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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국화, 고인돌

기자명 법보신문

어느 덧 11월이다. 지난 여름의 폭우와 무더위는 자취도 없고 온 산야는 홍엽황운(紅葉黃雲)으로 물들어 있다. 예년에 비해 날씨가 푸근해 가을 정취가 덜 느껴지지만, 지금 전국은 단풍과 국화가 한창이다. 때맞춰 11월5일과 6일 전북 고창에선 미당문학제와 국화축제가 열렸다. 그곳에 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기 때문이겠으나, 사실 고창은 선운사와 동백꽃, 고인돌로 더 유명한 문화 공간이다.


선운사 동백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수령(樹齡)도 오래려니와 그 자태가 무척 빼어나다. 하지만 동백이 지는 모습은 너무 처연해 마음이 짠하다. 그 광경을 송창식은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이라 노래했지만, 실제 동백의 낙화를 보노라면 그보다 더 잔인한 정경이 떠오른다.


참수당한 모가지가 땅에 떨어지듯 무참하게 지는 처참함을 문정희는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라 표현했다.


또 윤제림은 “협상은 또 결렬된 모양이다/ 오늘도 북소리에, 일제히 투신”이라 비유했다. 이처럼 동백은 국화와 함께 현대 가객(歌客)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꽃이다.


고창은 지금 국화 천지다. 미당의 대표 시 가운데 하나인 ‘국화옆에서’를 떠올린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심은 것이 이제는 마을 전체를 하얗고 노란, 그리고 보랏빛 꽃으로 뒤덮은 것인데 만개한 국화가 널린 들판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화려하다. 그러나 날씨 탓인지 올 미당문학제는 그리 흥성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옥천의 지용문학제, 봉평의 효석문학제, 진해의 김달진문학제 등에 비해 고창의 미당문학제는 초라하고 참가한 사람들도 경직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일부 단체에서 미당의 친일행위를 문제 삼아 딴죽을 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게 주최측의 푸념이다.


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치고 미당이 친일시를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또한 그 친일시가 미당의 다른 작품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에서도 미당의 친일시를 주제로 세미나를 갖는 등 이 문제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는 미당의 친일시 몇 편을 빌미로 미당축제를 방해하는 일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미당의 친일행위를 덮자는 게 아니라, 그 때문에 보다 소중한 것을 잃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고창은 신화와 전설, 역사와 문화, 산과 바다 등 이른바 문화자원을 고루 구비한 천혜의 예향(藝鄕)이다. 그곳엔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밀집해 있고, 질마재의 신화와 전설이 쟁쟁(錚錚)하며, 선운사와 모양성(고창읍성)을 비롯해 신재효와 서정주 등 예인의 생가가 오롯하다.


뿐만 아니라 너른 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굽이치고, 동호와 구시포의 모래밭과 뻘은 서해안 어느 해수욕장 못지않다. 고창처럼 빼어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두루 갖춘 곳도 그리 흔치 않으므로 이를 잘만 홍보하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나는 늘 안타깝다.


미당이 젊은 시절 친일시를 쓴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에 대한 평가는 엄정해야 한다. 그와 함께 그가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도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미당 기념관에는 미당의 걸작뿐만 아니라 친일시와 전두환 송축시까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미당이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도 그 시를 볼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장영우 교수
그러므로 미당문학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고창에서는 내 고장을 세계에 널리 알릴 방안 마련에 전념했으면 좋겠다.

 

장영우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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