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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덴류지(天龍寺)-하

불교에서 시작된 일본 목조 건축문화의 저력

 

▲일본 사찰의 전각들은 한국의 법당 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 많다. 덴류지 방장(方丈)도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조계사 법당보다 1.5배나 더 큰 규모다.

 

덴류지(天龍寺)의 하늘은 청명했다. 푸른 물감을 짜놓은 듯한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용처럼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우리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일본의 사적특별명승 제1호로 지정된 조원지정원(曹源池庭園)의 멋스러움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때 일행 중 누군가 “이런데 한번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각질 같은 아스팔트와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도시인에게 자연은 늘 동경의 대상이다. 더구나 이토록 빼어난 경관이야 새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무소 소세끼(夢窓疎石) 스님은 덴류지를 짓기 위해 당시 적대국이었던 원나라와의 교역을 제안했다. 덴류지를 짓겠다는 간절함이 컸겠지만 일본과 원나라 간에 화해의 물꼬를 트자는 의도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무소 스님의 의견은 최고 권력자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됐고 마침내 1345년 8월 덴류지를 낙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계 안팎에서 스님을 음해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선종의 성장을 시기한 천태종 측에서는 “덴류지를 없애고 무소 스님을 귀양 보내야 한다”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다. 천태종의 억지에 임제종 스님들의 반발도 차츰 커져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그때마다 무소 스님은 제자들을 적극 만류했고, 나중에는 분란의 종식을 위해 일선에서 물러났다. 아무리 고승일지라도 당시 조원지정원의 풍경을 바라봤을 스님의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원지정원(曹源池庭園)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져있는 산책로. 이곳은 나무와 돌과 이끼들이 한껏 조화를 이루며 마치 스스로 그러하다[自然]는 듯이 자리 잡고 있다.

 

비단 무소 스님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막부에게로 넘어간 권력을 간신히 되찾았지만 또 다른 세력이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상황에 처한 고다이고(後醍) 천왕, 그 천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동생과 다시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당시 그들에게 이곳 조원지는 권력싸움에서 쟁취한 전리품 같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도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거나 “지옥과 극락은 모두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성현의 말씀에 비춰보면 외부의 경관에 기대어 만족을 구하는 일은 일견 허망하게도 보인다.

우리는 연못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져있는 작은 길을 걸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온갖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 수백 년은 족히 됐음직한 벚나무, 쭉쭉 뻗은 미끈한 대나무, 거기에 푸른 이끼들까지 한껏 조화를 이루며, 마치 스스로 그러하다[自然]는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원지를 돌아 나오니 거대한 방장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방장이라는 편액 글씨에는 선종사찰답게 절도와 기개가 한껏 배어있었다. 웬만한 한국 법당의 2~3배는 됨직한 방장(方丈)은 오랜 세월 원형을 유지해오다가 1864년 막부말기의 혼란 속에서 불타버린 것을 1899년 복원했다. 회랑으로 연결된 바로 옆의 소방장(小方丈)도 같은 해 불탄 것을 1924년 재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장건물은 110년 남짓 된 건물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중후하고 고풍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덴류지 방장건물의 편액. 선종사찰답게 글씨에도 절도와 기개가 한껏 배어있다.

 

편백나무 등 양질목재 다수

사실 일본의 목조건축 기술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건축물로 7세기 후반 세워진 나라의 호류지(法隆寺) 금당(金堂)을 비롯해 1000년이 넘는 거대한 목조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3세기 무렵 지어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건축기술은 6세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은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어 절을 지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을 처음 목격했을 일본인들의 충격이 대단히 컸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일본의 풍토에 맞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어갔다. 나라시대(710~794)에 벌써 지붕에 기와를 올리지 않고 나무껍질로 지붕을 잇기 시작했다. 또 한국과 중국에서 통나무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정방형, 사각형, 십육각형, 원형 등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한국과 중국이 기와 밑에 수십 센티미터의 흙을 넣는 것과 달리 일본은 이미 고대에 나무상자 형태를 만들어 이를 대체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여기에 나뭇결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단청이나 옻칠을 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한 것도 일본 사찰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 보존기술도 세계적

이렇듯 일본이 목조 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목재의 풍부함이 무엇보다 컸다. 최고의 목재라는 편백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으며, 그것을 대신할 삼나무와 소나무 숲도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일본의 탁월한 건축수리기술도 한몫 톡톡히 했다. 일본 건축전문가인 무라타 게이찌의 ‘일본 전통 건축 기술의 이해’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천년 전부터 사찰 본당과 같이 굵은 기둥과 보를 사용하고 있는 건축물에  대해 30년을 전후해 한 번씩 점검과 유지수리를 실시했으며, 200~300년을 전후해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목조건물에 새로운 젊음이 부여됐으며, 고도의 수리기술이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확실히 전수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문화재 수리 성과의 축적과 공개도 주목할 만하다. 문화재를 수리할 때면 전문기술자가 반드시 조사의 성과, 수리대상 건물의 사진, 공사 중의 사진, 도면 등을 게재한 ‘수리공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관계기관에 모두 배포해 언제든 활용토록하고 있다. 특히 과거 수리 성과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로서는 부러운 점이다. 1900년 이래 지속된 정밀한 보존도가 현재 3만장에 이르고 있으며, 1929년 작성된 도다이지(東大寺) 남대문을 비롯한 수리보고서도 이미 1000권을 넘어설 정도로 방대하다. 이러한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역량이 면면히 이어져 습기에 약하고 썩기 쉬운 목재가 1300년이 넘도록 멀쩡하게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붉은 가사를 뒤집어 쓴 달마대사님을 뒤로 하고 고리(庫裏)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곧장 법당으로 향했다. 선불장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이곳 법당은 덴류지의 명소 중 하나다. 1864년 병화(兵火)로 법당이 불타버린 이후 에도시대(1603~1867) 후기에 지어진 운고안(雲居庵) 선당(禪堂)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문수·보현보살이 각각 모셔져 있으며, 그 양옆에 마련된 단에는 무소 스님과 아시카가의 상이 봉안돼 있다. 

 

▲현대 일본화의 거장이었던 가야마 마타조(加山又造, 1927~2004) 화백이 1997년 그린 운룡도(12.6m×10.6m). ‘날카로운 눈으로 팔방을 주시하는 용’이라는 별칭처럼 상상속의 동물이 실재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매년 10월30일이면 이곳에서 개산조인 무소 스님의 추모식이 열리는 등 법당의 기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이곳을 유명하게 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천정 위에 그려진 운룡도(雲龍圖) 때문이다. 현대 일본화의 거장이었던 가야마 마타조(加山又造, 1927~2004) 화백이 1997년 그린 운룡도(12.6m×10.6m)는 ‘날카로운 눈으로 팔방을 주시하는 용’이라는 별칭처럼 상상속의 동물이 실재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나운 용이 교화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처럼 널리 흩뿌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또 법당이 다시는 불길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대중들의 염원도 깃들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세기의 걸작 앞에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본말이 전도됐다는 반발심 비슷한 것인지도 몰랐다. 법당은 말 그대로 법이 중심이 되는 곳이다. 부처님과 그분의 가르침이 핵심이 돼야 하고 건축도 거기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은 편견일까. 천정을 가득 메운 거대한 용의 위용, 그 앞에 법의 공간은 위축되고 용이라는 볼거리만 부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끝내 지우기 어려웠다.

수행과 신행 기능은 탈색

우리는 17세기 초 건립됐다는 칙사문(勅使門)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중문(中門)을 둘러본 후 절문을 나섰다. 일본 임제종를 대표하는 사찰 중 하나로서 딸린 암자만도 150여개를 넘는 대찰. 1864년 혼돈의 겐지(元治) 원년을 거치며 폐허가 되다시피 한 덴류지는 150년이 흐른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찰로 다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교토를 처음 찾는 이들이 꼭 방문해야 할 곳으로 꼽히는 만큼 덴류지의 정원과 곳곳의 단풍은 참으로 빼어났다. 하지만 더 이상 수행자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는 이곳을 선종사찰이라 할 수 있을까. 수행과 신행이라는 사찰의 일차기능이 탈색된 공간,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공간. 덴류지는 어쩌면 오늘날 일본불교가 맞닥뜨린 모순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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