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복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복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복을 권하셨다. 중아함 제34권의 ‘복경(福經)’의 서문에서,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복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것이다.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복은 기쁘고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복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라. 마음으로 늘 생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복이 아닌 것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틱낫한 스님이 수 백 만 명의 서양인에게 불법을 전한 제1요인은 서양인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행복을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마음 가다듬기 수행을 통하여 느끼고 깨닫게 한 데 있다. 필자 또한 한국불교가 거창한 주장을 하기보다 대중들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가운데 깨달음에 이르는 행복과 깨달음의 회통불교로 전환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럼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흔히 욕망을 달성하는 것을 행복으로 안다. 좋은 학교, 많은 연봉, 좋은 집, 높은 자리를 꿈꾸고 이에 오르면 행복한 줄 안다.
하지만, 욕망은 신기루다. 여러 해를 실업자로 떠돌다 이제 막 취업한 사람은 마냥 행복하겠지만, 곧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연봉을 꿈꾸며 이를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욕망을 늘이는 데서 행복을 찾으려는 자는 그 욕망과 현실의 괴리, 그 괴리에서 오는 불만 때문에 늘 불행하다. 그러니,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 외려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바로 불타는 욕망에 있다고 한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을 통찰한 붓다의 말씀이다.
욕망을 줄이고 없애는 것이 소승적 행복이라면, 대승적 행복의 길은 타인의 행복을 짓는 일이다. 350만 년 전에 짐승과 다름없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던 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쳐 타인과 나와 연기를 깨닫자 사회란 것을 만들었다. 사회를 유지하면서 인간은 이타(利他)가 곧 이기(利己)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은 문화유전자(meme)에 남아 있다. 때문에 인간은 남을 도우면 자신도 모르게 행복감을 느낀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행복하게 한다는 역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보살행을 하면 마음이 흐뭇하고 환희심에 들뜨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마음의 행복과 함께 연기론과 업보에 따른 복의 인과(因果)를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덜고 그를 행복하게 하면 그것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또 끼치면서 결국 나의 복이 된다.
부처님께서도 기복(祈福)을 하지 말고 작복(作福)을 하라고 강조하셨다.‘복경’의 서문은 앞의 문장에 이어서 “나(부처님)는 오랜 동안 작복(作福)하여 오랫동안 복을 받았는데, 그것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것으로서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내가 복을 짓는 일을 해야 연기와 업의 원리에 따라, 인과관계에 의해 나에게 복이 오는 것이지, 기도의 효험으로 복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효험을 믿고 기도를 하며 기복을 하는 이는 물에 잠긴 바위를 기도로 떠오르게 하려는 것만큼이나 무지한 것이다. 그 효험을 강조하며 재물을 받는 이가 있다면, 이는 참으로 삿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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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