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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의 노숙자 ‘청소선언’

기자명 법보신문
  • 법보시론
  • 입력 2011.08.29 14:36
  • 수정 2011.08.29 14:43
  • 댓글 0

노숙이나 부랑의 역사는 아주 길다. 하지만 어디서든 공동체가 삶의 근간을 이루던 근대 이전에, 부랑이나 노숙은 아주 특별한 사정을 가진 개인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생산이나 생활을 공동체 단위로 했기 때문에, 살 집이나 먹을 것 역시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공동체 전체가 굶는 일은 있어도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굶는 일은 없었다. 일할 능력이 없는 심봉사나, 그런 아비를 둔 심청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이웃(공동체!)이 먹여 살렸기 때문이었다. ‘동냥’이란 이런 식으로 공동체가 일할 능력이 없는 개인을 먹여 살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건 지저분한 게 아니라 깨끗한 것이었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런 것이었다. 남방 스님들의 ‘탁발’ 또한 정확히 이에 속한다.


노숙이나 부랑이 예외적인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게 되고, 개인적인 게 아니라 집단적인 게 된 것은 자본주의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동체에 속해서 먹고 사는 걸 해결하는 한, 호구를 위해 굳이 공장에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모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사를 시작한다. 영국의 엔클로저가 그랬다. 토지와 집을 빼앗긴 농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부랑해야 했다. 이런 짓은 자본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에 식민주의자로 들어간 곳이라면 어디서나 반복되었다. 대대적인 부랑자의 창출, 어디서나 자본주의는 그것으로 시작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실업자나 노숙자에 대해 책임져야 할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자본이 노숙자나 실업자를 먹여살려야 할 이유다.


뿐만 아니라 요즘처럼 ‘유연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자 자체를 가능하면 필요할 때만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일회용품처럼 사용하고자 한다. 비정규직, 임시직, 알바, 파견, 이들은 직업이 있어도 이미 반은 실업자다. 지금 일본은 이런 이들이 해고되면 몇 달 안에 노숙자가 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해고되면 일주일 이내에 기숙사를 비워줘야 하는데, 새로운 직장을 얼른 구하지 못하면 모아놓은 얼마 안되는 돈마저 떨어져 묵을 곳도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노숙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삶에 지쳐 직업을 구하려는 의욕마저 사라지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는 거 아니면 직업 없이 살아남는 것 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전자를 보여준다면, 노숙자 사망통계는 후자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사망률에 비해 노숙자의 사망률은 1999년 1.47배였던 것이, 2006년에는 1.9배, 2009년에는 2.14배로 증가했다. 일반인보다 2배 이상 많이 죽는 것이다. 연간 노숙자 사망자 수 또한 그러한데, 1998년에 5명이었던 사망자 수가 1999년에는 95명으로, 2000년에는 142명, 2003년에는 304명, 2009년에는 357명으로 급증했다. 외환위기로 실업자가 급증했던 1997년보다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그리고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사망자 수는 문제가 단지 일시적인 외환위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원죄’에 대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는 대신, 반대로 경쟁력을 이유로 죽음을 권하는 사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지난 8월22일, 서울역사의 노숙자들을 쫓아내겠다는 코레일의 ‘청소선언’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복지를 확대’하여 이들이 살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가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정치가들의 무지나 단견, 무능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코레일처럼 노숙자들을 그나마 살던 곳에서 쫓아내는 것이나, 복지부나 시청의 관료들처럼 그걸 그저 구경하고 있으며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안목이나 능력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 아닐까?

 

▲이진경 교수

노숙자의 삶이 ‘청소’해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존’하게 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아는데 대체 무슨 특별한 안목이나 능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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