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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단길, 아름답고도 유구한 생명

전법·구법史 모래알 같이 쌓인 거대한 타임캡슐

 

▲간쑤성(甘肅省) 톈수이(天水)시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마이지산(麥積山)석굴. 깎아지른 절벽에 불보살상을 조각한 솜씨도 놀랍지만 위태로운 벼랑 끝에 기꺼이 몸을 매달았을 이름 모를 이의 신심과 용기도 대단하다. 동쪽면에 조성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은 천 수백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저렇게 세간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北京)을 거쳐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의 우루무치(烏魯木齊)에 내리기까지는 2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실크로드’. 그 이름을 중국 대륙의 어느 한곳 즈음으로 막연히 생각하며 무심코 넘기던 시기, ‘익숙한 이름 실크로드’는 그리 낯선 곳이 아니었다. 실크로드를 만나러 가는 데까지도 고작 하루면 충분했다. 그 장구한 역사와 거대한 발자취를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 이에게 실크로드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금강대학교(총장 정병조) 불교문화연구소(소장 김천학)의 텍스트비평팀이 지난 2월8일부터 22일까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쿠처(庫車)부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는 불교 석굴 현지 조사에 나섰다. 불교문화연구소가 2017년까지 진행하는 인문한국(HK)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이번 현지조사는 석굴이라는 생생한 역사의 흔적을 통해 불교의 동방전래 과정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뜻 깊은 조사였다.


인도서 태어난 불교는 동방으로 전래되며 실크로드 주변에 찬란한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웠다. 수많은 세기 동안 동방의 많은 불제자들과 학자들에게 서쪽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는 경전과 불교의 원형을 찾아가는 구법의 길이었고,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넓은 세계로 전하며 변화와 발전을 일구어가는 전법의 길이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불교 석굴은 불교의 전래와 변화, 발전 그리고 그 속에서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빚어낸 문화의 원형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거대한 타임캡슐이자 박물관이다.


오아시스로, 목숨과 바꾼 아름다움

 

 

▲쿠처왕국의 옛 수도이자 왕실 사원이었던 수바시(蘇巴什)사원. 1600여 년의 세월을 지나며 3000여명이 머물렀다는 사원에는 무너진 흙벽만이 남아있다.

 


전법의 길을 되새기듯 답사는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번 답사는 실크로드의 여러 갈래 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톈산(天山)남로, 즉 오아시스로의 한 갈레를 따라 이뤄졌다. ‘오아시스로’. 이 낭만적인 이름은 그러나 수 많은 이들의 목숨과 맞바꾸어 탄생한 잔인한 아름다움이다.


실크로드는 중원과 서역 및 아랍, 페르시아만을 이어주며 동으로 우리나라의 경주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멀리 유럽까지 이어지는 고대로부터의 거대한 이동 통로였다. 이 가운데서도 중원의 톈산산맥과 그 아래 맞닿아 있는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사막을 따라 위 아래로 형성된 세 갈레 길은 실크로드의 중심무대였다. 톈산산맥의 북쪽면을 따라 형성된 톈산북로, 톈산산맥 남쪽면을 따라 형성된 톈산남로, 그리고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 끝을 따라 돌아가는 사막남로가 그것이다. 이 세 갈레 길을 통칭해 오아시스로라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오아시스로를 이야기할 때 지칭되는 대상은 바로 톈산남로이며 이 길은 곧장 실크로드의 대명사로도 여겨지고 있다. 평균 고도 3600∼4000m에 길이만도 2000km에 달하는 거칠고 거대한 톈산산맥과, 그 이름조차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라는 뜻을 지녀 ‘죽음의 바다’로 불리는 타클라마칸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돌아가야 하는 생사의 갈림길이 바로 오아시스로였다. 한 걸음 내 딛을 곳조차 찾을 수 없이 험준한 톈산산맥을 피해 그 가장자리에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는다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사막 가운데 하나인 타클라마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목숨을 내 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이 길을 오간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길은 이어져오고 있다. 그 가운데 서기629년 서역으로 구법의 길을 떠나 16년간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왕복한 당나라의 구법승 현장 법사와 같이 생생한 여정과 당시 문화·사회상을 기록으로 남긴 이들도 많다.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실크로드, 특히 귀국길에 접한 톈산남로의 험난하기를 이와 같이 기록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거대한 유사(타클라마칸사막)에 들어가게 된다. 모래가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바람에 따라 쌓였다가 흩어지며 사람들의 지나간 흔적이 사라져 버려 결국에는 대부분 길을 잃고 만다. 사방을 보아도 망망한 모래뿐이라.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오가는 사람들은 죽은 자가 남긴 해골들을 모아 표지로 삼는다. 물과 풀이 없고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기도 한다. 열풍이 불 때면 사람이나 동물은 혼미해지고 이로 인해 병이 생기기도 한다. 때로 휘파람이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때로 흐느끼며 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사이에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이로 인해 자주 목숨을 잃게 된다. 아마 이것은 도깨비의 소행일 것이다.”


현장 스님의 일생을 기록한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서는 더욱 절박한 필치로 이 두려운 사막의 풍광을 서술하고 있다.


“혈혈단신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오직 쌓여 있는 해골과 말의 분뇨 등을 보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하늘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없으며 또 물과 초목도 없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그림자라고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밤에도 요사스런 도깨비의 불빛이 찬란하기가 마치 무성한 별빛 같았고, 낮이면 거센 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흩뜨리는 것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4일 밤, 5일 낮 동안 한 방울의 물도 적시지 못해 목구멍과 배가 바싹바싹 타들어갔고 거의 절명 상태로 다시는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모래 위에 누워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석굴사원은 불교 예술의 보고

 

 

▲21세기 실크로드. 쿠처에서 쿠얼러를 지나 투루판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다. 혜초 스님이 지나갔던 그 길이 오늘날 이렇게 잘 포장된 길로 변했다.

 


현장 스님은 5일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이 사막을 가로지르며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으나 타고 가던 말이 스스로 오아시스를 찾아간 덕분에 비로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비록 늙고 야위었지만 30여 차례나 서역을 오갔던 경험이 있었다. 갈증과 더위에 지쳐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도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과 ‘반야심경’ 염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현장 스님은 불보살과 신장들의 현신과 가피로 수많은 위기를 넘겼으니 실크로드가 오랜 구법의 길이자 전법의 길이었음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있음이다.


현장 스님만이 아니다. 8세기 서역으로 구법의 길을 나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실크로드를 답사하고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을 남긴 신라의 구법승 혜초 스님도 이 길을 따라 장안에까지 이르렀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텍스트비평팀의 현지 조사는 인도 순례를 마치고 장안으로 향하던 혜초 스님의 중국 내 동진 루트와도 상당 구간 일치한다. 덕분에 조사를 진행하는 내내 혜초 스님, 나아가 한민족의 흔적을 찾는 것도 묵직한 화두가 되었다.
실크로드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행의 길만은 아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동서양의 값진 문물과 특히 불교라는 위대한 종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발전된 국가와 도시들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교류, 융합이 이뤄지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주었다.


전법의 길, 구법의 길이었던 만큼 이 지역에는 많은 불교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기원 전후 오아시스로 주변 국가에 전래되기 시작한 불교는 사원건축을 탄생시켰고 4세기 이후 사원건축은 석굴사원 조성으로 이어졌다. 석굴사원은 6~7세기경에 전성기를 맞으면서 석굴사원 장엄을 위한 대규모의 불교미술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 눈부셨던 신심과 풍요로웠던 문화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오아시스로를 따라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석굴사원을 통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불교문화연구소 텍스트비평팀의 조사가 이루어진 쿠처(庫車), 쿠얼러(庫爾勒), 투루판(吐魯番)부터 둔황(敦煌), 안시(安西), 주취안(酒泉), 장예(張掖), 우웨이(武威), 란저우(蘭州), 톈수이(天水), 시안(西安)에 까지 이르는 오아시스로에는 실크로드 불교미술의 꽃이라 불리는 키질(克孜尔)석굴을 비롯해 문명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둔황석굴 그리고 베제클리크(伯孜克里克), 안시위린쿠(安西楡林窟), 윈수산(文殊山)석굴, 마티스(馬蹄寺)석굴, 톈티산(天梯山)석굴, 빙링스(炳靈寺)석굴, 마이지산(麥積山)석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굴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기원 전후부터 원·청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사원과 석굴들은 오늘날까지도 불교미술의 최고봉을 이루며 불교학자들과 미술사연구자, 그리고 종교를 떠나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대면하고자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끝없이 불러 모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실크로드는 동서를 이어주는 대동맥이다. 물론 길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키르키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 여러 나라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동과 서로 오가며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중국에 속해있는 오아시스로, 그 가운데에서도 톈산남로는 제법 잘 닦여진 고속도로가 유구한 실크로드의 명성을 21세기에도 빛내주고 있다.

 

 

▲중국 불교 석굴 현지 조사를 진행한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텍스트비평팀. 왼쪽부터 석길암 HK교수, 김슬기 조교, 한지연 HK교수.

 


15일간에 걸친 이번 현지 조사는 비록 중국 내라는 인위적인 경계에 한정지어져 이루어졌지만 그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원과 석굴,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눈부신 빛을 던지고 있는 아름답고 장엄한 불교미술들을 통해 2600여년 세월 이어지고 있는 법의 등불이 오늘날까지도 밝게 빛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환희의 순례길이었다.


여정은 우루무치를 거쳐 실크로드 주변 고대 불교왕국의 하나였던 쿠처(龜玆)국의 중심 쿠처에서 시작되었다.

 

한 겨울의 칼바람이 도심을 휘감아 돌고 있던 겨울의 끝자락, 아니 여전히 겨울의 한 복판에 서 있던 2월 중순, 영하 20도의 우루무치에 몸을 부리고 낯설음과 설렘 속에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과학이 인류에게 선물한 날개인 비행기에 몸을 의탁해 톈산산맥을 훌쩍 넘어 쿠처에 도착했다. 그 순간 일행은 2000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실크로드의 한 복판, 거대한 역사의 시간 속으로 들어섰다. 이제 여정은 답사이자 순례다. 그 보름간의 기록을 전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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