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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쳐서 알게 되면 중생도 부처와 다를 게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만법은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
욕망은 끝이 없어서 결코 채울 수 없어
비우면 지혜가 열려서 큰 사람이 된다

 

▲중국 남화선사에 모셔져 있는 육조 혜능 스님 진신.

 

 

17. 견성(見性)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의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一切經書及文字 小大二乘十二部經 皆因人置 因智惠性故 故能建立 我若無智人 一切萬法 本無不有 故知萬法 本因人興 一切經書因人說有)


이 말씀의 뜻은 간단합니다. 모든 경전의 말씀들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부처님도 내가 있음으로 해서 계신 것입니다. 만약 지금 현재 인식하고 있는 내가 없다면 부처님이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여기 기림사도 내가 있으니까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림사에 가기 싫다는 마음을 내고 실제로 가지 않으면 기림사는 여러분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존재가 돼 버립니다.


만약 울산이나 포항에 사시는 분의 아들이나 딸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서울에 굉장한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어떤지, 추운지,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이 모든 것이 관심거리입니다. 왜냐하면 서울에 여러분의 분신인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서울의 날씨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경전도 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로 해서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는 내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가 내 삶을 억압한다면 굳이 종교를 믿고 따라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혜능 스님의 말씀도 이런 뜻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도, 경전도, 문자도 아니,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저 먼 우주도,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여러분도 모두 현재 인식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기에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緣在人中有愚有智 愚爲小故 智爲大人)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욕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욕심이 많으면 어리석게 되고, 욕심이 적으면 지혜롭게 됩니다.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우면 큰 사람이 되고 욕심이 커지면 오히려 나는 작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욕망을 극대화 하는 것으로, 많이 가지는 것으로 나를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많은 것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코 채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덜어내고 비워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워질 수 있고 커질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비워야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욕망을 덜어내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되고 그러면서 변하게 됩니다.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사람은 수용할 수 있는 크기가 큰 사람입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에도 무관심하고, 남의 아픔에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내 욕심이 목까지 차 있는데 주변을 둘러볼 틈이 있을 수 없겠지요.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둘러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옹색한 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비워낼 수만 있다면 무한한 공간이 열리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큰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능 스님은 지혜롭고 지혜롭지 않음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迷人問於智者 智人與愚人說法 令使愚者悟解心開 迷人若悟心開 與大智人無別)


누차 설명한대로 우리는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여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고 진리이기도 한 그것이 우리 안에 원만하게 구족돼 있습니다. 다만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리게 되면 바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부처님이 차별이 없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부처님과 다른 것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끌리고 탐욕에 사로잡혀 마음이 욕망으로 꽉 차 본래의 진여본성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수용할 만큼 커다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도 애민중생여적자(哀愍衆生如赤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 사랑하기를 자식 대하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한량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고통이나 고민을 모두 수용해 편안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연의 조합으로 생긴 나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세상이 나와 더불어 한마음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故知不悟 卽佛是衆生 一念若悟 卽衆生是佛 故知一切萬法 盡在自身心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 菩薩戒經云 我本源自性 淸淨 識心見性 自成佛道 卽時豁然 還得本心)


부처가 무엇입니까. 깨달은 사람이 부처입니다.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님과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본래 우리 안에 내재돼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알지 못할 뿐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다만 중생적인 욕망에 불성이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만 걷어내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현실 속의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으니 그야말로 마음이 활달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고 함께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은 철저하게 욕망과 욕심의 노예입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구족돼 있습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부처임을 믿고 부처님처럼 마음을 쓰기만 하면 됩니다. 욕망으로 욕망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욕망을 채우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수고롭기만 할뿐 결코 이뤄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안에 모든 것이 구족돼 있습니다. 아니 진여불성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종광 스님

‘보살계경’의 말씀처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알게 되면 우리는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밖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와서 채워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내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부자입니다. 그럼으로써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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