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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한량없이 크나 실천 없으면 허깨비와 같다

기자명 법보신문

수행 없는 빈 마음은 무기공에 떨어져
고통과 질곡 벗어난 상태가 바로 피안
밝고 맑은 마음 유지하는 것이 반야행

 

 

▲육조 혜능 스님의 상이 모셔진 국은사 육조기념당.

 

 

14. 성공(性空)


지금 이미 삼보에게 스스로 귀의하여 모두들 지극한 마음들일 것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으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요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今旣自歸依三寶 惣各各至心 與善知識 說摩訶般若波羅蜜法 善知識 雖念不解 惠能與說 各各聽 摩訶般若波羅蜜者 西國梵語 唐言大智惠彼岸到 此法須行 不在口念 口念不行 如幻如化 修行者法身與佛等也 何名摩訶摩訶者是大 心量廣大 猶如虛空 莫空心坐 卽落無記空 虛空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 盡在空中 世人性空 亦復如是)


이제 비로소 혜능 스님의 법문이 시작됩니다. 그 전은 계를 설하신 것입니다. 계를 받고 이제 불자가 된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의 소제목은 성공(性空)입니다. ‘본성이 본래 공하다’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가 마하반야바라밀(摩詞般若波羅蜜·Maha prajna paramita)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범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마하는 크다는 뜻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크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산도 바다도 우주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바늘 하나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옹졸합니다. 용서하고 이해하며 수용하면 될 터인데 그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하의 의미가 마음이 텅 비어있는 것과 상통합니다. 마음이 비어있으면 마하가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마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반야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나를 중심으로 이득과 손해를 따지기 때문에 옹졸해지는 것입니다. 이토록 작은 마음을 원래의 넓음 마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반야입니다. 늘 비어있는 커다란 마음을 밝고 아름답게 쓰는 것이 반야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바라밀하게 됩니다.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입니다.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피안은 현재의 고통과 질곡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커다란 지혜로 고통이 없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의 뜻입니다.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한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은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느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性含萬法 是大萬法盡是自性 見一切人及非人 惡之與善 惡法善法 盡皆不捨 不可染著 猶如虛空 名之爲大 此是摩訶行 迷人口念 智者心行 又有迷人 空心不思 名之爲大 此亦不是 心量廣大 不行是小 莫口空說 不修此行 非我弟子)


마하반야바라밀은 실천행입니다. 혜능 스님께서는 입으로만 외지 말고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한량없이 커서 허공과 같으나, 그냥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로 알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래봤자 몸은 한걸음도 장벽을 투과하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실천행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기공(無記空)은 알기는 알지만 실천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15. 반야(般若)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何名般若 般若 是智惠 一切時中 念念不愚 常行智惠 卽名般若行 一念愚卽般若絶 一念智卽般若生 心中常愚 自言我修般若 無形相 智惠性卽是)


우리가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내면이 항상 맑은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착한 마음이 일다가도 갑자기 미워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문득 어떤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고 보기 싫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쁜 생각이 일면 그것을 바로 보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지속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늘 맑고 밝은 상태가 유지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야고 지혜입니다. 반야행은 또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늘 밝고 자비로운 마음이 반야라면 밝고 자비로운 마음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수행하는 것이 반야행입니다.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何名波羅蜜 此是西國梵音 言彼岸到 解義離生滅 著境生滅起 如水有波浪 卽是於此岸 離境無生滅 如水承長流 故卽名到彼岸 故名波羅蜜)

 

앞서 말했듯이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입니다. 경계에 집착한다는 말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과 뜻에 의해 바깥의 경계를 인식하고 여기에 휘둘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경계에 집착하면 우리 마음에 파도가 이는 것처럼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통제해 물과 같이 고요한 상태가 되면 이것이 바로 도피안입니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의 번뇌와 진로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과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로 삼느니라. (迷人口念 智者心行 當念時有妄 有妄卽非眞有 念念若行 是名眞有 悟此法者 悟般若法 修般若行 不修卽凡 一念修行 法身等佛 善知識 卽煩惱是菩提 捉前念 迷卽凡 後念 悟卽佛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第一 無住無去無來 三世諸佛 從中出 將大智(知)惠)到彼岸 打破五陰煩惱塵勞 最尊最上第一 讚最上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住 是 定惠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變三毒 爲戒定惠)


잘못된 생각은 비유하면 감기와 같습니다. 감기는 건강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자체가 큰 병은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도 감기처럼 잘 살피면 오히려 몸을 보호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번뇌가 곧 보리인 이치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생각을 너무 고통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중생이고 공부하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흐려진 물은 물로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요히 있으면 티끌이 가라앉아 절로 맑아집니다. 우리의 번뇌도 물에 있는 티끌과 같습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은 가라앉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定)과 혜(慧)는 또 무엇일까요. 흐려진 물을 맑히는 것이 정입니다. 그래서 물이 맑아져 사물을 맑게 비치게 되면 이것이 혜입니다.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라고도 합니다. 선정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상 합니다. 따라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다스리면 마하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진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종광 스님

(善知識 我此法門 從八萬四千智惠 何以故 爲世有八萬四千塵勞 若無塵勞 般若常在 不離自性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 莫起誑妄 卽自是眞如性 用智惠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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