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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스승 붓다-6. 최고의 윤리인

기자명 법보신문

도덕적 품성과 권위 갖춘 완전한 인격체 표상

팔정도는 고통 극복하는 도덕적 실천수행
삼독심 청정하게 하는 것도 윤리적 가르침
바람직한 포교수단은 ‘불교의 생활 윤리화’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불교는 훗날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알려진, 붓다의 최초 설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점에서 붓다가 설하신 초전법륜의 내용은 곧 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밖에 없겠지만 흔히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로 압축, 요약되고 있는 붓다의 초전법륜은 한 마디로 말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방향제시를 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적 불교학자인 프랑스의 에띠엔 라모트(1921~1983)는 붓다가 염두에 두었던 가르침은 고상한 철학이나 형이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유용한 도덕과 윤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깨달은 자’, 붓다는 그렇지 못한 중생들에게 먼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만난 영원한 스승, 붓다의 모습은 다정다감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품위와 권위를 가진 훌륭한 도덕교사와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 후대의 사람들이 불교를 가리켜 다른 종교전통들과는 달리 특별히 ‘인간학의 종교’라고 규정한 것은 초전법륜의 이런 측면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추정을 해본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붓다는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으로 정말 존경하고 싶은, 완전한 인격체의 한 전범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붓다에 대해 굳이 한 가지 측면에서만 조망하려고 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위에서 말한 사제팔정도의 가르침을 천천히 음미해보면 이런 해석이 전혀 엉뚱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붓다는 연기법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깨달음을 사제팔정도의 정형화된 공식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잘 알려진 대로 사제란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각각 이 세상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르침, 그 고통의 원인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의 삼독심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 나아가 이를 지멸시키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의 가르침을 뜻한다. 붓다가 사제팔정도 가운데서도 특히 팔정도를 삶과 죽음을 포함한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극복하는 도덕적 실천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은 그의 가르침이 종교 지상주의라기보다는 윤리지향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재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초기불교에서 팔정도는 실천적 도덕행위임과 동시에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의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경전에 따르면 팔정도는 업을 소멸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음에 이르는 올바른 진리의 가르침으로 인식되었다. 예컨대, “비구들이여, 무엇이 업의 소멸로 가는 길인가? 그것은 팔정도이다.”라거나 “팔정도가 노사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와 같은 표현 및 “건강이 최고의 얻음이며, 열반이 최고의 행복이며, 팔정도가 불사에 안전하게 이르는 최선의 길이다.”라는 언급, 그리고 “사리불 존자시여, 열반, 열반이라고들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열반입니까? 탐냄의 소멸과 성냄의 소멸과 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을 일러 열반이라고 한다.” 등의 기록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팔정도란 사제와 연기, ‘무상-고-무아’ 등에 대한 올바른 견해(正見), 관능적인 욕망이나 남을 해치려는 악의 등을 품지 않는 올바른 생각(正思), 거짓말과 욕설 및 꾸밈말·이간질 등을 하지 않는 올바른 말(正語), 도둑질이나 상해·삿된 음행·지나친 음주 등을 삼가는 올바론 행위(正業), 나쁜 직업 등을 멀리하는 올바른 생계수단(正命), 악한 것을 배제하고 선한 것을 추구하려는 올바른 삶의 자세(正精進), 몸과 느낌과 마음 및 그 대상 등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맑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집중(正定) 등의 여덟 가지 올바른 생활인의 길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도 초기불교는 특히 정념과 정정의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든 그릇된 행동의 근원인 탐진치의 마음을 청정하게 만드는 올바른 윤리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팔정도의 고제와 집제는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12연기의 유전문에 해당한다면, 멸제와 도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에서 12연기의 환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통으로 얼룩진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곧 팔정도의 올바른 실천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2연기의 환멸문이 그랬듯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팔정도의 수행은 늙음과 노사 및 태어남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열반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의 경지를 열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지면상 사제팔정도의 가르침이 말하자면 윤리적 행위원리의 제시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피하기로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팔정도를 올바르게 닦은 사람들의 과보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열반세계의 증득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으로부터의 해탈(moks. a)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생사) 자체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라는 점에서 불교윤리 고유의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의 길은 붓다가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열반을 얻은 존재는 더 이상 생사윤회의 구속을 받지 않게 된다. 물론 열반의 길은 멀고도 험하며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생사의 반복과 거듭되는 탐진치 소멸의 노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윤리관은 사제팔정도의 인식 및 그것의 실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초전법륜의 주된 가르침인 사제팔정도의 귀결점은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 물음에 대한 불교윤리적 답변이라고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리즈 데이비드(Rhys Davids) 역시 이와 유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생로병사를 비롯한 인생사의 모든 고통을 초월한 궁극적 자유인 열반에 대해서 “윤리적 실천과 마음집중 및 통찰력(계정혜, 즉 팔정도의 가르침)에 의해 이 세상의 태어남(현생) 속에서도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윤리적 상태(ethical state)”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초전법륜의 내용인 사제팔정도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세속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접근은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종교적 진리가 일상생활 속의 윤리적 행위로도 환원되어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할만한 하다고 본다.


이처럼 6년간의 피나는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처음으로 설하신 초전법륜의 메시지가 윤리적인 것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윤리인’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동안 혹시라도 우리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일상적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대자유’나 ‘해탈’ 또는 ‘무애’ 와 ‘격외’의 종교로 지나치게 관념화하거나 추상화시킨 것은 아닌지도 곰곰이 되돌아 볼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라는 종교는 아무래도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이웃과 같은 삶의 버팀목이 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양해를 구하고 몇 마디만 더 덧붙여 보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포교수단은 종교적 진리의 보편적 윤리화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선종의 절대적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는 ‘깨달음’을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이제 이런 깨달음 일변도의 불교이해와 실천은 거듭 재고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종교소비자들인 현대인들의 사고와 가치관이 이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쾌락추구적인 경향이 강해진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변화된 상황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불교도 면모를 일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최고의 윤리인’으로 각인된 친근하고 자상한 인간적인 붓다가 현대인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게 된다.


▲허남결 교수
그것은 바로 현대인들이 복잡한 삶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윤리적 갈등들에 대한 불교적 답변의 제시, 즉 불교윤리의 현대적 재해석작업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윤리도덕사상가로서의 붓다의 보습을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붓다 스스로도 만나는 대상과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의 대기설법과 선교방편을 즐겨 사용하시지 않았던가!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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