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 강단 떠나는 동국대 김선근 교수

“불교학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부입니다”

불교학계 소문난 말뚝신심 학자
갑상선암 법화경 사경으로 극복
가장 큰 보람은 인도철학회 창립

 

▲매일 108배, ‘법화경’ 사경, ‘금강경’과 ‘천수경’을 독송하는 김 교수는 “아무리 머릿속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있더라도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세간의 욕망에 휩쓸리기 쉽다”고 강조한다.

 

동국대 인도철학과 김선근(66) 교수는 말뚝신심 학자로 유명하다. 매일 새벽 108배로 하루를 시작해 버스와 지하철로 출근할 때는 ‘천수경’과 ‘금강경’을 독송한다. 또 연구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향을 사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뿐만 아니다. 지난 2003년 사경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매일 2~3시간 이상 각각 범어, 한문, 영어로 ‘법화경’ 구절을 정성껏 써내려가고 있다. 여기에 108배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오랜 습관이 돼버렸다. 그에게 불교는 학문의 대상인 동시에 믿고 따르고 실천해야 할 신앙인 것이다.

“매일 절을 하고 경전을 읽고, 사경을 하는 것은 내 안의 탐심, 분노, 어리석음이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옮기지 않으면 세간의 욕망에 휩쓸리고 맙니다. 나는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임을 잊지 않기 위한 제 자신의 노력인 것입니다.”

김 교수의 많은 논문과 저술들에서 깊은 신심이 묻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인도철학과 불교의 접목을 통해 불교사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려 노력해왔다. ‘Karma-yoga 패러다임으로 본 화엄경의 보현행원’(1998) ‘Jnana-yoga 패러다임으로 본 금강경의 아뇩다라삼막삼보리’(1999), ‘바가바드기타의 제사 패러다임으로 본 화엄경의 공양’(2000) 등 논문이 그것이다. 김 박사는 이들 많은 논문에서 대승불교가 인도철학의 핵심철학과 맞닿아 있는 수승한 이론임을 밝히고 이를 통해 대승불교의 방향을 제시해 왔다.

또 ‘불교 효사상의 현대적 실천 방안’(2001)에선 불교의 효 윤리란 나와 이웃과 자연은 본래 하나의 생명이며 상호상관적 연기의 자각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동체대비의 깊은 사랑임을 역설했으며, ‘금강경의 인식과 실천’(2005)에선 이익과 손해의 외적가치가 우선하는 현대사회에서 ‘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과 실천이 사회적 가치가 되도록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이밖에도 ‘법화경에 나타난 공사상’(2009)에서는 보살의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제시했고, 최근 펴낸 ‘법화경 신앙과 사상’(이화문화출판사)에선 법화사상을 집대성하는 등 그의 학문은 늘 오늘날 살아 숨 쉬는 불교를 향해 있었다.

김 교수가 박사학위논문을 비롯해 간디 관련 책을 번역하고 지속적으로 논문을 쓰는 것도 그가 인도의 보현행자라는 판단에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사상은 실천으로 옮겨질 때 그 빛을 발합니다. 간디는 정치적으로는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시키고, 경제적으로는 고질적인 빈부 격차를 줄이려 애쓰고, 사회적으로는 카스트제도라는 구습을 타파하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간디는 참다운 보현행자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 모든 불교인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경북 김천이 고향인 김 교수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독실한 불자였던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됐다. 틈만 나면 인근의 직지사와 계림사를 오갔고, 막연하지만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김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와 성동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그는 고향 선배의 권유로 종로 대각사 룸비니학생회를 다니게 됐다. 매일 토요일이면 대각사로 향했고, 불교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인 청담 스님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당시 룸비니회 총재를 맡고 있었던 청담 스님은 공학도가 꿈이었던 그를 불교의 길로 들어서도록 이끌었다. 어느날 도선사에서 참회기도를 하는 그를 보고 스님은 “참회는 나쁜 것을 지우고 좋은 것을 증장시키는 일”이라고 기특해했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말했다. 청담 스님과 만남이 이어지면서 김 교수는 평생 불교를 공부하고 알려나가는 불교인의 길을 걷겠다고 맹세했다.

인도불교를 알아야 한국불교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김 교수는 1965년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불교와 인도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 구도부에 들어갔다. 당시 구도부원들은 구도법회순례를 실시했고 많은 선지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날엔 성철 스님을 친견하는 기회도 가졌다. 물론 죽을 만큼 고통스런 3000배의 관문을 넘어선 뒤였다. 김 교수에게 성철 스님은 진리 탐구의 길을 걷는 올곧은 수행자로서의 전형으로 와 닿았다. ‘모든 자유 가운데 해탈이 제일이고, 모든 사람 가운데 명안자(明眼者)가 제일’임을 자각한 것도 성철 스님으로부터다.

구도법회순례를 끝내고 그는 뜻이 맞는 대불련 선배들과 함께 봉은사에서 수도원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주지를 맡고 있던 광덕 스님의 배려였다. 그는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스님들과 똑같이 일어나 예불을 드리는 것은 물론 울력, 기도, 참선을 했다. 수도원의 막내지만 보현행원품을 암송하는 것은 물론 삼천배와 일주일 기도정진도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대학생과 수행자의 삶을 병행하다 1967년 대불련 회장을 맡게 됐다. “전법이 생명이다”라는 광덕 스님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해보겠다는 각오에서였다. 그가 대불련 회장을 맡으며 가장 주력한 것은 군승제도의 추진이었다. 한국에서 불교인이 가장 많음에도 그 때까지 군승제도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군목이 1948년 9월 시행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백한 종교차별이었다. 

 

 

 


그는 국방부에 군승제도 실시를 강력히 촉구하는 동시에 대불련 회원 500여명이 참여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또 국방부 고위 관계자와 면담을 갖고 군승제도를 조속히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 해인 1968년 7월 군승제도가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비롯해 대불련의 역할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전법에 큰 관심이 있던 김 교수는 다음 해인 1969년 7월 군종장교에 임관했고 춘천 2군단 법당에서 군법사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스님들과 불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곳 부대에 쌍용사라는 법당을 지었고, 불자였던 군단장의 허가를 얻어 탄피로 200근짜리 종을 만들기도 했다. 이어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옮겨 생도들에게 불법을 전했고, 71년 9월에는 베트남에 파병되기도 했다. 그때 냉랭하던 베트남 불교계에 한국의 고려대장경을 전달해 화해를 도모함으로써 ‘월남명예 1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월남에서 귀국한 그는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강의를 시작했고, 틈틈이 공부를 계속해 몇 해 뒤 동국대와 연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군대에서 법을 전하고 강의를 했던 김 교수는 1983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그리고 그 해 동국대 경주캠퍼스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88년부터는 동국대 서울캠퍼스 인도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김 교수가 부임 첫해 인도철학과 학과장을 맡으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도철학회 창립을 주도한 것이었다. 인도철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정착될 때 불교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여러 교수와 강사들의 도움으로 인도철학회 결성의 산파역할을 맡은 그는 1991년 7월부터 1994년 6월말까지 인도 네루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간디 연구에 몰두했고, 그가 2004년 인도 바라나시 힌두대학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의 학문적 노력이 이뤄낸 결실이었다.

순탄과 역경이 교차하는 그의 삶에 또다시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2003년 말이었다. 학과와 학회일로 눈코뜰새 없는 날을 보내던 중 왼쪽 목에 커다란 혹이 생긴 것이다. 갑상선암이었다. 갑작스런 중병은 그로 하여금 원점에서 삶을 되돌아보도록 했다. 그동안 집착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일들이 모두 꿈 같고 물거품 같았다.

김 교수는 죽어도 불교 안에서 죽고 살아도 불교 안에서 살겠다는 각오로 법화경 사경을 시작했다. 하루 18시간, 바깥출입을 일체 끊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그렇게 3개월을 사경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먹 크기의 혹이 사라진 것이다. 환희심과 함께 눈물이 줄줄 흘렀다.

김 교수는 학자로서 거듭나겠다는 다짐과 함께 연구에 매진했고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2008년에는 한국불교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모든 학술지의 데이터베이스화, 영문초록 심사 강화, 회원관리 시스템 개선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오는 8월31일 30여년 간 몸 담았던 강단을 떠나는 김 교수. 그는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의 시초요, 행하는 것은 아는 것의 완성”이라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사는 날까지 부처님께 받은 법은(法恩)에 보은(報恩)하는 마음으로 불법을 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