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당을 절 안에 두어 부처님과 함께 산신을 모시고, 관음청과 함께 산신청을 읊는 의례를 지금도 행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고유의 신앙과 불교는 하나로 어우러졌고, 그 자체가 한국불교의 특성이 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불러오려는 샤머니즘적 신앙은 한국인의 소망일 뿐 아니라 집단무의식을 형성한다. 불교만이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근대의 여명기에 들어온 기독교 또한 강한 기복성을 내포하고 있다. 교회 신도들의 기도 제목을 보면 자식의 합격, 부모님의 치병, 남편의 승진 등 기복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역사와 전통으로서 기복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칫 나의 정체성, 한국문화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문화유전자처럼 있는 기복성의 성향을 없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소망의 발현을 부정하고서 종교가 성립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기복 불교의 극복을 주장한다. 기복적인 불교 의례와 행위는 불교가 중세의 낡은 껍질에서 벗어나 현대화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이자 불교 교리를 부정하는 반불교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복적인 불교 의례와 행위는 연기와 업을 부정한다. 세 문장으로 된 소설이 있다. “서울 강남에 사는 한 여자가 세탁기를 고치러 온 AS직원에게 짜증을 냈다. 그 다음 날 미국 L.A.에 사는 한 교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는 AS직원의 부하 직원의 아내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남편이었다.”
짜증을 들은 AS 직원이 회사로 돌아가서 아래 직원에게 화를 냈고, 아래 직원은 집에 가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였고, 그 아내는 마침 미국 L.A에 사는 친구와 통화하다가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다투었고, 다시 L.A.의 친구는 저녁의 파티에서 만난 친구와 말다툼을 하였고, 그 친구는 옆 좌석의 친구와 그랬고, 집으로 돌아간 그 친구는 남편과 싸웠고, 다음 날 운전하면서 아내가 던진 자기 어머니에 대한 비난을 곱씹던 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연기와 업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 기도가 그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중아함 권17의 ‘가미니경(伽彌尼經)’을 보면, 살인 등 악행을 행한 자가 죽은 후 주변 사람이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해서 왕생을 할 수 없다며, 이는 큰 바위를 깊은 물에 던져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위가 떠오르도록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찬송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반면에 선행을 한 자는 버터나 기름이 담긴 병을 깊은 물에 던져 깨뜨렸을 때 병 조각은 가라앉고 버터와 기름은 자연히 물 위로 떠오르는데 사람들이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가라앉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모든 것이 연기와 업에 의해서 이루어지니 기도와 찬양이 그를 바꿀 수 없다고 부처님은 단언하신 것이다. 그러니 왕생을 바라고, 행복을 원한다면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복을 짓는 일을 해야 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복전(福田)을 짓는 일이다.
기복은 깨달아 부처가 되려는 불교 자체를 부정한다. 불교의 믿음은 신을 믿고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믿음이다. 대승불교의 궁극 목표는 내가 깨달아 중생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믿음과 발심과 행이 하나가 되어야만 불교 신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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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