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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덴류지(天龍寺)-상

선의 정신 곳곳에 배어있는 임제종 덴류지파의 대본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덴류지 정원. 모래와 풀과 바위와 연못, 반쯤 기울어진 소나무 한 그루. 게다가 연못에 비친 아라시 산의 울긋불긋한 자태는 마치 산수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새벽 6시,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여기가 교토라는 자각과 함께 어제 도후쿠지(東福寺)에서 보았던 쇼이치국사(聖一國師)의 영정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늙고 주름진 얼굴에 오른쪽의 불편한 눈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700년 된 그림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평생을 수행자로 살았던 스님. 마지막 순간 그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방편을 베푼 지 79년, 그 실마리를 알고자 하는가. 부처님과 조사들도 전하지 못했네.(利生方便 七十九年 欲知端的 佛祖不傳)’라는 게송을 남기고 적멸에 들었다고 했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利生)’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엉뚱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맹자는 양혜왕이 “천리가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묻자 이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달랐다. 제자들을 향해 “중생들의 안락과 이익(利益)을 위해 떠나라”고 했다. 쇼이치국사가 그랬듯 부처님 또한 이익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이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밀려드는 번뇌들을 애써 털어내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바지런함이 몸에 뱄는지 일행 중에는 벌써 씻고 식사준비를 하는 분도 있었다. 한 보살님은 며칠 전 사돈댁에서 보내왔다는 겉절이를 비롯해 고추장, 김 같은 반찬들을 꺼내고 있었다.

방장 정원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를 관한 뒤 우리는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쳤다. 또 보이차 한 잔씩을 마시고, 나머지는 각자 준비한 물통에 담았다. 오늘은 일정이 빠듯했다. 우리는 가방을 들쳐 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맘씨 좋은 야마모토 선생도, 길 안내를 도와줄 한국인 유학생도 없었다. 우리 힘으로 직접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덴류지였다. 그곳은 아라시야마 지역 중심부에 위치한 절로, 1225년 왕실 이공을 1339년 고다이고(醍醐) 일본 천왕을 위해 절로 개축했다는 선종사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이곳은 가을철 단풍 여행지로 일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첫 대중교통으로 게이후쿠 전철을 타보기로 했다. 1910년 ‘시조오미야’에서 ‘아라시야마’ 구간까지의 개통으로 시작된 게이후쿠 전철은 100년이 넘는 도시철도로 교토의 명물 중 하나다.

숙소에서 10분쯤 걸어 사이역에 도착했다. 200엔짜리 표 한 장씩 사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사 안은 등교하려는 남녀학생들로 빼곡했다. 낡은 전철에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서울의 시계를 1960~70년대로 돌려놓은 듯했다. 전철은 오래된 도시를 가로지르며 느긋하게 나아갔다. 스쳐가는 풍경이 고풍스러웠다. 게이후쿠는 일본에서도 거의 사라진 추억의 전철로, 예스러움을 좋아하는 철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대식 인력거를 끄는 젊은이. 누군가에게 신나는 여행길이 누군가에는 땀방울 뚝뚝 떨어지는 노동의 현장이다.

 


그렇게 30분쯤 갔을까. 종착역인 아라시야마에 도착했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멀리 아라시산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절로 향하는 길에는 예쁜 찻집과 음식점들이 경쟁하듯 늘어서 있었다. 그 중 한 곳에는 덴류지 정원 사진을 배경으로 ‘선(禪)의 마음을 보라’고 쓴 안내판도 있었다. 그 옆으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날렵한 몸매의 젊은이 한 명이 현대식 인력거를 끌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식 복장을 한 그는 여자 손님 2명과 잠시 얘기를 주고받더니 그들을 태우고 덴류지 반대쪽으로 멀어져갔다. 누군가에게 신나는 여행길이 누군가에는 땀방울 뚝뚝 떨어지는 노동의 현장이다.

덴류지는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였다. ‘大本山天龍寺’라는 글이 새겨진 큼직한 사각의 돌기둥이 절 초입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경내는 빛깔 고운 단풍나무들이 기모노 곱게 차려 입은 아가씨들 마냥 수줍게 서있었다. 연꽃 잎 말라붙은 넓은 방생지(放生池)를 지나자 멀리 고리(庫裏)가 보였다. 세계 최고의 정원 중 하나라는 덴류지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우리는 각각 500엔씩을 지불하고 고리 안에 들어섰다. 입구에 발을 들여놓자 정면으로 붉은 가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커다란 달마대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묘하게도 인상을 쓰고 있음에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달마대사의 힘을 빌려 삿된 기운을 막자는 의도로 보였다. 이는 교토에 난이 일어날 때마다 화재를 피할 수 없었던 덴류지 방장의 비운에서 비롯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덴류지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비석. 여기서부터 덴류지다.

 

무소 스님은 정말 정치승일까

신발을 벗고 방장 건물로 향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방장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조계사 법당의 1.5배는 충분히 됨직해 보였다. 누군가 일본인의 특성을 ‘축소 지향적’이라고 말했지만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규모가 큰 일본의 건축물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장엄하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덴류지 방장 정원은 도후쿠지와 마찬가지로 회랑을 따라 돌며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곳 정원이 훨씬 컸다. 바위와 잔돌로 만든 카레산스이(枯山水)도 도후쿠지 정원과는 사뭇 달랐다. 잔돌들이 바다를 이루고 바위가 섬처럼 떠있는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돌과 바위로 폭포를 만들어 물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여기에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 심산유곡을 이루는가 하면, 폭포를 거슬러 오르려는 물고기의 형상까지 만들어놓고 있었다. 일본의 정원문화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을 보고나면 그 누구라도 일본인들의 탁월한 심미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방장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을 때 홀연히 드러낸 정경은 또 한 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인간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방장 앞에 조성한 모래와 풀과 바위와 연못, 반쯤 기울어진 소나무 한 그루. 게다가 연못에 비친 아라시 산의 울긋불긋한 자태는 마치 산수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돌 한 조각 풀 한 포기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만 그것은 어떤 사물을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도록 만드는 놀라운 경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사찰정원의 창시자인 무소 소세끼 스님. 그는 지혜와 자비심으로 격동의 세월에도 막부와 일본 천황들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덴류지 방장 정원. 중국 조계 혜능의 한 방울의 물을 의미한다는 이곳 조원지(曹源池) 정원을 처음 만든 이는 일본 사원정원의 창시자인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 스님이다. 이곳 덴류지에서 카레산스이 방식의 정원이 시작됐고 전국 각지로 확산됐던 것이다.

 

불교는 義보다 중생이익 우선

선은 물론 미적 감각도 탁월했던 무소 스님. 그는 당대 최고의 선사로 막부는 물론 일곱 명의 일본 천왕으로부터 국사의 시호를 받았던 고승이었다. 그러나 훗날 메이지유신 때 정치승의 대명사로 부각되면서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지조가 없이 늘 힘 있는 권력자들 편에 있었으며, 정원조차 패잔병과 포로들을 이용해 만들었던 ‘관승(官僧)’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정말 정당할까. 스님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미에현 출신인 무소 스님은 4세 때 어머니를 잃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9세 때 구아(空阿)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4세 때 사람이 죽어 백골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구상도(九相圖)를 그려 벽에 걸어두고 무상관(無常觀)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18세 때 도다이지(東大寺)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밀교와 천태학을 공부한 스님은 20세가 넘으면서는 기도와 참선을 병행하며 치열하게 정진했다. 그런 스님에게 깨달음의 기연이 찾아온 것은 31세 때였다. 1205년 한 밤에 정원을 거닐다 방으로 향하던 중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확철대오했던 것이다. 이후 스님은 깨달음을 심화시키는 보림을 위해 철저히 은거생활을 했다. 하지만 깨달음의 향기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주머니 속 송곳이 삐져나오듯 스님의 명성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갔다. 온갖 요청에도 은둔을 지속했던 스님이 전법에 나선 것은 51세 때다. 고다이고 천황의 법문 요청에 병을 핑계 삼아 거듭 사양하다 마침내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세속으로 향한 스님의 발걸음은 본격화된다. 스님은 절을 짓고 관사에도 들어갔으며, 스님의 주변에 최고의 권력자들이 찾아왔고 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스님이 살았던 시대는 격동기였다. 천황의 권력이 난을 일으킨 막부에게로 넘어가고, 막부 반대세력의 도움을 얻어 천황이 권력을 다시 찾았지만, 지지했던 막부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기는 일이 잇따라 벌어졌다. 무소 스님은 이들 모두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그들로부터 모두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스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권력을 탐해 인의(仁義)를 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권력자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이 참다운 수행자의 길일까. 막부의 권력자를 설득해 죽은 천황을 위해 절을 짓고, 평등법문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쌓인 분노와 설움을 녹여냈다. 또 스스로 원수를 두지 않음으로써 권력자들에게 용서의 삶을 강조했고 전쟁포로들을 살리는 일에 적극 앞장섰다. 애써 패잔병들에게 정원을 조성하는 일을 맡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대립과 피비린내 나는 참화 속에서 모든 이들의 귀의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스님의 한결같은 자비심과 지혜에서 비롯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신의 명예를 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려했던 무소 스님. 그의 일생을 떠올린 순간 불교는 왜 의로움보다 중생들의 이로움을 더 중시하는지가 또렷해졌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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