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통합종단 출범 배경과 한계
① 통합종단 출범 배경과 한계
  • 권오영 기자
  • 승인 2012.04.0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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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대처간 갈등으로 촉발 공권력 빌린 ‘미완의 통합’

한국불교 전통성 계승
불교 현대화 토대마련
대처측 태고종 창종에
끝내 분종으로 이어져

 

 

▲비록 군사정권의 강압적 중재로 구성되긴 했지만 비구·대처승들은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통합종단 출범의 초석을 다졌다. 비구·대처측 대표들이 불교재건위원회 첫 회의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출처=한국불교 100년

 

 

1962년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며 출범한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4월11일 50주년을 맞는다. 비구·대처승 간의 긴 갈등과 대립을 봉합하고 출범한 통합종단은 이후 반세기 동안 도제양성과 포교, 역경 등의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면서 한국불교의 현대화를 견인해왔다. 그러나 통합종단은 출범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고, 이후 대처승들의 반발로 분종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또 통합종단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통합종단 출범 50주년을 맞아 성과와 향후 과제를 점검한다. 편집자


통합종단 출범은 일제 식민지과정에서 나타난 왜색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비구 측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처승간의 깊은 갈등에서 촉발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의 대처식육을 모방, 처자식을 거느린 대처승들이 승단의 주류를 형성했다. 당시 승려들의 세속화는 승단의 혼란과 비구승들의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왔다. 급기야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비구승들의 자정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특히 1947년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진행된 고불총림의 자정 쇄신안은 불교정화운동의 기본 골격이 됐다. 즉 대처승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구승을 정법중, 대처승을 호법중으로 나눠 포교와 교육 등 수행승들을 지원하는 일에 종사토록 했다. 또 대처승은 상좌를 두지 못하도록 해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정을 해 나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교계의 평화적 자정 노력은 1954년 “대처승들은 절에서 축출돼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느닷없는 유시발표로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만암 스님의 점진적 자정 운동에 반발한 일부 비구승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공권력의 힘을 빌린 정화운동을 진행하면서 곳곳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미명 아래 일부 비구승들은 대처승들을 몰아내기 위해 폭력배까지 동원, 유혈사태가 발생하는가하면 수많은 송사가 진행되면서 막대한 삼보정재가 유실됐다. 이런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의 골은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군부정권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양측이 진행하고 있는 모든 송사를 중지하도록 지시하고,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해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특히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1월12일 “불교계가 분쟁을 자율적으로 해결할 기회를 부여하겠지만 만약 이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경고성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좀처럼 해결점을 찾지 못하던 양측의 대립은 급격히 봉합국면에 접어들었다. 2월22일 양측은 각각 15명씩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구성, 새 종헌과 종명·종지 등 제반사항을 합의하고 통합종단 출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곤 4월11일 양측은 종명을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하고 신라 도의국사를 개창조로, 고려 보조국사를 중천조로,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명시한 종헌을 발표하고 역사적인 통합종단을 출범시켰다. 또 종정에는 비구 측의 효봉 스님을 총무원장에는 대처 측의 석진 스님을 선출하고 양측이 동일하게 간부를 맡아 합리적인 종단 운영을 선언했다. 이로써 8년간 지난하게 진행돼 온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은 봉합되고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계승한 종단이 비로소 출범하게 됐다.


그러나 통합종단 출범에 따라 불교재건비상종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종회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비구 측의 종회의원 수가 전체 50석 가운데 32석을 차지하면서 양측은 불과 출범 4개월 만에 또다시 파국을 맞았다. 대처 측은 즉각 통합종단 이전으로 환원할 것을 선언하고 서대문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을 설립했으며, 이후 긴 법정 다툼을 이어갔다. 한때 화동위원회를 구성, 화해를 위한 노력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양측의 대립은 끝내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1970년 대처승들이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 조계종에서 분종하면서 16년간 진행해 온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은 막을 내렸다.


이처럼 수많은 역경과 상처 속에 출범한 통합종단은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선 일제시대 단절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복원하고 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토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특히 통합종단이 내건 도제양성과 포교, 역경 등 3대 지표는 수행승 중심의 승단재건과 일제 식민지 불교를 극복하기 위한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불교계 내부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공권력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통합종단은 출범 당시부터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반강제적 중재로 진행된 비구·대처승간의 어색한 화해는 통합종단 출범 4개월 만에 파국을 맞았고, 이후 오랜 법정 다툼 끝에 대처측이 1970년 태고종을 설립, 끝내 분종을 선택함으로써 ‘미완의 통합’이라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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