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 지온인(知恩院)

민중불교 이끈 염불신앙 본향

 

▲지온인의 중심 건물인 어영당. 30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예불을 볼 수 있는 이곳은 일본 최대 규모의 법당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 제일의 선찰이라는 난젠지(南禪寺)를 벗어났을 때 시간은 벌써 오후 1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색적인 사찰 풍경에 젖어 미처 몰랐지만 사찰을 나오자 허기가 밀려든다. 일행들의 발걸음도 꽤나 무거워 보였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 우동가게가 있었다.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으나 안에는 앉을 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때 상다보살님이 아침에 싸온 주먹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일행들도 호응했고 곧바로 우리는 인근의 한산한 주택가 도로변에 걸터앉았다. 김 부스러기와 잘게 썬 김치를 넣고 뭉친 주먹밥을 꺼내 천천히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한 보살님이 “주먹밥을 먹고 있으니 우리가 정말 순례자인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지온인(知恩院)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교통편은 그리 수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이왕 주먹밥으로 ‘마음에 점을 찍은’[點心] 마당에 순례자처럼 걷기로 했다. 도시는 깨끗했고 거리는 한산했다.

개인적으로 지온인은 꼭 가보고 싶은 사찰이었다. 염불의 성자 겐쿠 호넨(源空法然, 1133~1212) 스님이 입적한 성지였기 때문이다. 전쟁과 광기의 시대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가장 수행자답게 살았던 호넨 스님. 그로 인해 일본불교는 염불의 전성시대를 맞이했으며, 불교가 민중의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다. 특히 호넨 스님의 지극한 신심과 계행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수행자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호넨 스님이 1175년 개산

 

▲지온인의 삼문(三門). 도쿠가와 제2대 쇼군에 의해 건립된 삼문은 일본의 국보로 높이 24m, 폭이 50m에 이른다.

 


한때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 중 유독 한국의 기독교인 비율이 그토록 높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대승불교권 국가인 티베트, 베트남, 몽골, 대만은 기독교 인구가 5%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불교 인구가 1073만명으로 다른 종교인보다 많기는 하지만 개신교 862만명과 가톨릭 296만명을 합치면 기독교 인구가 오히려 많다. 여기에 가톨릭 신자가 급증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그 격차가 커질 게 분명하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걸까. 민족적인 자존심이나 정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해방 이후 미군정의 전폭적인 기독교 지원 탓일까. 하지만 다른 많은 아시아 국가들도 서구제국주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기독교가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던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때 한국불교의 염불 외면 현상이 그 원인의 하나는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염불은 말 그대로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해주실 것을 철썩 같이 믿고 부처님의 명호를 간절히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 일색의 한국불교는 오랜 세월 이중적인 모습을 띠었다. 은근히 기복을 부추기면서도 겉으론 선만이 상근기이고, 염불은 하근기 중생을 위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개화기 이후 기독교가 들어오자 많은 불교인들이 불교는 자력의 종교이지 기독교처럼 타력의 종교가 아니라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절대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기독교와 스스로 깨우칠 것을 강조하는 불교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러면 수많은 경전에 언급된 믿음의 중요성은 뭐란 말인가. 그렇게 믿음을 부정하다보니 불보살님에 대한 신심까지 절로 퇴색된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신과 인간은 시종일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불교에서 불보살과 중생은 그런 관계라 할 수 없다. 불보살은 중생이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믿음이 경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지심귀명(至心歸命)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선 신심 대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인다는 게 마치 호쾌한 수행자라도 되는 듯 여기는 풍토가 확산됐다. 갈수록 염불하는 스님들은 줄었고, 믿음은 다른 종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신심을 채우기에 앞서 부처부터 죽이려 덤벼드는 분위기 속에서 지극한 신심이 뿌리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불교는 철저히 자력의 종교라는데 부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게 어찌 당당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 헛헛한 민중들의 속성을 간과한 선종 지상주의가 어쩌면 불교를 민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불교의 신심이 퇴색해 가는 자리에서 서구 종교가 더 쉽게 성장했던 것은 아닐까.

부처님에 대한 오롯한 신심. 그것이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면 어떤 중생이라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 분이 바로 호넨 스님이었다. 지온인은 호넨 스님의 정신을 잇는 정토종의 총본산인 것이다.

 

▲정토종 개산조인 호넨 스님. 그의 지극한 신심과 계행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수행자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지온인이 가까워질수록 이곳이 호넨 스님과 인연이 깊은 절임을 새삼 느껴졌다. 거리에는 호넨 스님 입적 800주년을 알리는 포스터가 종종 눈에 띄곤 했다. 우리는 난젠지에서 출발한지 30~40분쯤 지나서야 지온인 경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출입문이 작은 것으로 보아 정문이 아닌 여러 작은 문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지온인 경내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있었고, 유치원과 중고등학교도 보였다. 정토종 교토교구교무소 외벽에는 ‘정토종 21세기 벽두 선언’이란 제목으로 ‘어리석은 자의 자각(自覺)을, 가정에는 불광(佛光)을, 사회에는 자비를, 세계에는 공생을’이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당대 최고 학승이자 지혜제일로 불렸던 호넨 스님. 늘 스님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호넨”이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자신의 업장이 수미산 같고,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 참다운 깨달음의 빛과 구원은 바로 그 절망과 하심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될 지도 모른다.

삼문 등 국보급문화재 다수

경내 도로를 따라 한참 오르자 멀리 계단 위로 총본산 지온인이라고 쓰인 산문(山門)이 보였다. 그곳을 옆에 끼고 계속 가자 조금 전 산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삼문(三門)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넨 스님이 입적한 뒤 400여년 뒤에 지어진 목조건축물이라는데 높이가 24m, 폭이 50m나 된다. 일본의 국보이자 세계 최대 규모라는 이 삼문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3가지 해탈 경지를 일컫는다고 한다. 지온인은 1175년 호넨 스님이 지은 작은 승방을 사원의 기원으로 삼고 있지만 이곳 삼문은 그같은 조사의 소박함이 무색하리만큼 거대했다.

1621년 도쿠가와 제2대 쇼군에 의해 건립된 삼문은 일본 최고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력이 투입됐다. 누각 형식의 삼문 안은 1년에 며칠 공개한다지만 우리가 찾았을 때는 아쉽게도 닫혀있었다. 여기에는 불상과 나한상을 비롯한 온갖 화려한 성보들이 봉안돼 있으며, 이곳 삼문을 지은 당대 최고의 장인이라는 고미 킨우에몬(五味金右衙門) 부부의 목각도 있다고 한다.

고미 킨우에몬은 삼문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최선을 다해 지었으나 좋은 나무를 구입하느라 예산이 초과되자 삼문을 완성한 후 부인과 자결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염주를 돌리고 있는 고미 킨우에몬과 합장하고 있는 늙은 아내의 목각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지만 권력자의 배려보다 열의를 다해 불사(佛事)를 마치고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약자들의 서글픔이 읽혀진다.

 

▲1636년 주조된 동종. 종두까지 포함하면 높이가 무려 3m33cm로 일본에서 가장 크다. 소학관이 펴낸 ‘지온인’에 소개된 사진.

 


후대에는 막부정권과 결탁

우리는 삼문을 지나 수백의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올랐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운동장 몇 개는 됨직한 너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에는 호넨 스님의 목상(木像)을 안치한 어영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가마쿠라 신불교시대를 열었던 호넨 스님의 사상을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는 일본 정토행자들의 성소라고 할 수 있다.

호넨 스님은 유력한 무사집안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9살 때 치안유지를 담당했던 아버지가 야습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됐고, 이때 그는 아들에게 ‘복수하지 말고 출가해 명복을 빌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히에이산으로 출가한 그는 증오와 원망을 딛고 천태와 밀교의 오묘한 세계로 젖어들었다. 그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수행과 학문에 몰두했고 30대에 이미 ‘지혜제일’ ‘대세지보살의 화신’ 등으로 불렸다. 출가 후 평탄했던 삶에 반전이 있었던 것은 스님의 나이 43살 되던 해였다. 중국 선도(善導, 613~681)의 ‘관무량수경소’를 읽던 스님은 “일심으로 오롯이 미타의 명호를 염불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불법의 요체가 ‘나무아미타불’에 있음을 확신했다.

이때부터 호넨 스님은 화려한 가사장삼을 벗어던지고 검은 승복을 입은 채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간곡히 설했다. 정치적인 혼돈, 끊임없는 전란,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야 했던 민초들에게 호넨 스님의 말은 감로수 그 자체였다. 민중들은 그의 말을 떠받들어 실천했고, 염불소리는 일본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중들뿐만 아니라 귀족과 지식인층들도 호넨 스님에게 속속 귀의했다. 그럴수록 다른 종파의 질투와 감시도 견고해졌고, 결국 만년에는 제자의 그릇된 행실을 빌미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신하는 일행들.

 

호넨 스님은 일본 불교의 흐름을 바꾸었다. 정토진종의 신란 스님이나 시종의 잇펜 스님도 그의 제자였다. 하지만 정치권력은 호넨 스님을 향한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철저히 권력과 거리를 두었음에도 훗날 무신정권과 수선사가 결탁했듯 호넨 스님에 의해 시작된 정토종은 막부와 오랜 세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이곳 지온인은 정토종의 총본산이자 막부의 군사기지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오기도 했다.

30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법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어영당. 저렇게 큰 법당을 지을 수 있는 일본의 목재와 기술력에 놀라면서도 관승(官僧)의 길을 버리고 소박한 수행자의 삶을 추구했던 호넨 스님의 이상과 일치될까 싶은 의문도 든다. 어쩌면 지온인은 정토를 꿈꾸는 지상의 염원이 담긴 곳이자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권력자들의 욕망의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곳은 아닐까.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