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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출현은 자비 원천이자 경이로운 축복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2.05.23 11:40
  • 수정 2012.06.04 09:23
  • 댓글 0

인류의 스승 붓다-5. 최고의 자비인

붓다는 지혜·자비 화신
계정혜로 삼독심 제거


어머니가 외아들 구하듯
모든 생명 대할 것 강조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붓다는 흔히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불린다. 그가 최초로 보인 자비행은 전도의 행위이다. 정각 직후에 깊디깊은 불법을 중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피곤한 일일 것으로 예상하여 주저했지만 결국 전도하기로 한 것, 이는 분명 자비행이다. 하지만 자비는 우주에 줄곧 존재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오묘한 법이 고통과 악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싯다르타 태자의 몸으로 출현한 것 그 자체가 자비의 원천이고 인류사에 경이로운 축복이다.


태자는 뭇 생명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출가하고 수도하여 열반(nibbāna)을 얻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여들자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고 계율, 선정과 지혜로써 그들을 지도하여 삼독을 제거함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했다. 초기 경전인 ‘법구경’은 ‘열반에 이른 자에게는 적의(敵意)가 전혀 없다’고 하고, ‘성자는 어떤 생명도 해칠 수가 없다.’(ahimsā)고도 한다. 적의가 전혀 없는 아힘사, 이를 한문 문화권은 불살생으로 번역해 왔지만,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비(metta)가 된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아래 구절은 특히 유명하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생명에 대하여 한량없는 마음을, 온 세계에 대하여 자애롭고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붓다의 출현 이후에도 우리의 악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지 않으니 우리들은 오늘도 자비심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2천 수백 년 전 인도의 중생들은 보통 십악(十惡) 중 하나 이상을 범했다. 십악이란 살생, 절도, 음란, 거짓말,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기어 綺語], 인색과 탐욕[간탐 貪], 질투, 사견(邪見)을 가리킨다. 이는 장아함의 ‘소연경’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경은 역사와 신화가 섞여있는 까마득한 옛적에 중생들이 먹을거리를 두고서 싸웠다고 하고, 폭력의 예방책으로서 두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왕을 세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선 수행의 전통을 되찾는 길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더 확실한 지도 모른다. 출가 수도와 선정의 궁극 목표는 열반이고, 이를 성취하면 십악은 완전히 사라진다.


한국인 중에서 십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시민은 곧 중생이다. 오늘날의 ‘시민 중생’은 2천 년 전 인도의 중생보다 더 사나워 보인다. 그리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뒤 1천 수백 년이 지났건만 남북한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 민족에게서 분노의 기질이나 폭력이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다. 수많은 불교 유적지나 사찰은 보이지만, 우리 문화나 의식 구조에 스며든 자비와 비폭력 정신은 찾을 수가 없다. 자비가 모든 생명을 포함하는 것이니 수백만 마리 동물을 생매장시킨 육식산업 구조와 출가자의 육식은 무자비하다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에 대한 행악보다 더 급한 것이 있을까?


한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와 더불어 욕설과 막말을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2012년 3월15일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범죄 발생건수는 2000년 이후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2010년 발생한 형사범죄(재산범죄, 강력범죄, 위조범죄, 공무원범죄, 풍속범죄 등)는 45만여 건으로 지난 2000년보다 58%, 20년 전인 1990년과 비교하면 무려 248% 급증했다. 형사범죄 중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살인은 2000년 964건에서 2010년 1262건, 강간은 2000년 6982건에서 2010년 1만9939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00년 4만9838건에서 2010년 18만365건으로 증가하여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코리아헤럴드, 2012.3.15)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31.2명으로 세계 1위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 좀 다르지만 양자가 흔히 공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고의 자살률은 강력범죄의 증가와 함께 우리 사회에 폭력이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위증과 무고(誣告) 역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 앞에서 한국은 거짓말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은 어둠 속에서 보수니 진보니 하는 정치 이념보다 더욱 힘차게 작동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형사범죄들은 대개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다. 십악 가운데 하나인 절도는 재산범죄로 되고, 살생은 살인으로 되고, 거짓말은 심하면 사기죄로 변하며, 이간질과 욕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될 수 있고, 음란 행위는 강간을 낳는다.


고대 인도인에 비해서 오늘날 한국의 ‘시민 중생’이 더 사나워 보이는 이유는 최소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군사부(君師父) 일체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의 반복 사용이다. 20세기에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면서 국가에는 절대 군주나 독재자가, 가정에는 가부장이 많이 사라졌는데, 그 결과 왕이나 가부장에 의한 직접적, 구조적 폭력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국가 폭력(권력)이 없어진 공간에, 수평 관계에 있는 시민 중생 간의 막말, 거짓말과 폭행상해 등이 들어선 것이 아닐까? 중고등 학교에는 존경하는 선생님도 무서운 선생님도 없고 엄한 규율마저 없어진 그 공백은 학생들의 욕설과 폭력으로 채워진다.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문화적 폭력은 줄었지만 부부간의 폭력은 증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군사부일체의 종말과 더불어 폭력은 분산되고, 폭력 행위자의 비율은 높아진 것, 결국 일인당 시민 중생의 폭력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과거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시대가 어마어마한 정보(주로 감각적 쾌락을 주는 정보)를 주는 탓에, 시민은 주의가 산만해지고 집중력을 잃었다. 니콜라스 카의 ‘천박한 자들’(The Shallows)에 따르면, 인터넷과 SNS매체에 대해 사용자들은 습관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고요하고 주의력 깊은 마음을 상실하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잃었다. 사람의 뇌는 물리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빨리 반응하지만, 상대방의 심리적 도덕적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무슨 시청각 정보만 주어지면 진실 여부를 따지기보다 집단적으로 곧잘 흥분하고 상대를 헐뜯기부터 시작하는 일부 시민 중생과 언론의 습성을 보면, 카의 분석과 우려는 미국보다 우리 사회에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넷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이 줄어든다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이 느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오늘날 한국 ‘시민중생’
2천년 전보다 더 무자비


수행 목표는 깨달음 넘어
자비의 마음 드러내는 것


한국에는 현재 선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지도의 목표로서 참 자아와 행복, 자비의 성취를 제시한다. 또한 화두를 일상에 적용하면서 우리가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화두 의심에 몰두하기를 권한다. 그러면 혼침, 무지, 모든 산란심이 없어지고 일념이 온다고 한다. 절대 일념이 지속되면 모든 분쟁, 갈등, 질투가 사라지고 마음은 참된 고향에 이르고, 대안락, 대자유, 대지혜, 또한 대자비가 실현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온 인류가 나와 더불어 한 몸이 되고, 온 세계, 유정무정이 다 나와 더불어 한 집이 되어 대평화를 성취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부부가 화두를 잘 챙기면 화목한 가정이 되고, 이는 나아가 화목한 사회와 나라를 이루며, 마침내 세계평화에 큰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 수행은 분쟁과 갈등을 전부 막을 수 있을까? 선 수행만으로는 구조적 폭력이나 악에 저항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폭력의 실상을 알기조차도 어렵다. 선 수행이 전지(全知)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세계평화’가 구조적 폭력의 부재를 의미한다면 선 수행만으로 그 평화를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선 수행이 감당하기 힘든 과제로 국가 간의 폭력도 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그것을 가장 절절이 느낀 불교인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그는 ‘세모(歲暮)’라는 시에, 산 밑 작은 집 매화나무 곁에서 참선하는 사람을 등장시키지만, 그를 여러 띠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자로 그려냈다. 흰 눈, 찬바람, 따스한 빛이 그 첫째 띠이고, 생활, 전쟁, 주의, 혁명이 그 다음 띠이다. 마지막 띠는 강자와 채권자의 것이다. 만해는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 행사를 차가운 북풍한설과 같이 뼈아프게 느끼면서, 민족의 자유와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좋은 정치 그리고 현대물질 문명이 주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한편, 세력의 상징적인 인물로 전략과 전술이 특출한 이순신과 을지문덕 장군을 찬양했다.


사람이 사납고 폭력적인 데는 최소한 세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의 타고난 탐욕과 공격성, 경쟁적 소유와 자유를 기본 원리로 삼는 현대사회의 성격, 그리고 감각적 쾌락을 무한정 공급하는 인터넷, 이렇게 셋이다.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분노와 폭력을 줄이는 방도로 경쟁의 완화, 법치의 확립, 자기 교육 등을 제시할 것이다. 경쟁을 폭력과 불평등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고 해도 본능적인 경쟁심을 법과 규제로 다스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불교 승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율이 필수적이듯이, 세속의 공동체를 위해서는 적절한 형법의 제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자기를 교육함으로써 공감과 동정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으뜸가는 자기 교육의 방법은 스스로 부과한 규율을 따르고 정기적으로 선 수행을 하면서 탐욕과 분노를 촉발하는 감각적 자극을 줄이는 길이다.


▲허우성 교수
“깨달음은 시민 중생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면서 우리가 먼저 고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선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폭력을 잠재우고 자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고치는 것은 깨달음의 표준을 다시 정하는 것이고, 시민 중생을 다소나마 선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며, 석가탄신이라는 축복을 진정으로 세상에 회향하는 길이다.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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