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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후쿠지(東福寺)-상

공안의 관문 꿰뚫고 대자유 이르는 임제종 총본산

 

▲도후쿠지 삼문(三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삼문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작문(無作門)의 3해탈문을 약칭하는 삼문은 전통적으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으로 이해돼 왔다.

 

3개의 산을 파내 바다 한 가운데 만든 섬. 그 위에 펼쳐진 간사이국제공항.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진원지인 혼슈와 불과 20km 떨어진 곳이다. 당시 대지진으로 6500여명이 사망했지만 놀랍게도 이곳은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일행 6명이 일본 토목공사의 자부심이라는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40분이었다. ‘테러를 막기 위해 철저히 조사한다’는 출입국 현수막 아래 각각의 지문까지 입력시킨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승합차를 타고 숙소를 향했다. 차는 인공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3km의 대교를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한국과 달리 왼쪽 차선으로 달리는 낯선 교통체계. 그런 탓에 역주행하는 듯한 느낌을 쉽사리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20분쯤 달렸을까. 회색빛 산업도시 오사카와 교토 시내를 가로질러 숙소에 닿았다. 우리가 답사기간 머무를 곳은 텐진가와(天神川)역 부근에 있었다. 학생들을 위한 4층 건물로 민족사 윤창화 대표와 인연이 닿은 한국학생 소개로 이뤄졌다. 3·4층을 사용하게 된 우리는 큰 짐만 내려놓고 곧바로 현관 앞으로 모였다. 첫날 목적지인 도후쿠지(東福寺)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교토 선종 5대 사찰 중 하나

 

▲도후쿠지 단풍은 일본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207번이나 208번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그때 등장한 분이 털모자를 쓴 야마모토 선생이었다. 60대 중반인 그는 교토 토박이로 외국인학교 교장을 맡고 계셨다. 맘씨 좋게 생긴 얼굴만큼이나 이국 생활에 낯설어하는 학생들에게 야마모토 선생은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다. 한국학생의 말에 따르면 외국인 학생들이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고, 공부를 마치고 정착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종종 일자리까지 마련해준다고 했다. 자신도 대학원 등록금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야마모토 선생님이 선뜻 큰돈을 빌려줘 해결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야마모토 선생은 승합차에 타라고 했다. 오늘은 교토에 온 첫날이니까 환영의 뜻으로 도후쿠지까지 모시겠다는 거였다. 굳이 선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차를 타고 30분 정도를 달렸을 때 도후쿠지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후쿠지는 임제종의 대본산이자 교토 5대 선종 사원의 하나다. 1236년, 당시 섭정이었던 구조 미치이에가 교토 최대의 가람을 세울 것을 발원하고 불사를 시작해 1243년 산문을 열었다. 도후쿠지(東福寺)라는 사찰 이름도 나라(奈良)의 2대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에서 한 글자씩 따와 지었다고 한다. 구조 미치이에가 사찰불사를 진행하던 중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가 그것을 이어받아 도후쿠지를 선종 사원의 전통적인 양식인 7당 가람으로 위용을 갖추어 갔다. 비록 최대 선종사원은 아니지만 도후쿠지가 교토 굴지의 선종사찰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원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도후쿠지의 역사가 그리 순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산문을 연 지 100여년이 채 되지 않은 1319년, 1334년, 1336년에 잇따라 화재가 발생함에 따라 대다수 전각이 불타버렸다. 그러나 얼마 후 복원불사가 시작돼 다시 대가람의 위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후쿠지는 창건 이후 반복되는 재난과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했지만 유서 깊은 사찰인 만큼 지금도 일본 중세를 대표하는 국보와 보물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세기 말 제작된 도후쿠지 개산조 벤엔 스님의 영정.

 

하지만 선종사찰이 수행도량으로서의 위격을 갖추는 것은 가람의 규모에만 있지 않다. 외려 수많은 납자의 무명을 타파할 수 있는 명안종사의 존재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이곳 도후쿠지에서 은산철벽 같은 공안과 마주해 숱한 세월을 고뇌하며 몸부림쳤을 수행자들.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혹독한 과정을 거치며 끝내 숱한 선승들이 오도송을 불렀으며 중생제도에 나섰으리라. 도후쿠지 770여년의 역사에서 역대 최고의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쇼이치국사(聖一國師)’로 불리는 엔니벤엔(圓爾弁圓, 1202~1280) 스님이다. 산문을 처음 열 때부터 25년간 줄곧 이절에 상주했던 벤엔 스님은 에이사이(榮西, 1141~1215) 스님에 의해 전해진 중국 임제선을 뿌리내리게 했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개산조는 일본 첫 국사 ‘벤엔’

일본 천황으로부터 처음 국사 칭호를 받은 고승 벤엔 스님. 그의 일생은 구도와 전법으로 일관됐다. 5세 때 불교공부를 시작해 10세 때 마하지관과 천태학을 배울 정도로 스님은 재능이 뛰어났다. 18세 때 도다이지 계단에서 수계를 받은 이후 일본 각지를 돌며 불교의 여러 교학과 수행체계를 익히고, 유학 등 외전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의 내적 갈증을 풀기에 일본은 너무 좁았다. 34세 때 중국으로 구법순례를 떠난 스님은 고승을 찾아 중국산천을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러던 중 경산 흥성만수선사에서 스승 무준(無準, 1178~1249) 선사를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36세 때 그곳에서 대오(大悟)한 스님은 임제종 양기파의 법을 잇고 7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선은 물론 교학에도 두루 밝았던 스님은 황실과 막부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았다. 그런 스님이 이곳 도후쿠지에 주석하며 ‘종경록’을 비롯한 선어록을 강의하고,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함으로써 칠통 같은 그들의 무명을 일시에 밝혔다. 또 법제자인 코칸 시렌 스님을 통해 최근 우리말로도 완역된 불후의 명저 ‘원형석서(元亨釋書)’를 남기게 했던 것도 큰 공덕이라 할 수 있다. 벤엔 스님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사라는 ‘원형석서’가 탄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승합차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니 사찰 입구가 보였다. 입장료가 400엔이었다. 환율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5800원이었다.

일본 최고 정원으로도 유명

기절할 만큼 아름답다는 교토의 가을, 그 중에서도 단풍으로 유명한 도후쿠지는 초입에서부터 놀라운 광경을 펼쳐냈다. 멀리 불전(佛殿)과 개산당(開山堂)을 잇는 츠텐교(通天橋)가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고, 하늘과 통한다는 그 다리 아래의 수많은 단풍들이 겨울나기에 앞서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빛깔로 한껏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붉디붉은 가을의 가람 앞에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벤엔 스님의 상을 모신 개산당에 올랐다. 사찰의 맨 위쪽에 자리 잡은 개산당은 중후하면서도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건물이었다. 그 앞에는 우리의 절마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개산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낮은 바위와 나무들이 가득한 정원이 펼쳐져 있고, 왼쪽에는 레몬 씨앗 크기의 자갈들로 정방형 모양을 만든 형이상학적 조형이 누워있었다. 우리는 개산당 옆의 보문원(普門院)에 걸터앉았다. 개산당 정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떠오른 것은 한국의 절마당이었다. 한국의 전통사찰에서 이런 절마당을 찾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일본 사찰 마당은 상징과 아름다움을 끌어들여 그것을 관하는 대상이었다면, 한국 절마당의 기능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번 떠오른 궁금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개산당을 나와 츠텐교의 긴 회랑을 따라갔다. 회랑이 끝나는 곳에는 거대한 전각 2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부처님을 모신 불전과 삼문(三門)이었다. 불전은 오래 전 화재로 소실됐던 것을 1934년 다시 세운 것이며, 뒤편 삼문은 비록 한번 불탔었지만 1394년 다시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오는 일본 최고(最古)의 삼문이자 국보다.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작문(無作門)의 3해탈문을 약칭한 삼문은 전통적으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으로 이해돼 왔다. 시각적으로 선종 양식을 본딴 이곳 삼문은 복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양 옆의 계단을 타고 상층으로 올라가면 본당에 들어갈 수 있다. 비록 공개는 하지 않지만 그곳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월개왕자, 선재동자, 16나한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익히 보았던 선종사찰의 산문인 일주문이나 불이문, 사천왕문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컸다. 

 

▲산문내 본당의 천정에 그려진 가릉빈가 그림.

 

그곳을 지나 일본 최고의 정원 중 하나로 유명한 방장(方丈)으로 향했다. 방장은 한국에서처럼 총림의 최고 선지식을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대중 스님들, 그 중 주지 스님이 거주하는 공간을 주로 의미한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다시 400엔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우리는 부엌을 의미하는 ‘구리(庫裏)’를 지나 방장실로 들어섰다. 안에는 기암괴석과 자갈로 이뤄진 가레산스이 형식의 정원이 신비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절마당은 잘 조성된 자갈들로 바다의 형상을 띠고 있었으며, 기암괴석은 섬처럼 바다 위에 둥둥 떠있었다.

방장 마루를 따라 건물 뒤로 돌아가자 철쭉과 모래를 이용해 만든 북쪽 정원이 나타났다. 체스판 같은 사각 문양이 규칙적이다가 멀어질수록 드문드문해지고 있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단조로움을 깨는 탁월한 미적 감각. 세계인들을 감탄시킨 정원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동시에 또다시 한국의 사찰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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