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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초의차의 연원

기자명 법보신문

초의차의 원융한 세계 선가의 차문화서 비롯

차는 선불교 대표적 문화
스님들 수행 중에도 즐겨

 

대흥사·운흥사·불회사 등
조선후기까지 차명맥 유지

 

 

▲나주 불회사는 예로부터 다소(茶所)가 있었던 고찰로 초의차의 형성 및 전승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초의선사는 조선후기 민멸 위기에 처했던 차문화를 복원, 중흥시킨 인물로 칭송된다. 그가 세운 이 업적은 대둔사(현 대흥사)에 남아 있던 사원차를 복원·재정립한 것으로, 그 토대는 운흥사와 대둔사에서 연원된 것이다.


항간에 초의의 제다법이 다산 정약용에게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견해는 다산의 입장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후기 초의에 의해 중흥된 차문화의 단초(端初)는 초의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대흥사에 전해진 차를 토대로, 초의차를 완성했는데 이는 그의 차에 대한 열정과 공력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한편 차가 쇠퇴했던 조선후기까지도 차의 산지에 위치했던 대흥사, 운흥사, 불회사, 만덕사, 송광사, 선암사, 불갑사, 보림사, 백양사 등에는 소수의 수행자들에 의해 차의 명맥이 유지되었음도 확인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남평 운흥사에서 벽봉민성(碧峰敏性, ?~?)을 은사로 출가해 사미 시절부터 차를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


1808년 겨울, 완호(1758~1826) 스님은 잠시 대둔사에 머문다. 그의 권유에서인지 초의는 1809년 경 대둔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이미 약관의 나이에 월출산에 올라 달이 뜨는 광경을 보고 개오했다는 전언은 그의 수행력이 이미 쌍봉사에 있을 때부터 인근의 수행자들 사이에 회자된 것은 아닐까. 강호(江湖)를 주유하며 참된 스승을 찾아 종유(從遊)했던 그가 완호를 따라 대둔사로 간 것은 그의 생애에 일대 전환기가 되었다.


완호는 대둔사 서일장로에게 출가한 후 불호사(현 불회사)의 일봉암 및 나주의 쌍계사의 보현암과 서운암, 도갑사의 하동암에 머물다가 대둔사로 돌아가는 등 전라도의 여러 사찰을 참방하며 수행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사제지정(師弟之情)은 1802년 12월경, 운흥사에서 맺어졌다. 당시 완호는 함평 용천사 용문암에서 운흥사로 거처를 옮겨 관음전에 머물렀는데, 이때 초의는 겨우 이삼 년차의 사미승에 불과했다.


완호는 백연법사에게 내전(內典)을 공부하고, 연담선사에게 선을 참구해 선교(禪敎)에 밝았던 수행승으로, 이미 제방(諸方)에 두루 알려진 승려였다. 그와 인연이 깊었던 불회사는 예로부터 다소(茶所)가 있었던 고찰(古刹)로, 차의 산지라는 사실을 통해 그가 불회사에 있을 당시부터 차를 마셨으며, 이곳의 수행승들도 수행 중에 차를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초의는 운흥사로 출가한 후 이미 차를 알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초의의 차에 대한 이해는 대둔사로 옮긴 후 더욱 깊어졌다고 여겨진다.


한편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사의제(四宜齊)에 머물던 1805년 경 만덕사의 아암에게 ‘걸명소’를 보내 차를 구했다는데, 이를 통해 만덕사에서 이미 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이 차를 가까이 한 시기는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가 차의 활용 방법에 관심을 드러낸 시기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라 짐작된다. 다산은 1808년경 다산초당으로 이주를 계획하고 1809년 초당을 정비한 후 본격적인 강학과 저술을 시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변방의 승려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헌적인 자료나 학문의 수준에 있어서 월등한 차별성과 식견을 가졌던 그가 대둔사 출신 승려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기정사실이다. 특히 이들에게 시학이나 학문적인 방법론에 대한 조언과 역사의식을 고양시켰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그가 아암이나 초의에게 차를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쳤다는 견해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차는 태생적으로 선수행과 융합되어 발전되었던 연유로 선불교문화의 대표성을 지녔다. 참선수행에서 머리를 맑게 하고 잠을 적게 한다는 차의 약리성은 참선 수행 방법에 꼭 필요한 요건이었다. 차가 획기적인 수준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선수행과 차가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차는 물질음료에서 정신음료로 발전되었고, 선종 승려들이 수지해야할 중요한 물품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후 이러한 차의 우수성은 탈속을 지향했던 문인들의 애호로 이어져 차문화가 한층 발전되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차가 지닌 정화 능력을 활용하는 한편 소통의 중요한 창구로 응용했는데 문인들의 모임에 차가 등장된 것은 이런 점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초의는 격조 높은 차를 만들어 사대부들에게 공여함으로써, 이들이 차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동시에 초의차의 애호층을 확대하여 든든한 후원 세력을 확보하였다. 특히 초의차의 완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한 인물은 추사와 신위이다. 그들은 자신의 주변 인사들과 초의가 교유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추사의 제자들 및 다산의 자제들, 홍현주와 그 형제들, 신위, 박영보 등 많은 경화사족들이 초의차를 사랑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초의의 영향은 범해에게 이어져 일제 강점기까지도 그 영향력이 드러난다.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한국 차문화를 실태 조사한 ‘조선의 차와 선’에는 초의가 전해 준 불회사 돈차의 내력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먼저 모로오까(諸岡) 박사와 함께 대웅전의 부처님께 참배하고, 주지의 방에 들어가서 돈차를 만드는 방법이라든가, (돈차의) 내력을 물어 보았다. 이 돈차를 여기에서는 단차(團茶)라고도 한다.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에 있던 초의대사로부터 그 절의 한 비구니에게 전해진 것은 백년 쯤 전의 일이라고 한다. …중략… 주지인 이학치 스님은 50세 정도의 사람으로서, 1936년 본산인 대흥사로부터 왔고, 이 부근에 돈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부근 사람들에게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에이리 가즈오가 한국 차문화에 관심을 둔 것은 1926년부터이다. 본격적인 조사 시기는 1937~1939년까지 3년간이다. 그의 조사 목적은 조선의 민속자료를 기초화하기 위한 것으로, 차의 산업화를 위한 전진기지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 차문화를 기초 조사한 것이었지만 이 자료가 20세기 초 한국 차문화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료가 될 것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한국 차의 문헌적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는 이 자료는 괄목할만한 중요한 자료인 셈. 지금 우리가 1938년까지만 해도 불회사에서 돈차를 만들었고, 불회사 돈차의 제다법이 초의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증언은 이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사 편지.

 

 

조선후기 차문화 중흥은
초의의 열정과 공력 덕분

 

초의차 ‘다산 영향’ 주장은
다산만을 강조하려는 의도


더구나 불회사의 어떤 비구니가 초의에게 단차 만드는 방법을 전해 받은 것이 백여 년 전이라고 하니 초의가 이 비구니에게 돈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 시기는 대략 1830여년쯤의 일이라 추측된다. 이는 구전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전언(傳言)의 신뢰성, 특히 시기 문제에 약간의 오차가 있다손 치더라도 초의가 불회사의 비구니에게 돈차 제조법을 알려주었다는 정황은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초의가 차의 이론을 정립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론이다.


1828년 곡우 무렵 초의는 스승 금담(1765~1848)을 따라 지리산 칠불암에 갔는데 이는 금담으로 부터 서상수계(瑞相受戒)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만보전서’의 ‘다록’을 등초했고, 1830년 이것을 정서해 ‘다신전’이라 명명했다. 따라서 초의가 차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이어 그는 이미 ‘다경’, ‘준생팔전’을 통해 차의 이론을 섭렵해 제다법이나 탕법에도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가 홍현주의 요청으로 ‘동다송’의 저술했을 1837년경에는 이미 초의차를 완성했던 시점이다. 초의차가 이들에게 애호를 받았던 시기도 이 무렵이고, 그가 전다박사로 칭송된 것과도 이 때이다. 그의 차에 대한 높은 식견은 ‘다보서기’를 통해 드러냈을 터이지만 이 다서는 그의 장서목록에만 남아 있고 실물 유적은 행방이 묘연하다.


아! 초의의 공로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세기의 대인으로 칭송된 추사도 초의차를 걸명하는 말은 간결하면서도 애절했고, 강압적인 듯했지만 해학이 넘친다. 그가 제주도 유배지의 극한 상황을 견디게 한 원천은 초의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초의에게 보낸 서찰에는 차를 청하는 간곡한 마음이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또렷이 드러난다.


미천한 사람은 그 사이 갑작스런 설사병에 걸려 몸의 진기가 몽땅 탈진되었으니 세상 사는 고통이 마침내 이런 것인가 하오. 다행히 차의 힘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습니다.(賤痒間經暴寫 眞元敓下 世趣之苦 乃如此耶 幸因茗力得延煖觸)

 

▲박동춘 소장

추사가 초의에게 구하는 것은 진정 차뿐이었을까. 제주 대정리의 세찬 바람, 설사병에 걸려 진기가 다 빠진 추사를 구원한 차에는 초의의 법력이 다삼매로 드러났던 것이리라.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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