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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승의 신통력

허공을 밟고 걸으며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다

‘유사’에 등장한 고승들은
초인적 도력 갖춘 영웅들

 

미래에 닥칠 일 예견부터
자신의 방 날려 옮기기도

 

 

7세기 전반 백제 무왕 때의 지명법사는 신통한 도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고, 이곳에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사진은 미륵사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출가 수행한 고승에게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도력(道力)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고승들은 미래에 닥쳐올 일을 미리 예견할 수도 있고,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수도 있고, 자신의 방을 날려서 옮기고,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울 수도 있으며, 같은 시간에 여러 곳에 몸을 나타낼 수도 있고, 멀리서 석등에 불을 밝힐 수도 있으며, 허공을 밟고 걸을 수도 있으며, 향가를 지어 불러 자연의 변괴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우물물을 넘치게 할 수도, 바닷물을 기울이게 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여러 고승들은 초인적인 도력을 갖고 있는 영웅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속 보통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 눈덩이처럼 뭉치면 더 뛰어난 신통력의 소유자로 이야기될 수 있었다.


7세기 전반 신라 선덕여왕 시절의 일이다. 혜공(惠空) 스님은 어느 날 풀로 새끼를 꼬아서 영묘사로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와 남문의 낭무(廊)에 둘러 묶었다. 그리고 강사(剛司)에게 알렸다.


“이 새끼줄을 사흘 후에 풀어라.”


강사는 이상히 여겨 그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사흘 만에 선덕여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 그 탑을 태웠지만 새끼 맨 곳만은 화재를 면했다. 지귀는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던 총각, 그 총각의 심화가 영묘사를 태울 것임을 혜공은 사전에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것이다.


7세기 전반 백제 무왕 때의 지명법사(知命法師)도 대단한 도력의 소유자였다. 서동(薯童)과 선화(仙花)공주는 많은 금을 모아서 언덕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獅子寺) 지명법사에게 금을 신라 왕실로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는 말했다.


“내가 신통한 도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도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두었다. 그리고 선화공주는 지명법사에게 용화산 아래의 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는 신통한 도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못을 메운 곳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고구려 반룡사(盤龍寺)의 보덕(普德)은 도교가 불교에 대치함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민망히 여겨 여러 차례 보장왕에게 간했다. 왕이 듣지 않자 보덕은 신력(神力)으로 방장을 날려 남쪽 완산주(完山州)의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서 살았다.


구름을 타고 당나라를 오고가던 고승도 있었으니, 곧 울주 영취산의 낭지(朗智) 스님의 경우다. 그는 구름을 타고 당나라의 청량산으로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는 잠시 후에 즉시 돌아오는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선덕여왕 때의 양지(良志)는 석장(錫杖)을 부리는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석장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의 집에 가서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그것을 알고 재의 비용을 넣게 되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거주하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분황사는 의상이 출가했던 곳이다. 의상은 훗날 황복사에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놓지 않았다. 그 제자들도 층계에서 석 자나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았으므로, 의상은 그들을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 할 것이니, 세상에 교훈될 것은 못 된다.”


의상의 제자 오진(悟眞)은 하가산(下柯山), 즉 안동의 학가산 골암사(骨寺)에 살았다. 그는 밤마다 골암사에서 팔을 뻗어 스승이 계시는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고 한다.

 

향가 지어 변괴 물리치고
천지귀신 조종할 수 있어

 

고승 신통력은 고대인이
꿈꾸어왔던 소박한 희망


진평왕 때의 승려 융천(融天)은 향가를 지어 불러 혜성의 변괴를 물리쳤다. 거열랑(居烈郞), 실처랑(實處郞),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들이 풍악, 즉 금강산에 놀러가려고 하는데 혜성이 나타났다. 낭도들이 의아하게 여겨 여행을 중지하려 하자 융천이 혜성가(彗星歌)를 지어서 불렀다. 별의 괴변은 곧 사라졌고, 이에 세 화랑은 금강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경덕왕 19년(760) 4월2일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승려를 청해서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월명이 향가 도솔가를 지어 불렀는데, 조금 후에 괴변이 사라졌다. 이처럼 향가는 능히 천지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었고 고승들 중에는 이런 도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포산(包山)은 지금 현풍의 비슬산(琵瑟山)이다.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승려가 조용히 수행하며 살고 있었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에 몸을 붙이고 살았다. 서로 10여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할 때면, 산 속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하여 굽으니, 그 모습이 꼭 영접하는 것 같았다.

 

 

국보 제37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의상 스님이 황복사에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의상 스님은 층계 대신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고 한다.

 


관기는 이를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관기가 도성을 부르려할 때도 또 이와 같이 하여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굽었고, 도성은 곧 관기에게 이르렀다. 이렇게 관기와 도성은 산속의 나무를 움직여 멀리 있는 상대방에게 소식을 전했다.
753년 여름에는 가뭄이 심했다. 경덕왕은 유가종의 태현(太賢)을 내전으로 초청, ‘금광경(金光經)’을 강하여 비를 빌게 했다. 어느 날 재를 올리는데, 대궐의 우물이 말라 정수(淨水) 올리는 일이 늦었다. 이 사실을 안 태현은 낮에 경을 강의할 때 향로를 받쳐 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과 가지런했다. 온 궁중이 놀랐고,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이듬해인 754년의 일이다. 화엄종의 법해(法海) 대덕을 황룡사로 청해서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경덕왕도 친히 행차하여 향을 피웠다. 왕이 법해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난 해 여름에는 태현법사가 ‘금광경’을 강하니, 우물이 일곱 길이나 솟았습니다. 이 분의 법도는 어떠합니까?”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인데 무엇을 그렇게 칭찬하십니까? 즉시 창해(滄海) 물을 기울여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떠내려가게 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오시에 경을 강할 때, 향로를 당겨 잠잠히 있으니 잠깐 사이에 궁리(宮吏)가 뛰어와서 보고했다.


“동쪽 못이 벌써 넘쳐서 내전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었다. 법해는 웃으면서 아뢰었다.
“동해물이 기울어 쏟아지려고 수맥이 먼저 넘친 것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절했다. 그 이튿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午時)에 바닷물이 흘러넘쳐 불전(佛殿)의 계단 앞에까지 들어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왕은 법해를 더욱 믿고 존경했다.


신문왕(681~692)이 돌아가고 효소왕(692~702)이 왕위에 올라 왕릉을 만들고 장례 길을 닦았다. 정공(鄭恭) 집의 무성한 버드나무가 길을 막고 서 있어서 이를 베려했지만, 정공은 자신의 머리를 벨지언정 나무는 베지 못한다고 버티었다. 이에 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베고 그 집을 묻어버렸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정공과 교분이 두터운 혜통(惠通)도 제거하기로 했다. 이에 갑옷 입은 병사로 하여금 혜통을 잡게 했다. 왕망사(王望寺)에 있던 혜통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 사기병과 붉은 먹을 묻힌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외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


곧 사기병 목에 한 획을 칠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자기 자신의 목을 보라.”
그들이 자신의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서로 쳐다보고 놀랐다. 혜통은 또 외쳤다.
“만약 병목을 자르면 너희 목도 잘릴 텐데 어찌 하려느냐?”
그 병사들은 달아나 붉은 획이 그어진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은 말했다.
“화상(和尙)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겠느냐”
이에 내버려 두었다.


명랑(明朗)이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풀로 5방의 신상을 만들며 유가명승 12분으로서 명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지었다. 당나라군사와 신라군사가 접전하기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김상현 교수
허공을 밟고 걸을 수도 있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으며, 사철 연꽃을 피울 수도 있고, 바람과 물결을 일으킬 수도 바닷물을 기울일 수도 있는 신통력, 나무와도 소통하고 천지귀신도 움직일 수 있는 도력은 고대인들의 소박한 꿈이고 희망이었던 것이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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