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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상좌 용담은 ‘선가구감’ 첫 번역자”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1.08.12 09:48
  • 수정 2011.08.16 11:17
  • 댓글 0

김광식 교수, 만해학회 심포지엄서 조명
역경·불교개혁에도 앞장…6.25때 월북

 

▲용담 스님

 

 

서울 삼일공원(탑골공원)에 있는 만해 스님 비문에는 그의 상좌로 춘성 창림(春城昌林), 동파 연하(東坡延夏), 용담 초안(龍潭初眼)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춘성 스님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만해학회가 8월4일 서울 유심아카데미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용담 스님의 삶을 처음으로 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김 교수는 용담 스님과 관련된 여러 단편적인 사료들과 스님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용담 스님의 삶을 복원했다. 이 논문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탁월한 우리말 번역서로 꼽히는 ‘선가구감’ 번역자이자 만해 스님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인물을 발굴해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논문에 따르면 용담(1898~?) 스님의 속명은 김병호(金炳滸)로 함경북도 명천군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근대학교로 유명한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1910년대 중후반에 돌연 금강산 사찰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수행에 전념했던 스님은 만공 스님과의 인연에 의해 수덕사 정혜선원으로 옮겨 참선수행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용담 스님이 만해 스님과 언제부터 사제관계를 맺었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1922년 3월 쓰여진 선학원 선우공제회 발기취지서에 만해 스님과 용담 스님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 1933년 발간된 ‘선원’에도 용담 스님 기록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도봉산 망월사 선원의 책임자로 ‘가주(家主) 김용담 대선사(大禪師)’로 기술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곧 1920~30년대 이미 용담 스님이 뛰어난 선승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출가 전 결혼을 해 자식을 두었던 용담 스님은 1930년대 후반 갑작스레 속가의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에 가서 농장경영을 시작했다. 그러다 일제말기 서울로 다시 돌아온 그는 만해 스님이 거주하던 심우장을 오가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몇 해 뒤 스승의 입적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해방을 맞은 용담 스님은 만해 전집 간행위원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신탁통치반대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수행과 교학에 두루 밝았던 그는 선학원 부이사장과 해동역경원 부원장을 지내며, 서산 휴정 스님이 불교사상의 요체를 정리한 ‘선가구감’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번역을 하기 위해 길 가는 아이들을 붙들고 읽어보라고 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48년 1월 출간된 ‘선가구감’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역작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선학원이 펴낸 용담 스님 번역 선가구감.              ▲용담 스님의 선가구감 자필원고.

 

 

용담 스님은 해방공간에서 역경작업을 하면서 불교혁신 활동도 적극 추진했다. 불교혁신총연맹에 가담한 그는 친일잔재 청산, 불교개혁, 통일운동 등에 뛰어들었고 1947년 5월에는 개혁 반대파의 음해로 구속되기도 했다. 용담 스님은 출소 후 조선불교총연맹의 대표자격으로 김구의 북행에 동참했지만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용담 스님은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동생과 기자로 있던 큰 아들을 남하시키려는 했다는 것이 전 칠보사 조실 석주 스님과 둘째 아들의 증언이다.

 

그런 용담 스님이 다시 남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6.25전쟁 직후로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으로서였다. 그는 사찰정화, 친일파 청산, 수행도량 확립 등 불교개혁을 추진하다가 다시 월북했고 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용담 스님이 ‘선가구감’에 이어 추진하려 했던 ‘법보단경’도 끝내 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한편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용담 스님의 ‘선가구감’이 1950년대 후반 석주 스님에 의해 법정 스님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훗날 법정 스님의 ‘깨달음의 거울, 선가구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추정했다. 김 교수는 이어 법정 스님이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그 출처와 과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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