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스님은 평생 장좌불와와 일종식으로 정진했다.

한 평생 장좌불와와 일종식으로 정진했던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은 항상 후학들에게 ‘공부하다 죽으라’며 참선 공부만큼 중요하고 귀한 공부가 없음을 강조했다.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외가에서 성산보통학교를 다니게 됐고, 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인생행로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도 장성에 있는 서원을 찾아다니며 유생들에게 한학을 귀동냥했다. 봉암서원, 필암서원, 학림서원, 고산서원 등 서원에서 유생들이 공부하는 ‘사서삼경’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익힌 한학은 훗날 원당암 법상에서 법문을 하며 인용하기도 했다. 그 인용구 중 하나가 주역 구절 중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집안에 경사가 있다)’이다.

혜암 스님은 서원 뿐만 아니라 백양사를 찾아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당시 백양사에는 만암 선사가 있었고, 청류암 극락전에 문을 연 광성의숙에서 50여명의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어서 어깨너머로 불경을 접하기도 했다. 또 스님들에게 불경을 빌려 읽기도 하면서 불교를 스스럼없이 접했다.

스님은 그렇게 인생행로를 고민하며 불교와 유학을 접하고 지내던 중, 일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고승전집’을 읽다가 본 임제종 고승 일휴 선사 모친의 유언문은 곧 발심의 인연이 됐다.
‘나는 이제 사바세계의 인연이 다하여 무위의 부처님 나라로 돌아가려 한다. 바라건대 너는 속히 출가승이 되어 너의 불성을 밝게 깨닫도록 하라. 그리하면 너는 장차 내가 지옥으로 떨어졌는지, 아니면 영원히 너와 함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대장부라면 불조가 다 너의 심부름꾼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책을 내려놓고 나가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 부처님께서는 49년을 설법하고서 단 한 자도 설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너는 응당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알아야 할 것을 안다면 무익한 망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몸으로-’

불과 27세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은 고승으로 널리 알려진 일휴 선사의 모친은 비록 몰락한 남조의 왕후였으나, 자식에게 남긴 이 유언문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혜암 스님은 바로 이 유언문을 읽고 난 후 도 닦을 마음이 간절하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을 굶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행로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찾았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불교 경전은 물론, 동서양 어떠한 철학서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나아갈 방향을 암시해주는 게송 하나를 만났다.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항상 큰 광명을 놓고 있도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