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선묘낭자

한·중 넘나들며 불법 수호한 호법신장

의상 스님에 연심 품었으나
굳은 구도심에 감복해 귀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청량함이 감도는 얼굴에 날렵한 콧날, 총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떡 벌어진 풍채와 느긋하면서도 안정된 몸놀림, 진중한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비범한 인상마저 풍겼다.


“어찌 저리도 멋진 분이 있단 말인가.” 선묘낭자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머나먼 나라 신라에서 바다 건너 온 귀한 손님이라 했다. 화엄불교를 배우기 위해 막 당나라에 당도한 참이라고. 손님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뒤에 서서 공손히 예를 갖추고는 있지만 벌렁대는 심장에 숨이 막혔다. 몰래 훔쳐보다 언뜻 비친 온화한 미소에 선묘낭자의 복숭아 빛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선묘낭자의 마음을 단박에 빼앗아 버린 이 비범한 청년은 바로 신라 의상 스님이다. 669년 의상 스님은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 스님에게 화엄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를 찾았다. 선묘낭자는 막 당에 도착한 의상 스님을 공양했던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여식으로, 당대 대표 미녀로 손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빼어난 미색으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수많은 남성들의 구애에도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을 만큼 도도했던 그녀가 바다 건너 찾아온 한 스님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애끓는 연심의 상대가 세속의 연을 끊고 불도를 구하는 수행자라니. 억울할 법도 했건만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선묘낭자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의상 스님을 유혹하여 부부의 연을 맺으리라 결심했다. 스님을 극진히 공양하며 됨됨이를 눈여겨 본 아버지 유지인도 내심 딸의 연심이 결실을 맺길 바라는 눈치였다. 스님이지만 엄연한 신라 왕족 출신인데다 그 학식과 비범함이 사윗감으로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묘낭자는 아버지의 암묵적인 격려 아래 의상 스님의 곁을 시도 때도 없이 맴돌았다. 매일 아름다운 옷과 장식, 향기로운 냄새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하고, 스님을 찾아가 온갖 아양과 애교로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다. 타고난 미색에 화려한 치장을 한 선묘낭자의 모습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거기에 교태가 더해지니 그 매력이 어찌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선묘낭자의 이 같은 유혹에도 그녀를 대하는 의상 스님의 태도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피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시종일관 수행자로서의 법도에 어긋남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다.


사실 스님이라고 그녀의 간절한 연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속의 사랑에 비할 수 없는 원대한 발원이 있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불도를 닦아 위없는 진리를 구하고 고통 받는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굳건한 원력이다.


더욱이 당나라로 오기까지의 과정에서도 이미 선묘낭자의 유혹에 버금가는 무수한 난관을 거쳐온 터였다. 특히 함께 유학을 결심했던 둘도 없는 도반 원효 스님이 배를 타러 가던 중, 비를 피해 들어간 고분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오도(悟道)를 체험했을 때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도반은 하룻밤 사이 마음을 바꾸어 “모든 것이 마음 속에 있는데 어딜 가서 진리를 구한단 말이냐”는 말로 그를 흔들어 놓고는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의상 스님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어렵게 당나라 사신의 배를 빌려 타고 홀로 유학길에 올랐던 참이다. 매서운 풍랑과 폭풍우에 생명의 위험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런 스님에게 선묘낭자의 유혹이 먹혀들 리 만무했다. 스님에게 그녀는 속히 깨달음을 얻어 제도해야 할 안타까운 중생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한 바대로 결국 선묘낭자는 바위같이 굳건한 의상 스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러나 구도자로서의 태도를 한시도 버리지 않는 스님을 지켜보며 연심과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마음이 솟아났다. 바로 크나큰 존경심이었다. 그녀는 스님에게 귀의해 불도를 닦겠다는 원을 세웠다.


“세세생생 스님께 귀의해 대승을 익히고 배워 대도(大道)를 성취하겠나이다. 제자는 스님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공양을 올릴 것이며 공부와 교화, 불사를 이루실 수 있도록 모든 마음을 다하겠나이다.”


선묘낭자의 사랑이 세속의 감정을 뛰어넘어 한 차원 높은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된 순간이다. 불도에 귀의해 새롭게 발심한 선묘낭자는 이어 “반드시 다시 찾아와 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한때 연심의 대상이자 마음의 스승을 떠나보냈다.


의상 스님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당대의 고승 지엄 스님이 머물고 있는 종남산 지상사를 향해 구도의 발걸음을 다시 재촉한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이후 지엄 스님에게 7년간 화엄학을 깊이 배워 상수제자가 됐다. 그리고 신라 땅에 화엄불교의 사상을 널리 펼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한반도는 영토전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기에 의상 스님의 귀국이 정치적 문제로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일부학자들의 추측도 있다. 의상 스님이 당나라에 발을 디뎠을 때 한반도에서는 이미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였고, 지엄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를 마쳐갈 무렵에는 서서히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당나라가 신라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신라왕실에 전하기 위해 귀국을 앞당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속내야 어찌됐든 의상 스님은 귀국길을 서두르는 중에도 과거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 지친 유학승을 극진히 공양한 공덕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한편, 당나라에 처음 당도해 구도의 길로 인도했던 첫 제자 선묘낭자의 간곡한 청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요긴하게 써먹는 엇갈림의 미학은 이 설화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배를 타러 가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선묘낭자의 집을 방문했지만 하필 선묘낭자는 부재중이었던 것. 더욱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의도한 복선이라기엔 선묘낭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발심한 후 의상 스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수년을 기다려온 그녀였기 때문이다.

 

용으로 화현해 바닷길 수호
부석사 창건에 도움 주기도


의상 스님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지체할 수 없는 발길을 돌려 신라로 향하는 순간, 뒤늦게 소식을 접한 선묘낭자는 허겁지겁 의상 스님을 뒤쫓았다. 손에는 험한 바닷길에서 몸을 보호할 손수지은 의복과 요깃거리, 스님의 공부를 조금이나마 돕고자 어렵게 구한 서책들이 가득 담긴 옷함이 들려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선묘낭자가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상 스님을 실은 배가 떠난 후였다. 선묘낭자는 허탈한 심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떠나는 뒷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에 올랐다. 스님께 드리려던 옷함에 애타는 심정을 담아 바다로 던지며 간절히 발원했다.


“나는 처음부터 참된 마음으로 법신을 공양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스님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하소서.”


때마침 불어온 질풍이 거짓말처럼 옷함을 배로 이끌었다. 선묘낭자는 다시 한번 발원했다.
“이 몸이 큰 용으로 변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저 배를 무사히 신라까지 인도해 스님의 크신 뜻이 신라 땅에 널리 전교될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기도를 마친 선묘낭자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지극한 정성 덕분일까. 소용돌이치는 검은 바다로 빠져 드는가 했던 선묘낭자의 몸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며 크고 아름다운 용으로 화현했다. 불법에 귀의한 한 여성 불자가 돈독한 불심과 간절한 발원으로 결국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으로 나툰 순간이다. 선묘용은 하늘에서 폭우를 멎게 하고 바람을 조절하며 의상 스님을 실을 배를 이끌고 신라로 향했고, 의상 스님은 무사히 신라에 당도해 신라불교 확산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선묘낭자에 관한 설화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이점이 있다. 우선 여성이 용의 화신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드높은 기개와 신묘함으로 대표되는 용에 여성성을 부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욱이 선묘낭자가 변신한 용은 의상 스님이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하는 수호신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선묘설화가 의상 스님 시대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후대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선묘설화가 불교설화의 집대성인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고 중국문헌인 ‘송고승전’으로 전해진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한 가지는 선묘설화의 확산 방식이 다분히 국제적이라는 것이다. 선묘설화는 ‘송고승전’에 기록되어 한국으로 전해지는가 하면, 13세기 일본 명혜 스님이 저술한 ‘화엄연기’라는 책에 ‘신라의 여신’으로 삽화와 함께 일본에 소개됐다. 특히 일본에서 선묘설화는 돈독한 신심으로 스님을 공양하는 불자의 바람직한 표본으로 널리 신앙됐다. 교토에 선묘신상이 안치된 선묘사와 선묘신사가 지금도 남아있다.


한편 용이 된 선묘낭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선묘용은 신라에서 의상 스님을 수호하며 전교를 도울 뿐 아니라, “세세생생 귀의하겠다”는 맹세를 지키며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으로 이어져 오고있다.


영주 부석사 창건설화와 사찰에 남겨진 선묘낭자의 흔적들이 이를 설명해준다. 특히 부석사 선묘각은 선묘낭자를 기리는 전각으로, 사찰 내 이례적으로 존재하는 여성 전각이다. 부석사 창건설화에 나타난 선묘설화는 다음과 같다.


당에서 돌아온 의상 스님은 통일된 신라에서 불법 전파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신라를 평화로운 불국토로 만들고자 서원한 문무왕의 뜻에 따라 낙산사를 창건한데 이어, 널리 화엄을 홍포할 새 도량을 창건하기 위해 봉황산을 찾았다. 태백의 기개가 소백으로 이어지는 봉황산은 땅이 신령스럽고 경관이 수려해 새로운 도량터로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가 머물고 있어 쉽지 않았다.


이때 선묘용이 등장한다. 선묘용은 커다란 바위를 허공으로 들어올리는 신이한 재주로 세 차례 위협을 가해 무리를 해산시켰다. 선묘용의 도움으로 의상 스님은 이 곳에 부석사를 창건해 화엄본찰로 삼고 교세를 확장하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당시 의상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하던 무렵, 부석사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여 스스로 찾아와 배우는 이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도 어쩌면 날씨를 관장한다는 용의 재주가 아니었을까. 선묘용이 의상 스님을 돕기 위해 허공으로 들어올렸던 바위는 지금도 ‘부석(浮石)’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화엄도량의 창건으로 의상 스님의 전교가 널리 확산됨을 확인한 선묘용은 석룡으로 화하여 무량수전과 석등 사이의 땅 속에 몸을 감추었다고 한다. 실제 2001년 부석사 주위를 탐사한 결과 길이 13m의 석룡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부석사 자료집에 기재된 “40척(약 12m) 석룡이 본존불에서 석등까지 연결돼 있다”는 기록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의상 스님을 향한 연심으로 시작된 선묘낭자의 발심은 용으로, 또 석룡으로 거듭 화하여 천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중국과 한반도를 넘나들며 불교의 수호신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어쩌면 선묘낭자야 말로 자기희생적인 절절한 신심을 기반으로 가족의 행복을 발원하고 또 사찰의 재정적 후원자로서 한국 불교를 수호해 온 우리네 여성 불자들의 화현이 아닐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