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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쿰투라(庫木土拉)석굴

융화·번영의 쿠처불교 천년이 빚은 흙빛 역사서

 

▲쿠처현 무자트강가에 조성돼 있는 쿰투라석굴의 오련굴 입구. 테라스처럼 보이는 복도를 따라 다섯 개의 석굴이 나란히 조성돼 있는 쿰투라석굴 특유의 양식이다. 그러나 석굴 내부에서는 일체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외관만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격적인 여정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쿠처(庫車)현에서부터 시작된다. 쿠처는 고대왕국이었던 쿠처(龜玆)국의 중심으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대로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서한(B.C 206~A.D 8) 때 쿠처국은 오아시스로 주변 서른여섯 나라 가운데 9대국의 하나였다. 여러 나라들 중 가장 이른 시기인 기원전 1세기부터 이미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쿠처국은 이를 주변 국가로 전하며 서역불교 형성의 중심 역할을 했다. 특히 불교의 중국 전래에 가교 역할을 한 불교 왕국이었다. ‘대당서역기’나 ‘왕오천축구전’ 등 여러 불교 문헌에서 ‘구자(龜玆)’ 외에도 ‘굴지(屈支)’ ‘구이(拘夷)’ 등의 명칭으로 자주 등장해 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3대 강의 풍요에 기댄 천혜의 땅


그러나 오늘날 쿠처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한 현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그런데도 답사의 시작지로 쿠처가 선택된 것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내에서도 불교석굴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쿠처에는 무자트강, 키질강, 쿠처강이라는 3개의 커다란 강이 지나가고 있다. 오아시스로 주변 대부분의 도시들이 말 그대로 오아시스에 의지해 형성됐거나 인공수로를 만들어 치열하게 물을 확보했던데 비해 쿠처는 강이라는 천혜의 자연 덕에 일찌감치 실크로드 상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불교석굴도 많이 조성됐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도 많다. 그 가운데 하나인 쿰투라(庫木土拉)석굴이 우리의 첫 목적지다.


중국 불교 석굴 현지 조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만나는 석굴이다. 기대감이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듯하다. 얼마나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질 것인가! 쿰투라석굴로 이동하는 1시간 남짓, 혼자 안절부절 못한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쿰투라석굴 입구를 알리는 작은 안내판 옆에 멈춰 섰다. “쿰투라석굴 관리소에서 책임자가 나와 안내를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현지 조사를 나왔다 하니 중국 측에서도 각별히 협조를 하는가싶어 내심 기대가 더 커진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현실은 좀 다르다. 안내인 없이는 단 한 곳의 석굴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석굴엔 출입을 통제하는 문이 설치돼 있고, 모든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물론 “유적 보호를 위해서”라지만 이면에는 문을 열어줄 때마다 관람료를 챙기려는 지극히 상업적인 계산도 깔려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안내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을 수밖에. 또 안내인들은 한 결 같이 석굴 내부에서 사진 촬영을 일체 못하도록 단속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비교적 친절해 보이는 관리소 책임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차는 다시 석굴을 향해 움직인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허옇게 얼어붙은 무자트강가에서부터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된다.


쿰투라석굴은 쿠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가량 떨어진 무자트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석굴은 5~11세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조성됐다. 쿠처국의 불교는 3~4세기경 절정에 달해 8세기까지 꾸준히 발전했으며 이후 한족과 위구르족의 영향을 차례로 받아 문화의 융합과 변화를 거듭했다. 그 역사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현장이 바로 쿰투라석굴이다.


쿰투라석굴은 조금 앞서 조성된 인근의 키질(克孜尔)석굴과 더불어 쿠처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굴로 손꼽히는데 두 석굴 모두 풍부한 물, 바로 이 무자트강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지연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는 “물이 부족한 오아시스 국가에서 이처럼 강을 중심으로 사원을 조성했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국가적인 뒷받침과 국민들의 열렬함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석굴은 모두 112개. 이 가운데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는 석굴은 약 60여개 정도다. 그 가운데 북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68~72호굴이 첫 답사지다. 다섯 개의 석굴이 하나의 복도를 따라 나란히 조성돼있어 오련굴(五連窟)로도 불리며 쿰투라를 대표하는 석굴 가운데 하나다. 관리소 책임자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테라스처럼 형성돼 있는 복도를 따라 다섯 석굴의 입구가 줄지어 있다. 각각의 석굴에는 또 출입문이 설치돼 있어 일일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마침내 일행의 첫 답사굴인 68호굴의 문이 열렸다.


석실 안 가득한 불보살상과 고색창연한 빛으로 벽을 장식하고 있을 아름다운 벽화를 드디어 만나는가? 하지만 기대했던 불교미술의 정수 대신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석굴 안의 모습은 날카롭게 벽을 긁어낸 무수한 칼자국과 텅 빈 좌대였다.


약탈의 칼날에 속살 뜯긴 석굴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말문이 막혀 탄식조차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는 천장부분에 약간의 벽화가 남아있지만 그나마 시커먼 그을음에 덮여 형태를 확인하기조차 쉽지 않다. 검은 그을음 아래로 간신히 색을 드러내고 있는 벽화 속에는 스스로 울림을 낸다는 수많은 악기들이 천상을 유영하듯 떠다니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다. 석굴 안은 전실과 후실, 두 공간으로 나눠져 있는데 뒤편의 후실에는 열반상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열반상은 훼손됐거나 약탈당했는지 흔적도 없고 빈 좌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다섯 개의 굴 가운데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했던 69호 승방굴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굴은 모두 불상을 봉안한 예배굴이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불보살상은 사라져 좌대와 흔적만 남아있고 벽화는 뜯겨나가거나 그을음에 덮여 있다.


석굴이 이렇게 훼손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실크로드 지역에 휘몰아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열강의 약탈이다. 중국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이 지역의 수많은 유물들이 ‘탐험대’를 빙자한 유럽과 미국 등지의 ‘약탈자’들에 의해 전 세계로 실려 나갔다. 20세기 접어들면서는 이 행렬에 일본까지 합세하며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다. 약탈자들은 석굴에 조성돼 있던 불보살상과 아름다운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 약탈하거나 헐값에 매입, 자국으로 반출했다. 벽면 가득 거친 칼자국들은 약탈자들에게 유린당한 석굴에 남겨진 생채기들이다.


또 하나는 이슬람교도에 의한 훼불이다. 8세기 후반 실크로드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때마침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던 이슬람교가 12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 불교를 완전히 밀어내면서 불교석굴은 극심한 훼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석굴 안에 조성돼 있던 불보살상과 벽화들을 ‘우상’으로 여겨 마구 훼손했는데 특히 ‘눈에서 사악한 기운이 나온다’고 여겨 불보살상과 신장, 천신의 눈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면적이 넓은 벽화는 일일이 지워버리기가 힘들었는지 석굴 안에 일부러 불을 지펴 그을음이 벽화를 뒤덮게 했다.


여기에 또 하나, 극한과 극서를 치닫는 사막의 거친 기후와 지진 등도 석굴의 쇠락을 부채질했다.


이런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형태와 흔적이나마 보존하고 있는 석굴들의 인욕이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최근 들어 그을음을 조금씩 걷어내면서 일부 벽화들이 수백 년의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기대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지만 조금씩 형태와 색을 되찾고 있는 단편의 벽화들은 약탈과 훼손, 시간의 장벽을 넘어선 장하고도 장한 역사의 꽃들이다. 다만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불보살상 만은 다시 찾을 길이 없는 듯해 더 안타까울 뿐이다.


훼손 피한 불보살 미소는 생생

 

 

▲쿰투라석굴 21호(신2호) 석굴의 벽화. 돔형의 천장엔 중앙의 연꽃을 중심으로 13명의 공양보살상이 법륜모양으로 배열돼 있다. 약탈과 훼불을 피해 온전히 보전된 쿰투라의 대표 석굴로 쿠처불교의 융성함과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사진 출처=‘신장석굴의 예술’

 


그러나 석굴에 남아있는 벽화와 문양, 조각상의 편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탄사를 쏟아내기에 부족함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69호 석굴에는 1500여 년 전 쿠처의 고대 문자가 여전히 선명하고, 58호 석굴에는 그을음 속에서 찾아낸 벽화가  그윽한 빛을 뿜고 있다. 특히 58호굴의 벽화는 심한 그을음 덕에 유럽인들의 약탈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 아래서 모습을 드러낸 벽화는 당시 쿠처인들이 상상하던 천상, 즉 우주의 모습이었다.
쿰투라석굴은 조성 시기에 따라 크게 3종류로 구분된다. 전성기 쿠처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5~7세기 쿠처시기 석굴, 당나라의 세력권에 들면서 한족의 영향이 유입된 8~9세기의 중원불교시기 석굴, 그리고 당의 쇠퇴 후 위구르족이 이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10~11세기까지의 위구르족불교시기 석굴이다. 특히 8세기 무렵부터 신장웨이우얼에 유입된 위구르족은 11세기까지 불교를 신봉했는데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이곳 석굴 벽화에도 반영됐다.


이처럼 쿰투라석굴에서는 서역불교의 중심지였던 쿠처의 불교부터 한족의 세력이 확대되며 가미된 중원불교문화, 그리고 위구르족의 문화적 특성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어 불교문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의 역사와 불교사, 불교 예술의 변천 과정까지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오련굴을 포함 무자트강변에 조성돼 있는 석굴 10여개를 차례로 살펴본 후 조금 더 깊숙한 계곡으로 들어간다.
“이제 보게 될 두 곳의 석굴은 문화대혁명시기 이곳에 방공호를 개착하다 발견한 석굴입니다. 약간의 자연적인 훼손 외에는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견된, 쿰투라를 대표하는 석굴 가운데 하나입니다.”


관리인의 설명에 자부심이 한껏 묻어난다. 입구에서부터 석굴 안까지 삼중으로 설치돼 있는 문이 마침내 열리자 그들의 자부심을 넘어서고도 남을 장엄한 회상이 펼쳐진다. 신(新)1굴로도 불리는 20호 석굴에는 아름다운 돔형의 천장에 섬세한 연꽃 문양을 중심으로 부처님과 공양 올리는 보살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옆의 21호 석굴(신2굴)에는 더욱 섬세하고 세련되게 표현된 보살상이 같은 형식의 돔형 천장을 수놓고 있다. 건장한 신체와 부드러운 S라인의 자태, 그리고 수인을 취하고 있는 손 모양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보살상들은 땋아 내린 머리와 수염 등이 서역인의 외모를 반영하고 있다. 보살들을 장엄하고 있는 온갖 영락, 손에 들고 있는 보병과 꽃 등 세련된 지물, 그리고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형형색색의 옷자락들. 쿠처불교의 전성기인 5세기경 조성된 이 벽화들은 화려했던 쿠처왕국의 문화와 그 속에서 번영했던 불교의 역사를 마치 한편의 슬라이드 필름처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21호 석굴을 마지막으로 쿰투라석굴 답사를 마쳤지만 화려한 쇼의 클라이막스를 감상한 듯 찬연한 21호 석굴 벽화의 감동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앞서 보았던 10여개의 석굴들도 모두 한때는 저처럼 아름다운 벽화들로 장엄돼 있었을 터이다. 비록 상당수는 사라지고 일부는 그을음에 덮여 있고 또 나머지는 이제 겨우 다시 빛을 찾고 있지만 이곳에 꽃피웠던 불교사를 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흙산, 작은 구멍처럼 보이던 석굴 안에 또 하나의 세상, 우주법계와 불보살의 회상을 펼친 옛 사람들의 신심이 봉안돼 있음을 보아서인지 이 황량한 산이 아까와는 왠지 다르게 느껴진다.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에 사막은 더욱 아름답다고 했던가? 처음 만난 실크로드, 저 황막한 모래 언덕과 바위산이 꺼지지 않고 이어져온 법의 등불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단조로운 흙빛이 불현듯 눈부시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아름다움인가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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