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쟁·소유·발전 대신 행복이 자라는 땅

  • 집중취재
  • 입력 2012.04.12 13:04
  • 수정 2012.04.12 13:19
  • 댓글 0

 

▲티베트인들은 발전이 없는 대지와 초원 속에서도 불행하지 않다.

 

 

‘티베트에는 우울증이 없다.’ ‘그래서 자살도 거의 없다.’ 라고 한다면 믿을까. 이 말은 티베트는 우리가 사는 (육지세상)물질문명의 세상보다는 덜 불행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설역(雪域)의 티베트 고원보다도 최소한 지형적으로나 물질적인 면에서 매우 풍요롭고 편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나날이 우울증과 자살이 늘어 가고 있는 소식을 자주 접하곤 한다. 주위의 사람들(식구들을 포함해서)을 보노라면 십중팔구는 대부분이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이유는 암, 치매, 우울증, 당뇨, 고혈압, 정신질환(공황장애)등의 병치레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문명이 최첨단을 달리는 이 살기 좋은 세상에 왜 그리 병 걸린 사람들이 많을까.


필자는 티베트에서 우울하게 일상을 보내는 사람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경우를 거의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물론 현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 혹은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곳에는 우리가 겪고 있는 각종 우울한 질병으로 삶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고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기에 우울한 사람이 없을까. 가만히 헤아려보면 알 것도 같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 때문이다. 첫째, 티베트에서는 ‘행복’을 쟁취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다. 두 번째, 티베트 사람들은 직선이 아닌 곡선의 삶을 추구한다. 세 번째, 티베트에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와 같은 상대적 ‘비교’가 없다. 네 번째, 티베트에는 자연과 인간의 공생의 문화가 있다. 다섯 번째, 티베트에서는 슬로우 라이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여섯 번째, 티베트인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티베트에는 경건한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씩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티베트에는 왜 우울증이 없는지, 불행한 사람이 왜 적은지, 우리와는 무엇이 다른지를 가늠 할 수 있다.


여기 엄마와 두 딸이 있다. 엄마는 시집 간 딸들에게 항상 불만이다. 엄마는 매일 아침 옆집 아줌마 만수엄마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하루일과의 시작이다. 그 만수엄마에게도 딸이 둘 있는데 매달 말일에 20만원씩 꼬박 꼬박 통장에 넣어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등학교만 나온 딸들이) 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은근히 질투도 났지만 내심 화가 치밀었다. 어렵게 두 딸을 대학까지 수발했는데 한 달에 10만원도 넣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들이 올적마다 은근히 불평하고 내심을 비췄다. “늙으면 돈이 최고인데 옆집 만수 엄마는 잘난 딸들을 만나서 여행도 가고 맛난 것도 먹는데 나는 이게 뭐람! 아 불행한 나의 삶이여!” “나는 자식 복이 없나봐” 이 소리를 들은 두 딸은 집에 찾아오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심지어 엄마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불행이 없으니 행복도 없다


티베트에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없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간소하지만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의 개념이 없으니 당연히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부여받은 하루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할 뿐이다. 티베트인들은 아주 오래 동안 근본적으로 밖의 세상(우리가 사는 물질문명의 세계)을 모르고 살아왔다. 따라서 경쟁과 소유의 구조로 살아가고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를 은근히 뽐내고 살아가는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이다. 행복은 덧셈의 경제를 추구하는 우리 세계에서나 갈구하는 목적이자 대상이다. 티베트인들은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해 깨끗이 단념하는 깔끔함이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소유한다거나 빌딩을 가진다는 것이다. 초원에서 이런 것들은 야크보다도 못한 불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떠한가? 소유하고 있음에도 더 큰 차를 원하며 더 화려한 집을 원한다. 단념할 줄 모른다. 이는 지칠 줄 모르는 갈망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 때문이며 근원적으로는 정신적 허기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티베트 사람들은 곡선의 삶을 추구한다. 서울의 K대학 R교수가 있다. 그 교수는 자신이 평생 동안 마음먹은 일은 다 되는 줄 알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류대 나오고 돈 잘 벌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스스로가 그러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업시간에도 학생들에게 ‘돈’없는 사람하고는 사귀지도, 결혼하지도 말라며 돈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그런 영리한 교수였다. (물론 본인은 그게 아니라고 펄쩍 뛰겠지만 말이다.) 그 교수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유학시절 잘 먹이지 못한 것이 맺혔는지 교수로 임용이 된 후 그 아들에게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었다. 그러면서 “너도 아버지처럼 치열하게 경쟁하고 쟁취하고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입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결국 성인이 되어서도 집에서 당당히 노는 백수가 되었다. 학교도 가기 싫고 무얼 배우기도 싫고 그냥 집에서 먹고 노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 교수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지만 이미 커버린 아들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머리는 하얀 백발이 돼버렸고 그저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 뿐 이었다.


경쟁, 상대적 평가, 속도, 성과주의가 팽배한 우리들의 삶속에서 ‘직선’의 키워드는 매우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옆도 뒤도 필요 없고 곧장 직선으로만 달리는 우리의 삶이 성공할 것 같고 효율적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확인하게 된다. 티베트는 주어진 환경이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직선보다는 곡선의 삶과 가치관을 추구한다. 그들의 삶은 느리지만 돌아갈 줄 알고 누구에게 경쟁과 돈과 행복을 연결 지어 주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삶에는 ‘무조건 느리게’가 아닌 그들만의 인생을 사는 나름의 속도와 템포가 있다. 우리처럼 세상이 정해놓은 트랙 속에서 죽을 것 같이 달리는 것이 아닌 자신들만의 길을 유유히 걷는 것이다. ‘미래가 행복할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하기가’ 바로 곡선적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 티베트인들이 바로 그러하다. 곡선의 프레임 즉, 속도보다는 여유, 획일화 보다는 다양성, 목표보다는 여정, 경쟁보다는 화합, 정면 돌파보다는 유연성을 강조하는 삶이다. 주어진 삶에서 빠른 속도로 도보하고 달리는 사람들은 길거리의 꽃 냄새를 온전히 맡지 않는다. 왜냐하면 ‘길거리의 이 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싶기 때문이다. 경쟁과 성공과 꽃은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의 삶은 답답할 정도로 슬로우 라이프이다. 빠른 이동을 책임져주는 차와 기차보다는 여전히 말과 야크가 애용되고 그것도 모자라 걷는다. 걷는 것도 모자라 오체투지를 한다. 티베트인들은 배불리 먹지 않으면서도 행복해한다. 우리처럼 질펀하게 육식을 탐하고 배가 그득할 때까지 먹고 마시면서 그리고 결국은 또 다이어트 해야 한다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식탐은 정신과 육체의 피폐를 가져올 뿐이다.


인생 속도 조절하는 곡선의 삶


사람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숙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묻혀서 꽃 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사계절의 순환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여기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동반된다.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좋아한다. 따뜻한 봄날에 꾸벅 꾸벅 조는 고양이를 안고서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기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선택 할 줄 알아야 한다. 티베트인들의 삶이 그러하다. 우리의 삶은 곡선인가? 직선인가?


세 번째, 티베트에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와 같은 상대적 ‘경쟁’과 ‘비교’가 없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식과 전쟁, 섹스에 대한 욕구가 전폭적이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흥분의 도가니인 올림픽이나 월드컵축구 같은 경쟁의 프로그램이 없다. 그래서 그곳에는 산만하거나 들뜬 마음이 없다. 어딜 가나 고요하고 집중된 상태이다. 행복한 삶이란 화려하고 들뜬 삶이 아닐 것이다. 불안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궤적과 레일에서 성공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축하파티를 열고 술에 취해 자기만족에 빠진다고 행복은 오지 않는다. 혹은 성취하지 못했다고 술과 섹스와 도박과 같은 감각적인 것으로 소일한다고 해서 행복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한 인생이란 단순하게 조용히 사는 것이다. 사실 프로의 삶은 화려하지 않다. 프로의 삶은 느린 듯 보이지만 리듬을 타고 있으며 집중적이며 조용하다. 그것은 권태로운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티베트에는 오래 동안 성장과 발전이 없었다. 의학, 과학, 기술, 교육 등 모든 면에서 변화의 폭이 크지 않았다. 성장하고 고도로 발전할수록 행복할거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님을 티베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대지와 자연을 고집하는, 발전이 없는, 그런 티베트에서 우울증은 자라나지 않는다.


다음 편에서는 나머지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하자.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