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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선덕여왕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 중흥책으로 통일 기반 다진 한반도 첫 여왕

성스러운 혈통 명분으로 즉위
지혜·불심으로 왕권 강화해

 

 

 

 

한반도 최초의 여성통치자, 신라 선덕여왕(632~647). 역대 왕들 가운데 선덕여왕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왕이 또 있을까. 첫 여왕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역사 속 그녀의 존재감은 분명하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엔 왕이 되어 선정을 펼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뭉클하다.


역사서에 따르면 그녀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왕이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에 대한 설화 세 개를 별도 서술해 그녀의 지혜로움을 보여준다. 향기 없는 모란, 여근곡을 침입한 적군을 알아차리고, 죽는 날을 예언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지시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유교적 사관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도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이례적으로 지혜롭고 똑똑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실제 선덕여왕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삶을 돌보고 민심을 통합했다. 또 당나라를 적절히 활용한 지혜로운 외교정책으로 호시탐탐 신라를 넘보는 외부세력을 견제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김춘추, 김유신 등 뛰어난 인재를 발탁해 중용했을 뿐 아니라 귀족세력 간의 권력 균형을 통해 내부적 결속력을 다진 부드러운 리더쉽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불교 관련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선덕여왕은 깊은 불심을 바탕으로 즉위한 순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교중흥 정책을 펼쳤다. 특히 왕권 안정과 국난 극복을 위해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 대규모 불사를 일으켜 신라의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이후 진덕여왕대까지 건립된 사찰 47곳 가운데 24개가 선덕여왕대 창건됐다는 점은 당시 불교가 얼마나 왕성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선덕여왕 집권기는 자장 율사, 원효 대사 등 내로라할 고승들이 활약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여러 스님들이 왕의 독려 아래 전국 각지에서 설법회와 경전강독, 불사를 맡아 신라인들의 신심을 고취시키고 널리 불교를 홍포했다.
수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긴 선덕여왕이지만 여성의 몸으로 왕이 되기까지 난관이 적지 않았다. 선덕여왕은 632년 아버지 진평왕의 죽음으로 신라 27대 왕으로 즉위한 후 647년까지 16년간 신라를 통치했다. 역사서에는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성골인 남성이 더 이상 없게 되어 국인들이 진평왕의 딸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당시 신라에서 선덕여왕의 즉위는 극히 이례적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귀족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선덕이 왕이 되기 1년 전인 진평왕 53년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진평왕이 일찍이 딸을 후계자로 점찍고 사전작업을 했음을 감안할 때 이 반란은 명백히 여왕의 즉위를 막기 위한 의도였다. 특히 진평왕 스스로가 진지왕과의 왕위다툼 끝에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탓에 내분의 요소는 항상 잠재돼 있었다. 백제의 침략 등 국가적 위기상황이 봉착할 때마다 일부에서는 “여성이라 위엄이 없다”며 여왕폐위론이 노골적으로 거론됐다.


이는 선덕여왕이 여성의 몸으로 왕이 되는 과정은 물론 왕권을 안정시키기까지의 절차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음을 반증한다. 무슨 일이든 ‘처음’은 쉽지 않으며 그 의미도 남다른 법이다. 때문에 선덕여왕은 그의 일생 내내 여성이라는 시대적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즉위가 가능했던 명분은 신라시대 ‘골품제’에 있다. 골품제의 최상위에 위치한 성골은 바로 부처님의 혈족임을 상징한다. 이 성스러운 혈통이야말로 귀족들의 거센 발발에도 여성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강력한 배경인 셈이다.


특히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족임을 자처하고 왕실에 부처님의 가족과 동등한 상징성을 부여했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百淨)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 이름과 일치하며, 진평왕의 아내이자 선덕여왕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의 두 동생까지 석가모니의 숙부인 백반·국반의 이름을 그대로 본 땄다. 진평왕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자연 부처님으로 상징될 수 있는 최상의 배경인 셈이다.


그러나 진평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고,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장녀를 왕위후계자로 점찍었다. 진평왕 후반기인 44년부터 46년까지 이뤄진 관제개혁은 왕의 측근기구 설치와 군사조직의 강화가 핵심으로, 딸이 왕이 된 후 여성이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선덕여왕의 이름이 ‘덕만’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덕만이라는 이름은 여왕 즉위를 정당화시켜줄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열반경’에 등장하는 덕만 우바이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덕만 우바이는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일부러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불제자다. 중생 교화를 위해 여인의 몸을 받아 태어났다는 점에서 여성성불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원래 남자였다는 상징성으로 ‘덕만’이라는 이름에 왕위계승의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덕만은 부처님 당시 신심 깊은 불제자였던 석가족 공주의 이름이기도 하다.


선덕이라는 왕명도 ‘대방등무상경’ 선덕바라문에서 취했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 부처님로부터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이로, 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공손히 받들며 도리천의 왕이 되고자 발원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에서 선덕여왕이 생전 도리천 왕생을 발원하며 “죽은 뒤 당산 남쪽의 도리천 가운데 장사하라”고 한 이면에는 장차 자신이 도리천의 제왕인 제석이 될 것임을 알리고자 한 것이 아닐까. 결국 ‘선덕’이라는 왕명에는 선정을 베풀 뛰어난 왕을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과 선덕여왕 개인의 간절한 발원이 동시에 담긴 셈이다.

 

국난 극복 위해 불사 일으켜
황룡사 9층탑, 호국불교 시발


선덕여왕에게 불교의 후광을 더하는 작업은 즉위 후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즉위년 ‘삼국사기’는 “국인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고 기록한다. 신라에서 왕에게 존호를 올린 것은 기록상 선덕여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성조황고는 ‘성스러운 조상의 후손, 여자 황제’라는 의미로 여왕에 올리는 최상의 존경의 뜻이 담겨있다.


즉위 3년(634)년에는 ‘향기로운 여황제의 절’ 분황사(芬皇寺)가 세워졌고 이듬해 ‘영험하고 신묘한 여황제의 절’ 영묘사(靈妙寺)가 창건됐다. 특히 영묘사는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원당의 기능을 수행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선덕여왕은 자주 이곳을 찾아 향공양을 올렸다고 전한다. 여왕을 사모해 불귀신이 되었다는 지귀 설화도 이곳 영묘사에 얽힌 이야기다.


천문관측대로 알려졌던 첨성대(633년)가 지상우물이며 여왕의 신성한 혈통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단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첨성대 특유의 곡선은 마야부인의 잉태한 모습을 상징하며 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한 옆구리를 의미한다는 일부 학자의 견해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선덕여왕은 역사상 유례없는 여성 통치자로 귀족들을 견제하고 동시에 신라의 위상이 변함없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특히 불교에 기반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선덕여왕 집권기에는 유독 외부세력의 침략이 많았다. 선덕왕 11년 백제의 공격으로 서쪽 성 40여 곳을 빼앗기고, 고구려·백제 연합군에 의한 공격도 잇따랐다.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도움은커녕 당태종은 “여자가 왕이 되어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비웃음과 함께 일족을 남편감으로 보낼테니 결혼해 왕으로 삼으라는 모욕적 제안을 하기도 했다. 나라의 위기상황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 율사다. 자장 스님은 63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5년만에 귀국한다. 자장 스님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황룡사 9층탑 불사를 제안하게 된다. 불교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불교치국책’의 시작인 셈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 스님이 황룡사 9층탑 불사를 제안한 근거는 바로 문수보살의 수기였다.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수행하던 중 특이한 모습의 승려와 신인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문수보살이었다. 문수보살은 자장 스님에게 “황룡사의 호법룡이 범천왕의 명령을 받아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개 국가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 예언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 화가 닥친 것은 산천이 험해 성질이 거칠고 허튼 소견을 쉽게 믿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너희 여왕은 천축국 찰리종, 즉 석가모니가 속한 인도 크샤트리아족으로 부처님이 이미 그에게 불기를 주어 현세의 왕으로 지목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성스러운 혈통임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당시 추락 중이던 여왕의 위상을 승격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자장 스님은 신라가 불국토이며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종족이라는 ‘진종설’을 통해 왕실 권위를 다지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문수보살의 수기로 건립된 황룡사 9층탑에는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서 구해 온 불사리가 안치됐다. 9층탑은 호국불교의 상징인 동시에 신라를 중심으로 한반도 통일의 시발이자 자주의식의 핵심이었다.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 따르면 자장 스님은 부처님의 머리뼈와 어금니, 부처님 사리 100과, 부처님이 입으셨던 금란가사 한 벌이었다. 황룡사 9층탑에 안치된 사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태화사탑과 통도사 계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9층탑이 세워진 덕인지 선덕여왕 13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 잃었던 7성을 탈환하고 이듬해 백제의 침공도 거뜬히 막아냈다. 당나라와 연합작전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이어가게 된다. 물론 이는 9층탑 불사를 주도하는 동시에 김유신을 압량군주로 발탁하고 외교와 군사력을 확보해나간 선덕여왕의 노력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외부세력의 잦은 침략으로 고통 받던 당시 백성들에게 성골 여왕의 위상을 드높이고 신라땅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는 불국토라는 자부심을 심어줬음이 자명하다. 나아가 선덕여왕이 신라통일의 비전을 일구고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적 신념에 기반한 정책으로 널리 선정을 펼치고 통일신라의 토대를 확립한 선덕여왕은 신라 역사상 단연 뛰어난 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렇다면 왕이 아닌 인간 덕만의 삶은 어땠을까. 아쉽게도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위서논란이 제기된 ‘화랑세기’에 선덕여왕이 2명의 남편과 3번의 결혼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외의 사료에서는 그녀에게 배우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선정을 펼친 통치자였지만 어쩌면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서 그 어디에도 마음 편히 기대지 못하는 고독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때론 여왕이라는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현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여왕은 불교의 가르침에 더욱 깊이 심취했을 지도 모른다. 사찰을 찾아 향을 올리고 고승의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독송하는 일련의 행위 이면에는, 통치자가 아닌 한 명의 범부중생으로서 세속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염원이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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