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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티베트에는 우울증이 없다-下

  • 집중취재
  • 입력 2012.04.19 10:35
  • 수정 2012.04.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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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지배 도구 버리고 초원과 하나 된 삶

 

▲티베트에는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가는 생물이고 공생의 동물들이다.

 

 

네 번째, 티베트에는 순환 공생형의 경제(삶)를 추구한다. 유목민의 생활이 그러하다. 티베트는 라싸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유목 혹은 농업의 생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지가 집이요 초원이 학교다. 오래 동안 성장과 발전이 없는 대초원, 그러나 그곳에는 수학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공생의 경제가 펼쳐진다. 유목민과 야크와의 관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초원에서 유목민의 제일 사랑스러운 재산은 ‘야크’다. 야크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물질적 재산의 개념보다는 삶의 동반자이자 초원의 친구이다. 이곳에서 야크의 유효성은 대단하다. 야크의 꼬리는 인도 왕실의 부채로 사용되고 젖은 중요한 식량이고 털은 텐트의 재료로도 쓰인다. 야크의 가죽은 신발창으로 활용되고 배설물은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는 따뜻한 연료가 되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야크는 유목민들 이동의 주요 수단이 된다.


초원에서 야크는 섹시하고 잘빠진 오토바이보다 더 사랑을 받는다. 야크는 일 년에 한 번 짝짓기를 하며 사람과 똑같이 280만에 출산한다. 그래서 초원의 유목민들은 야크를 매우 귀중히 여기고 사랑해서 야크마다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다. 초원에서는 인간도 야크도 서로가 기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야크에게 야크는 인간에게 서로가 필요한 생명체이다. 그러나 티베트의 유목인은 겸손하게 말한다. “이곳에는 사람이 야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야크가 우리를 키운다.” 이들에게 소유의 개념은 없다. 야크와 유목민은 서로 떨어져서 살 수가 없는 관계이다. 아니 야크보다는 오히려 유목민에게 야크는 더 절실하다. 이 둘은 서로 의지하며 친구하며 공생하며 살아간다. 이곳에는 야크와 인간의 이분법이 없다. 이기고 지는 승부의 세계가 없다. 자연과 대지는 때가되면 순환하고 인간과 동물은 평화롭게 공생하며 살아가는 이곳, 바로 티베트이다. 풍요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가 아니고 자신의 처한 조건(환경)에 얼마를 누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의 시간에 맞춘 삶의 속도


다섯 번째, 청장철도(靑藏鐵道)가 개통되어 이동의 편리와 속도감을 갖추었다고 이것을 티베트의 진정한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티베트에서는 여전히 걷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시계를 보며 바쁘게 약속을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때가 되면 간출하게 밥을 먹고 공양을 하며 기도를 할 뿐이다. 녹색의 대지 속에서 맨발로 초지와 습지를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 보았는가? 발바닥의 간질간질한 느낌과 지면의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나의 몸을 타고 오르는 감각을 맛 본 적이 있는가? 걷는다는 것은 또 다른 기도와 명상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 주어 능동적 명상을 할 수 있다. 이는 시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곳에서는 시계가 별로 필요치 않다. 정확한 과학의 개념보다는 바람과 태양과 저녁노을로 먹고 기도하고 자야할 때를 맞추기 때문이다.


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여러 주일, 여러 달 동안 제집을 떠나 자기를 버림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자발적으로 부과한 시련을 통해 속죄하고 어떤 장소의 위력에 접근함으로써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시간만큼은 걷는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지면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나의 오온(五蘊)을 대지와 생명체에 접속 하는 순간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고 경쟁과 속도의 궤도에서 벗어 날 수 있다. 티베트는 온 천지가 걸으면서 명상과 기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과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직립보행의 기능을 여전히 유지 할 수 있다. 성장과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티베트인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독화살을 맞았으면 화살만 뽑는 사람들이다.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는지 눈을 부라리지도 않고, 누가 쏘았는지 계산하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냥 내 가슴에 박혀있는 가시를 뽑으면 그만이다. 타인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는 대신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을 하루에 한 가지씩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더 중요시하게 여긴다. 걱정과 불안 다음으로 사람을 불행으로 이끄는 가장 큰 무기는 ‘질투’라고 한다. 질투는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격정이다. 어른들은 아이들만이 질투하고 시샘한다고 돌려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질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좀 더 개방적일 뿐이다. 어른들의 질투는 교묘히 숨겨져 있을 뿐 더 격정적이며 더 치밀하다. 질투하고 서러운 것은 기대라는 집착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이러한 불행한 씨앗이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경쟁의 사회에서 기대하지 않은 삶이란 도태되고 발전이 없는 모델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는 만큼 행복은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티베트에는 경건한 종교가 있다. 죽음에 대한 편안한 준비를 항상 하고 있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일까. 공포심이다. 외부세계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종교는 힘을 발휘한다. 특히나 인간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면서 종교에 대한 신뢰감과 절박함이 굳건해지는 예민한 동물이다. 티베트인들은 평소에 죽음을 맞이하는 연습을 하면서 살아간다. 주문을 외우고 오체투지를 하며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공부를 한다. 현생에 대한 내려놓기 연습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는 죽음에 대한 신뢰와 공부가 깊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생에 대한 내려놓기 연습의 반복


필자는 종종 티베트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들만큼 죽음이 편안하지 않다. 여전히 두렵고 무섭고 준비하기 싫다. 튼실하고 깊은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에 있어 빈부의 격차가 효용이 있을까? 21세기를 뒤흔든 스티브 잡스도 결국 죽지 않았던가. 그의 재산과 명성이 그의 죽음을 연장시켜주거나 불멸(不滅)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인간은 결국 빈부를 떠나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 지구상의 일개 생명체에 불과하다. 매일 파도처럼 일렁이는 죽음을 인식하고 순간순간 언제든 죽음이 찾아오면 “네!” 하고 기꺼이 따라 나설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하지 못한 이유는 모두들 스티브 잡스처럼 부와 명예를 갖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정해야 한다. 잡스도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오히려 몸을 망쳐 일찍 죽었다. 죽음에 대한 겸손한 인식과 예행연습은 우리와 티베트인들과 가장 다른 차이점이다.


인간은 녹색의 초원, 흐르는 강, 광활한 대지 앞에서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즐거워한다. 그래서 여름휴가나 나만의 여행을 떠날 때면 은근히 이런 곳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곳은 인간을 되새김질 할 공간과 시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휴가나 나만의 여행을 떠날 때 시끄럽고 번잡한 놀이공원이나 PC방 가는 사람을 보았는가?


티베트에는 대초원과 대지가 있어 감각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있다. 따라서 삶이 싱싱할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가축도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최소한의 생존조건(공기, 물, 바람)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시계와 열차도 필요 없는 동네이다. 티베트는 방대한 소음과 오염물질이 없다. 이는 곧 인간의 자율성을 마비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적 장치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혁신적인 ‘도구’와 ‘설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 병원, 발전소, 백화점 등이 될 것이다. 이 도구들은 인간을 편리하고 생활의 질을 높여준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도구들은 결국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있는 주인이다. 티베트는 이러한 도구가 매우 부족하다. 그런데도 이들의 삶은 불행하지 않다.


이미 질펀해버린 물질문명의 세계에서 티베트인들과 모두 동일시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던지고 티베트로 날아간다고 행복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나 마음을 건드려야 한다. 불행을 줄이고 우울한 정서를 날려 버리려면 이런 질척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지진이나 홍수가 와도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움직인다(動). 움직이면 소리가 난다(聲). 소리가 나는 생명체는 살아있다. 살아있으니 소리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불행을 줄이는 기본적 조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할 줄 아는 자세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해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불행하지 않다. 우리가 점점 우울해지고 불행한 이유는 외부의 객관적 환경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따뜻하고도 감수성 있는 마음과 오감이 나날이 마비(痲痺)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촉박하고 깐깐한 아침 출근 거리에서도 꽃을 보고 “아, 꽃이로구나!” 하며 한 순간이라도 지켜보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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