찾았습니다. 머물 곳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부평초 같습니다.’라고 한 대목에 잘 드러난다. 하지만 곤란의 순간에도 희망은 있는 법. 곤란한 현실 속에서도 그가 추사와 그 형제들, 정벽과 형암 그리고 소유를 만났던 일은 행운이었다.


아! 정벽 유최관과 소유 박장암은 누구이며 형암 김훈은 어떤 인물인가. 정벽 유최관은 일찍이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 교유했던 인물로, 화권(畵卷)을 준 사람이요, 소유는 박제가의 아들이었다. 천문학에 눈이 밝았던 형암은 불화에도 능했던 인물, 특히 관음상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후일 초의가 불화에 심미안을 가졌던 것은 형암의 영향이 컸던 것은 아닐까. 형암이 쓴 ‘반야심경’ 서첩에는 1814년 5월 보살계 제자 ‘김훈 형암이 목욕재배하고 썼다(金壎逈葊恭沐寫)’는 후기가 있어 그가 보살계까지 받았던 친 불교계 인물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초의 직접 만든 차 마시고
차의 향기, 맛, 효능 극찬
차 생김새 ‘매 발톱’ 묘사
초의차 산차 가능성 높아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는 초의 스님이 보낸 차를 마신 후 “이렇게 좋은 차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라고 고백했다. 김명희의 ‘사차’

 

 

한편 산천의 ‘사차(謝茶)’는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초의 스님이 만든 차에 대한 사대부들의 인식은 이 시 한수에 잘도 드러냈다.

 

‘늙은 사람 평소에 차를 좋아하지 않아(老夫平日不愛茶)/ 하늘이 그 어리석음 미워해 학질에 걸리게 했네.(天憎其頑中瘧邪)/ 더워서 죽는 것은 두려울 것이 없지만 목말라 죽을까 걱정이라서(不憂熱殺憂渴殺)/ 급히 풍로에 차를 달이네.(急向風盧瀹茶芽)/ 연경에서 수입된 차는 가짜가 많은데(自燕來者多贋品)/ 향편이니 주란이니 하며 비단에 쌌네(香片珠蘭匣以錦)/ 좋은 차는 아름다운 여인과 같다고 들었는데(曾聞佳茗似佳人)/ 이것은 하녀와 같을 뿐만 아니라 추하기가 더욱 심하구나(此婢才耳醜更甚)/ 초의가 홀연히 우전차를 보내왔는데(草衣忽寄雨前茶)/ 마치 매 발톱 같은 찻잎, 죽피에 싼 귀품을 손수 풀었네(籜包鷹爪手自開)/ 울울함과 번뇌를 씻어주는 공효가 이보다 큰 것이 없고(消壅滌煩功莫尙)/ 차를 마신 효과가 어찌 이리 빠를 수 있는가.(如霆如割何雄哉)/ 노스님 차 가리기를 마치 부처님 고르듯이 하여(老僧選茶如選佛)/ 일창일기 엄격히 법도를 지켰네(一槍一旗嚴持律)/ 더욱이나 차 덖기, 정성을 들여 원통(圓通)함을 얻었으니(尤工炒焙得圓通)/ 향미를 따라 바라밀에 든다(從香味入波羅蜜)


이 당시는 차에 대한 애호자가 늘어났던 때이지만 품다(品茶)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여 차의 진가를 가리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시중에 향편이다, 주란이다라고 하여 요란하게 비단으로 싼 조악한 중국차가 수입되어 유통되었다. 번뇌를 씻어주는 초의차,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한 산천의 말을 통해 당시 초의차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박동춘 소장

또한 산천이 응조(鷹爪)와 같은 우전차라 한 것으로 보아 후기의 초의차는 산차를 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산천은 초의가 바라밀의 경지를 드러낸 차를 만든 공로와 초의에 의해 오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된 차 문화를 칭송했다. “이렇게 좋은 차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茶如茶好寧不愛)”라는 그의 고백은 차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차린 산천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리라.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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