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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닌나지(仁和寺)

권좌 버리고 출가 택한 일본 천황들의 귀의처

 

▲일본 국민에게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천황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부처님께 귀의했던 번뇌와 욕망을 지닌 한 인간이었다. 사진은 권좌에서 물러난 법황(法皇)들이 직무를 봤던 공간인 신덴에서 바라본 북쪽 정원 풍경.

 

별천지 같은 정원과 꿈틀대는 천룡(天龍)을 뒤로 하고 절을 나섰다. 들어갈 때 보았던 거대한 사찰비석이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갈라놓고 있었다. 세속의 거리에는 화려한 기모노 차림의 여인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근래 한복 입기를 꺼려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기모노 차림의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9세기 고코 천황이 건립 시작

교토에서는 전통의상 장려 차원에서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에게 입장료 할인 등 여러 혜택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노인들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도 기모노를 즐겨 입는다. 기모노는 ‘한복’이나 중국의 ‘치파오’와는 달리 또 다른 멋이 있다. 일본인들 스스로 기모노를 일컬어 ‘걸어 다니는 미술관’이라고 자찬할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다.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비싼 것은 수억 엔에 이른단다. 같은 동양문화권 사람도 그럴진대 서양인의 눈에 비친 기모노는 얼마나 매력적일까. 이는 클로드 모네(1840~1926)가 1870년대에 이미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평일임에도 아라시야마(嵐山)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정취를 즐기려는 행락객들이 몰린 탓이다. 우리는 도게츠교(渡月橋)까지 걸었다. ‘달을 건너는 다리’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아라시야마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강 위에서 바라본 풍경이 일품이다. 멀리 가을색 짙은 산을 배경으로 물 위를 떠다니는 몇 척의 작은 배들. 강을 끼고 길게 뻗은 길, 그 위를 쌍쌍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우리는 도게츠교 중간쯤에서 발길을 되돌렸다. 건널목 맞은편에는 언제부턴지 검은 승복 차림의 스님 한 분이 탁발을 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정성껏 발우를 받쳐 든 스님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미동도 없이 섬처럼 서있었다. 한국에선 1964년 조계종이 탁발을 종법으로 금지시킴으로써 탁발문화를 찾아보기 쉽지 않게 됐다. 스님들의 품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탁발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란다. 스님들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수천 년간 이어오던 탁발의 전통을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의문은 있지만 어쨌든 그 영향 탓에 탁발승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곱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다. 저 일본 스님은 무엇 때문에 탁발을 할까. 모를 일이다. 다만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 수행자라면 인욕(忍辱)과 하심(下心)을 배우는데 지금의 탁발보다 더 좋은 수행방편이 없을 듯싶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 닌나지 인왕문.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금강역사가 인상적이다.

 

잠시 후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한국과 달리 일본 시내버스는 뒤로 타서 앞으로 내리는 구조다. 버스 내부에는 사찰 광고들이 유난히 많았다. 대부분 단풍이 절정이니 때를 놓치지 말라는 내용들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차창 밖의 따스한 볕에 꾸벅꾸벅 밀려드는 졸음을 애써 견디고 있었을 때였다. 왼쪽 편으로 거대한 닌나지(仁和寺)의 인왕문(仁王門)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일행을 따라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복층구조의 인왕문은 지온인(知恩院)과 난젠지(南禪寺)의 산문(山門)과 더불어 교토 3대 절문으로 일컬어진다. 장엄하면서 고풍스러움까지 겸비한 이 문은 1637년부터 1644년 재건돼 지금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문의 양쪽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이 버티고 서있다. 코끼리보다 백만 배나 힘이 더 세다는 그들은 부리부리한 호법(護法)의 큰 눈으로 닌나지를 오가는 사람들을 훑고 있었다. 경주 석굴암에서 보았던 금강역사를 그대로 확대해놓은 듯 생동감이 넘쳐난다.

우다 천황 사찰 완성 후 출가

닌나지의 역사는 일본의 제58대 고코(光孝, 830~887) 천황이 오우치야마산(大內山)의 남쪽 기슭에 아미타삼존을 본존으로 하는 사찰을 건립하면서부터다. 불법에 귀의한 고코 천황이 미처 사찰불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셋째 아들 우다(宇多, 867~931) 천황이 부친의 뜻을 이었다. 그는 888년 금당을 짓고 당시 연호를 따서 절 이름을 닌나지라 붙였다. 아버지 못지않게 신심이 깊었던 우다 천황은 재위 10년 만에 황위를 장남에게 물려주고 사문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나이 불과 31세 때였다. 닌나지에 머물며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은 그는 법황(法皇)으로 불리며 황실과 세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닌나지가 황실과 깊은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이 절은 오무로고쇼(御室御所)라고 불리며 줄곧 역대 천황가의 왕자들이 주지를 계승해 메이지정권에 이르기까지 불교 종파를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1467년 교토에서 벌어진 ‘오닌의 난’ 때 폐허가 되기도 했지만 훗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가 막대한 재정을 지원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천황의 사찰이기에 가능했다. 오늘날에도 닌나지는 진언종 오무로파(御室派)의 총본산으로 일본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천황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고 고집하는 일본인에게 한때 ‘덴노(天皇)의 사찰’이라는 닌나지는 분명 아이러니였다. 살아있는 신이라는 천황이 인간 붓다에게 경배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를 모순으로 보는 그 자체가 다분히 근대의 왜곡된 사고에 기인한다. 1868년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신도(神道) 부흥을 목적으로 불교와 신도를 분리시키려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단행했다. 이후 그들은 4000개가 넘는 사찰들을 파괴하거나 폐쇄시켰으며, 수천 명의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일본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폐불훼석(廢佛毁釋)을 자행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불교계의 관료화 및 타락도 원인이 됐겠지만 신도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형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유신세력의 의도가 더욱 컸다. 하지만 메이지정부의 야욕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결국 막을 내렸다. 천황은 일본 국민 앞에서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막부시대에 그러했듯 천황은 일본인을 단결시키는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간 것이다.

사실 일본불교사에서 황실의 역할은 지대했다. 닌나지를 창건한 고코 천황과 그 아들 우다 천황뿐 아니라 역대 천황들 대부분 불교에 귀의했다. 이들 독실한 천황들에 의해 불교는 보호 받아 왔으며, 때로는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이유로 물고기조차 잡지 못하는 살생금지령이 전역에 내려지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천황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부처님께 귀의했던 번뇌와 욕망을 지닌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천황 등 황족들이 주지 계승

우리 일행은 인왕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한 신덴(宸殿)으로 올랐다. 신덴은 닌나지의 중심 건물로 일본의 전통주택을 지을 때 사용하는 침전건축 양식과 사찰건축 양식을 적절히 사용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덴 내부의 미닫이문에 그린 노송. 전체적인 구도와 세밀한 표현이 놀랍다.

 


신덴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곳이다. 하나는 화려한 칙사문(勅使門)이고 또 하나는 입장객들을 위한 문이다. 500엔을 내고 입장권을 끊어든 우리는 일반문을 통과해 신덴 안으로 들어갔다. 신덴을 중심으로 시로쇼인(白書院), 쿠로쇼인(黑書院), 레이메이덴(靈明殿) 등 10동이나 되는 건물들이 비를 맞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회랑으로 연결돼 있었다. 삭발염의의 길을 택한 ‘법황’이 직무를 보았다는 신덴의 곳곳에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함이 묻어났다. 내부 미닫이문에는 근대 일본 역사화의 대가인 하라자이센(原在泉, 1849~1916)이 그린 풍경화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또 황족 주지의 공식 사랑채인 시로쇼인과 쿠로쇼인의 미닫이문에도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특히 후쿠나가 세이한(福永晴帆)이 1937년 그렸다는 시료쇼인의 노송은 구도와 묘사에 있어 장엄하기까지 했다.

 

▲닌나지의 건물들은 비를 맞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회랑으로 연결돼 있다. 사진은 회랑에서 바라본 신덴.

 


그러나 이곳 볼거리의 백미는 신덴에서 바라보는 북쪽 정원이었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연못 너머 다실이 보이고, 다시 그 너머로 17세기 초 세워진 오층탑이 들어서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폭포와 나무를 솜씨 좋게 배치함으로써 색다른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기모노를 입은 중년 여성이 회랑에 기대서서 북쪽 정원의 오층탑을 우두커니 올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옆으로 검은 승복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빠르게 지나갔다. 한 순간 내가 닌나지의 과거 속으로 저벅저벅 들어와 있는 듯 했다.

모를 일이다. 나는 어떤 기연으로 이 낯선 나라, 낯선 절에서, 낯선 사람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점차 낯설어지는 것은 그 여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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