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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덕의 아내

욕망의 무상함 깨우쳐 남성 수행자 이끈 조력자

정토왕생 발원하며 청정 지켜
남편과 더불어 칭명염불 수행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왕자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보리수 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아 금강 삼매에 들었다. 이때 그를 방해하기 위해 마왕 파순의 세 딸이 등장한다. 딸들은 각 600명의 여인으로 변신해 왕자를 유혹했으나, 싯다르타는 이에 현혹되지 않고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다. 여기서 마왕의 세 딸은 애욕과 욕망의 상징인 동시에, 남성의 본능을 일깨워 번뇌를 유발하는 수행의 장애를 뜻한다.


한국불교의 고승 수행담 및 불교설화에서도 여성은 남성 구도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요소로 종종 등장한다.
남성 위주의 불교사에서 특히 여성의 존재는 인간의 가장 세속적이고 본질적인 욕망으로 상징될 수 있다. 이에 인간의 욕망, 그리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무상함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되는 셈이다.


‘삼국유사’ 광덕엄장조에 나오는 광덕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의 도반이자 사문 엄장을 욕망에 빠뜨리는 장애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광덕의 처는 단순한 욕망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상대의 번뇌를 깨뜨리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조력자가 됨으로서 종국에는 왕생을 돕는 핵심적 인물이다. 비록 이름 없는 설화 속 조연에 불과하지만,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남성 수행자를 깨우치고 독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설화의 주인공 광덕과 엄장은 문무왕 시절의 사문이다. 친분이 매우 깊었던 이들은 서방정토에 먼저 왕생하는 자는 반드시 서로에게 알리기로 굳게 약속한다. 그러나 수행에 임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광덕은 가정을 꾸려 분황사 인근에서 짚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엄장은 홀로 남악에 암자를 짓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도 두 사람은 각기 정토왕생을 발원하며 사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장은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석양이 유난히 붉게 물들고 숲의 그림자가 짙게 일렁이던 날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이제 서쪽으로 가니 자네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 도반 광덕의 목소리였다.


기이한 현상에 넋을 놓은 엄장의 뇌리에 불현듯 서로 서방정토를 알리기로 약속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문을 밀치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희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에서는 천상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눈부신 광명은 땅에 맞닿아 있었다.


“광덕이 먼저 왕생함을 알리는 징조임에 분명하군.” 다음날 엄장이 광덕의 집을 찾으니 과연 도반은 이미 죽은 후였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힘을 모아 시신을 거두고 무덤을 만들었다. 장례를 마치고 도반의 아내와 마주앉아 소회를 나누던 중, 엄장의 마음 속에는 묘한 감정이 생겼다. 오랜 시간 산속에서 고독한 삶을 살며 켜켜이 쌓인 외로움을 이 여인과 더불어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한편으로는 속세를 떠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한 자신보다 가정을 꾸린 광덕이 먼저 왕생한데 대한 은근한 시샘도 있었다.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부터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엄장이 권유하니 광덕의 아내가 승낙해 함께 머무르게 됐다. 그리고 그날 밤. 엄장은 당연한 듯 그녀에게 다가가 정을 나누고자 했다. 그런데 여인은 엄장을 냉정하게 뿌리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엄장에게 단호히 거절의 뜻을 밝히며 일갈했다.


“스님이 정토를 구함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서운 질책이었다. 물고기를 물에서 구하려 하지 않고 나무에서 찾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광덕의 처는 이 같은 비유를 통해 수행자로서 여인에게 욕정을 품고 정을 통하려 한 엄장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힐난하고 있는 셈이다.


“광덕은 이미 그랬을 터인데 나는 어찌 꺼리는가?” 의외의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란 엄장이 되물었다.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광덕과 10여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아닌가. 당연히 정을 통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광덕은 죽어 서방정토에 왕생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광덕의 빈자리를 대신하기로 한 엄장에게는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까. 엄장은 혼란스러웠다.


광덕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남편과 나는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단 하룻밤도 같은 침상에서 자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부정하게 서로 닿아 더럽히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한 소리로 염불하였습니다. 또 남편은 염불과 함께 16관(觀)법을 수행하여 왔기에, 때로 밝은 달이 문으로 들어오면 삼매에 들어 그 빛에 올라 가부좌를 하였습니다. 이 같이 정성을 다했으니 응당 서방정토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놀라울 따름이다. 광덕과 광덕의 아내는 기나긴 세월 오로지 수행정진하며 일념으로 왕생을 믿고 발원하며 서로 의지해 온 수행도반이었던 것이다. 광덕은 아내를 도반 삼아 10여년의 세월 동안 청정한 몸과 마음을 지키며 흔들림 없이 정진해 왔기에 마침내 서방정토로 갈 수 있었다.

 


엄장에게 욕망의 덧없음 알려
불보살의 화현이라 일컫기도

 

특히 아내에 따르면 광덕은 평소 칭명(稱名)염불과 16관법(觀法)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수행했다. 쉼 없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늘 부처님을 관하며 마음에 깊이 새기는 가운데 광덕의 수행은 날로 깊어졌고, 어느 순간에는 달빛을 좌복 삼아 수행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아미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서방정토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덕과 함께 정진해 온 그의 아내 역시 단순히 남편을 잃고 실의에 잠긴 한낱 과부가 아니었다. 남편이자 도반인 광덕과 함께한 세월 동안 이어진 치열한 수행으로 이미 무수한 공덕을 쌓았으며 삼매의 환희심도 이미 경험한 수행의 고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때문에 세속적 욕망의 허망함을 누구보다 확연히 알았기에, 순간적인 욕망에 흔들린 엄장의 나약한 근성을 매섭게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엄장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광덕의 처는 몸가짐을 더욱 단정히 한 채 준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릇 천리를 가는 자는 한 걸음으로 살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스님의 수행은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엄장은 얼굴이 붉어진 채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내심 ‘파계한 광덕보다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고 있으니 수행자로서 더 뛰어나다’고 생각해 왔으나, 이 모든 것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한순간 욕망에 끄달려 그동안의 수행이 공염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참기 힘든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광덕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엄장은 깊이 잘못을 뉘우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원효대사를 찾아가 간곡한 심정으로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원효대사는 그를 위해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지도했고, 엄장은 일념으로 정진해 그 또한 서방정토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설화에서 광덕의 아내는 두 남성 수행자를 정토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엄장에게 있어 그녀는 어리석은 욕망을 단칼에 베어내고 강력한 수행동기를 부여해 준 스승이나 다름없다. 또한 ‘금강경’을 짊어지고 길을 가던 덕산 스님에게 ‘금강경’의 구절을 들어 “과거와 현재,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려 하느냐”라는 서릿발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깨달음으로 이끈 중국 떡할머니 일화와도 상통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이 설화의 끝에 “광덕의 처는 분황사의 계집종”이라 소개한다. 당시 원효대사가 분황사에 주석했다는 점을 살펴볼 때, 어쩌면 광덕의 처는 원효를 통해 광덕보다 먼저 불교에 심취하여 남편의 수행을 지도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덧붙여 “광덕의 처가 관음의 19응신 가운데 하나였다”는 글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화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이 주는 불편함이 결국 그녀를 관음의 화신으로 승격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두각을 드러낸 여성을 보살화 함으로써 일반 여성과 차별을 두어 남성의 우월의식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녀가 비록 비천한 세속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방정토를 향한 확고한 신앙과 믿음만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점이다. 또 남성 수행자의 수행을 이끌 만큼 수행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때문에 의도야 어찌됐건 민생들에게 그녀는 중생 구제를 위해 화현한 불보살과 같이 인식되기에 무리가 없었으리라.


“달아 이제 서방 거쳐 가시리 잇고/ 무량수불 앞에 여쭙는 말씀 알리어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리는 이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을 남겨두고 48대원 이루실까.”


한편 광덕엄장 설화에 삽입된 ‘원왕생가(願往生歌)’에는 원왕생을 애타게 발원하는 작자의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저자는 광덕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지만, 광덕의 처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작자는 달을 매개로 부처님께 원왕생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하는 한편, 이토록 간절한 나를 구제하지 않고 남겨둔다면 어찌 48대원을 이룬다할 수 있을까 묻는다. 기필코 왕생으로 이끌어 달라는 다짐인 셈이다. 이는 비단 광덕과 광덕의 아내, 엄장 뿐 아니라 당시의 가난하고 억압받았던 모든 민중들의 염원일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불교에 귀의해 부처를 닮고자 정진하는 불자들의 간절함과도 다르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광덕엄장 설화와 흡사한 구조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흥미롭다. 바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다. ‘탑상(塔像)’, ‘남백월이성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조에서 이를 전한다. 때는 경덕왕 8년, 백월산에서 수행에 매진하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앞에 미모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난초향기와 사향을 풍기며 하루 묵어가길 청했다. 달달박박은 청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 반면, 노힐부득은 자비심을 내어 그녀를 받아들인다.


노힐부득은 여인을 옆에 두고도 마음을 맑게 한 채 염송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여인이 갑자기 해산을 할 것 같다며 거듭 도움을 청했다. 노힐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일었으나 안쓰러움이 더 컸기에 기꺼이 응했고, 이어 목욕까지 도왔다. 그런데 여인이 목욕한 물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기더니 일순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놀란 노힐부득에게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 물에 목욕할 것을 권했다. 물에 들어간 노힐부득은 그대로 미륵존상으로 화했다고 한다. 도반의 파계를 예상하며 찾아온 달달박박도 남은 물에 목욕을 하고 이어 성불했다. 미모의 여인은 바로 관음의 화신이었다고 일연 스님은 부연한다.


여인을 받아들였지만 욕망에 흔들리지 않았던 노힐부득과 광덕, 또 욕망에 흔들리게 될 것을 우려해 여인을 거부했고 실제 욕망에 흔들린 달달박박과 엄장은 결국 한사람도 빠짐없이 여성의 도움을 받아 성불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남성 수행자들의 부족함이나 과보를 따져 차별을 두기보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들 모두를 이끌어준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행위는 어쩌면 “모든 중생을 괴로움에 구제하고 정토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대원을 세웠던 보살의 길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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