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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후쿠지(東福寺)-하

바위와 모래로 빚어낸 선의 정수 ‘카레산스이’

 

▲도후쿠지 방장의 남쪽 정원. 좁은 공간에 작은 백색의 돌로 물을 표현하고, 기암괴석을 쌓거나 석조를 이용해 산과 섬을 표현한 전형적인 카레산스이(枯山水)라 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라는 도후쿠지 방장(方丈) 정원. 방장의 다다미방을 중심으로 회랑을 따라 돌며 이국의 풍경을 눈 안에 꼭꼭 새겨 넣은 우리는 남쪽 툇마루에 앉았다. 아담한 정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푸르른 가을 햇살이 방장 건물 곳곳을 감싸고 있지만 정작 정원의 시간은 정지한 듯싶었다.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본의 정원은 모방적이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또 너무 쩨쩨한데다가 손이 많이 가서 관리도 힘들다는 얘기도 했었다. 그는 한국의 마당을 찬미했다. 집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준다고 했다. 또 일본의 정원과 달리 한국의 정원은 생활공간으로서 실용성이 크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꼽았었다.

우리 일행은 우두커니 앉아 방장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4개의 돌섬과 파도들. 일본인들은 왜 이런 독특한 형태의 정원을 만들었을까. 정말 쩨쩨하고 모방을 좋아해서일까.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

19세기 중엽 일본 목판화의 감각적인 색상과 과감한 구도법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줬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한 줄도 길다는 절제의 언어미학 ‘하이쿠’를 비롯해 일본의 가면극, 도자기, 꽃꽂이, 궁술, 검도, 다도, 건축 등은 지금까지 수많은 서양 예술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우리가 폄하하는 것이 어디에서는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서양처럼 큼직한 분수나 조각 등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심오한 일본의 정원 조성방식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응용한 정원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단순하게 일본의 정원을 쩨쩨하게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일본 정원문화 배경은 불교

 

▲시게모리 미레가 1939년 조성한 새로운 형태의 도후쿠지 카레산스이. 그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선종 사원의 역사에 해박한 윤창화 민족사 대표에 따르면 일본 정원은 불교를 만나면서 본격화됐다. 경주 불국사가 구품연지 등 조경을 통해 불국토를 표현하려 했듯 일본 사찰정원도 불교의 이상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것이다. 또 정원을 소우주로 표현하려는 의식도 원래는 불교의 세계관을 구현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많다. 일본 최고(最古)의 정원서(庭園書)로서 11세기에 쓰여진 ‘작정기(作庭記)’에는 극락정토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원 디자인과 시공방법, 공간분할, 연못, 섬, 폭포, 물의 흐름 및 석조의 조합과 배치기법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특히 ‘사람이 세운 돌은 자연 산수를 능가할 수 없다’는 대원칙 아래 최대한 인공의 미를 배제하고 산수화 자체에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원문화가 일부에서 향유됐다면 그것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 선사에 의해서다. 중국의 수묵 풍경화에 착안한 그는 산하대지를 선종 사원 내로 옮겨놓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물론 그 내면에는 단순명료한 선의 세계가 깊이 깔려 있었다. 좁은 공간에 작은 백색의 돌로 물을 표현하고, 바위를 쌓거나 석조를 이용해 산과 섬을 표현했다. 카레산스이(枯山水)는 그렇게 처음 만들어졌다. 고도의 상징성과 바닷속 같은 적막감은 공안을 움켜쥐고 깨달음의 길을 걷는 선승의 세계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후 무소 스님은 가는 곳마다 선종사원을 세우고 카레산스이 정원을 조성했다. 스님에 의해 전무후무한 형식의 정원이 잇따라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 바로 무사였다. 칼 한 자루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무사들은 단순하고 즉각적인 선종의 문화에 깊숙이 젖어들었다. 특히 카레산스이는 무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일본정원의 황금기를 만들어갔다. 전문적으로 카레산스이를 배치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센즈이 카와라모노’라고 불리던 장인집단들까지 생겨나게 됐다.

고도의 세밀함과 상징 담겨 

 

▲일본서 가장 오래되고 큰 도후쿠지 선당(1347년). 한 때 이곳에선 4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했다.

 


그러나 무로마치시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레산스이는 에도시대를 거치며 잠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다른 양식의 정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그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게모리 미레(1896~1975)가 1939년 이곳 도후쿠지 방장에 새로운 방식의 카레산스이를 조성하면서 일본인은 물론 서양인의 관심까지 크게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한국의 마당과 일본의 정원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되 차이가 크다. 한국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여 그 속의 인간은 더불어 존재한다는데 무게중심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인위적으로 자연을 조성하되 깊은 상징성과 함께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세계를 추구한다. 요컨대 영주 부석사의 절 마당에 서면 주변의 대자연이 모두 사찰정원이 되는 웅장한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면, 방장 정원에서는 지극한 섬세함과 극도의 단순함에서 비롯되는 선의 성성적적(惺惺寂寂)함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어느 것이 낫고 못하다 말할 수 있을까.

차갑게 정지한 듯 했던 카레산스이의 파도가 넘실거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방장 정원을 뒤로 했다. 시간은 오후 3시50분을 지나고 있었다. 일본 불교의 전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도후쿠지에는 볼 것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서둘러 발길을 옮긴 곳은 선당(禪堂)이었다. 선종사원은 전통적으로 법당, 불전, 선원, 산문, 고리(庫裡, 후원), 동사(東司, 화장실), 욕실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선당은 납자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곳으로 선종사원에서 선당이 차지하는 위상은 지중하다.

이곳은 1347년에 재건돼 지금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선당이다. 도리간수 7간에 들보간수 4간 홋처마 맞배지붕 양식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선당으로도 유명하다. ‘선불장(選佛場)’이라는 편액도 자못 흥미롭다. 송나라 무준사범(無準師範) 선사의 글씨로 이곳 개산조인 쇼이치국사(聖一國師)가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스승을 얼마나 존경했는지가 잘 드러나는 까닭이다.

일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됐다는 명성에 걸맞게 한 때 이곳에는 400여명이 머무르며 수행했다고 한다. 1898년 12월, 일찌감치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은 이제 눈 푸른 수행자들의 발걸음 대신 여행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선당에서 남쪽으로 30~40m 떨어진 곳에 동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사는 선종사원식 화장실이다. 무로마치시대 세워진 이곳 동사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스님들 화장실이다. 창살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100인이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었다는 화장실은 멀찍이 볼 때보다 훨씬 커보였다. 안에는 벽화형태의 그림으로 과거 수행자들이 화장실을 이용했을 풍경을 재현해놓고 있었다. 군대 뺨 칠 정도의 엄격한 규율과 시퍼런 선기(禪機), 화장실에서도 엄격한 절차를 지켜야 할 정도로 수행자에게 일거수일투족 모두 수행이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스님들의 배설물의 활용도가 대단히 컸다는 점이다. 이곳 배설물은 퇴비로서 이 지역의 야채 재배에 유용하게 사용됐다. 이것을 먹고 자란 야채는 맛있기로 소문이 나 조정과 무사들은 물론 일반 서민들의 부엌을 윤택하게 해주었다고 전한다. 물론 총림에 있어서도 스님들의 배설물이 중요한 현금 수입원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곳에 독특한 욕실이 있다하여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욕실은 삼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로마치시대인 1459년 만들어졌다는 욕실은 선종 가람 중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욕실이다. 놀라운 것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현대적인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사우나탕이다. 당시 수백 명의 수행자가 생활하고 있던 탓에 그들이 더운 물로 목욕을 하게 되면 히가시야마(東山) 36봉의 산들 모두가 민둥산이 될 판이었다고한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바로 증기시스템이었다. 더운 물이 아닌 증기로 몸의 때를 불려 벗겨냄으로써 물과 나무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에콜로지의 정신인 것이다.

동쪽에 두 개의 증기탕이 나란히 있고 각각 널문을 세워놓았다. 뒤쪽에는 솥과 아궁이가 있으며 발을 통해 증기를 위쪽으로 올려 보내는 구조다. 1907년 8월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고 한다.

목욕탕과 화장실도 ‘명물’

 

▲도후쿠지 욕실(1459년)은 물 대신 증기를 이용함으로써 물과 나무를 아낄 수 있었다.

 


교토의 어둠은 쉬이 찾아온다. 한국과 시차는 없지만 1000여km 떨어진 탓이다. 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절 한 켠에 내려놓고 우리가 들어왔던 월하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맘씨 좋은 야마모토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까지 대접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인왕문을 지나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30분 가량 달려 이른 곳은 일본의 전형적인 음식점이었다. 작지만 백년 전에도 그렇게 있었을 것 같은 그곳에서 우리는 우동 한 그릇씩 주문했다. 그때 우연히 탁자 옆의 오래된 사진이 눈에 띄었다. 150여 년 전,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20여명의 사람들,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사람들도 있었다. 오래된 음식점과 오래된 사진. 관념은 백년 전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얼마 뒤 나온 뜨끈한 우동 한 그릇. 교토 토박이 선생이 강력 추천하는 만큼 맛이 일품이었다. 허나 끝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우동 맛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던 그들의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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