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0. 균여 스님의 누나 수명

한번 들은 설법도 단박에 암송하는 경전의 달인

 

 

 

1921년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 학자가 출간한 책 ‘사십칠사원(四十七祠院)’에 학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명확히 짚으면 이들의 관심을 끈 것은 책이 아니라 부록으로 간행된 ‘균여전’이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 화엄고승 균여 스님의 전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균여전’은 이후 1946년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에 부록으로 다시 게재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민족의 암흑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세상에 나타난 ‘균여전’은 고려 문종 29년(1075)에 진사 혁련정이 저술한 것으로, 원전은 균여 스님의 저서와 함께 해인사 장경각의 대장경 보판에 숨겨져 있었다.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해인사 장경각에 잠들어 있던 균여 스님의 방대한 저술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균여전’은 스님에 대한 유일무이한 전기 자료로서, 그 일대기와 행적이 새롭게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균여전’의 정식명칭은 ‘대화엄수좌원통우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의상계 화엄불교 직통 계승자로 화엄사상의 대가이자, 광종대 국찰 귀법사의 주지로 교종의 통합을 꾀하고 대중불교 확산을 주도했던 고려시대 고승 균여 스님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균여 스님의 ‘보현십원가(보현십종원왕가)’ 11수가 수록돼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보현십원가’의 원문은 고려시대 향가연구의 주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그동안 대각국사 의천 스님에 의해 평가절하됐던 균여 스님의 뛰어난 식견과 면모 그리고 대중포교 원력을 확인하는 기반이 됐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균여전’의 재조명으로 역사 속에 숨겨져 있던 한 여성 불자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바로 균여 스님의 누나 ‘수명(秀明)’이다. ‘균여전’ 제3편 자매제현분(姉妹齊賢分)에 따르면 그녀는 균여 스님과 지혜를 겨룰 만큼 총명했으며 특히 불교 경전에 통달할 만큼 식견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균여전’은 균여 스님의 일대기인 만큼 누나 수명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스님의 행적을 찬찬히 살펴나가다 보면, 그 이면에 숨겨진 누나 수명의 진면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수명은 균여 스님의 세살 위 누나다. 고향은 황해도 황주, 성은 변씨로 균여 스님과 같다. 923년 모친이 60세에 균여 스님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누나 수명은 그보다 앞선 920년 태어났음이 확인된다. 수명은 태어날 때부터 울음소리에 절도가 있었으며 자라면서 그 총명함이 더해져 두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어린시절, 마을을 돌아다니며 염불하는 객승이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이에 심취했다는 일화는 특히 관심을 끈다. 우연히 집밖에서 흘러들어온 ‘법화경’을 듣고 깊이 발심한 수명은 그 스님을 집안으로 모셔 독경을 청했다. 스님이 하룻밤 묵으며 ‘법화경’ 8권을 모두 읽었는데 수명이 이를 한번 듣고 모두 통달하여 들은 바를 고스란히 암송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객승은 독경을 마친 후 다시 길을 떠나며 그녀가 “덕운비구의 화신”임을 알렸다. ‘화엄경’에 나타난 덕운비구는 청정한 지혜의 힘으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선지식이라는 점에서, 경전에 특히 밝았던 수명과의 연결고리가 의미심장하다.


어릴시절‘법화경’에 심취해 발심


‘균여전’에 따르면 균여 스님은 아기 무렵 포대기에 쌓여있을 때부터 아버지가 읽어주는 ‘화엄경’을 듣고 약찬게를 읊었다고 전한다. 아기가 약찬게를 암송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균여 스님의 범상치 않은 면모를 강조하는 장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일화는 아버지가 아기였던 균여 스님을 위해 ‘화엄경’을 읽을 때, 그 곁에서 세 살배기 수명도 이를 함께 들으며 자랐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남매는 어린시절부터 ‘화엄경’을 암송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레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접해왔던 셈이다. 특히 어린 수명이 객승의 ‘법화경’ 독경소리를 듣고 발심한 연유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통해 맺어온 불연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깊이 내재돼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심 깊은 집안에서 자라난 균여 스님은 15세가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한다. 60세 균여 스님을 낳았다는 모친이 75세, 누나 수명이 18세 무렵이다. 부친은 균여 스님이 10세가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돼 있으니, 노모와 누나만을 남겨두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그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으리라. 그러나 동생의 뜻을 확인한 누나 수명은 단호했다.


“집안은 내가 돌볼테니 아무런 걱정 말고 위없는 진리를 찾아 속히 떠나라. 공부가 무르익거든 내게도 가르침을 전해다오.”


고려여성의 지위가 조선시대에 비해 높았다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인 혼자 몸으로 노모를 봉양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명은 나약한 말로 동생의 뜻을 꺾기는커녕, 자유로운 구도자의 길로 접어설 수 있도록 독려했다. 만약 이때 균여 스님이 노모와 누나를 보살피기 위해 출가를 포기하거나 미뤘다면, 화엄의 고승도, 수많은 민중들의 가슴에 희망을 지폈던 ‘보현십원가’의 탄생도 불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누나의 격려에 힘입은 균여 스님은 앞서 출가한 사촌형을 따라 황해도 금천의 부흥사를 찾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만난 스승이 그의 기량을 알아보고 개성 영통사로 보낸다. 이 곳에서 그는 당대의 고승 의순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았다.


그러던 어느날 오랜 공부로 노모를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 균여 스님은 노모와 누나가 있는 집을 찾는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는 동시에 그동안 배우고 익힌 바를 누나에게 전하고 자 함이다.


어엿한 스님이 되어 돌아온 동생을 마주한 수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수명은 스님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마치자곧장 방으로 이끌어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균여 스님은 즉석에서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의 법문을 전하고 ‘신중경’과 ‘천수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수명이 이를 한번 듣고는 한자도 빠짐없이 외워 익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초저녁 균여 스님이 홀로 방에 앉아 ‘화엄육지의(華嚴六地義)’ 5백문답을 암송하는 것을 듣고 그 뜻을 즉시 깨쳤다. 5년 뒤 이를 확인하니 단 한 곳도 틀리거나 빠진 부분 없이 고스란히 암송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범상치 않은 수명의 총기는 물론이거니와 불법을 향한 그녀의 열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명은 오랜만에 집에 온 동생에게 그동안의 공부를 물어 청하고, 단 한번 설한 가르침을 즉시 깨쳤을 뿐 아니라 스님이 홀로 염송하는 것마저 배워 익혔다. 이러한 수명의 태도는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진리에 목말라 있었는지를 대변한다.


그녀는 동생을 불법의 길로 떠나보낸 뒤 홀로 집에 남아 노모를 봉양하며 길쌈과 농사일로 하루를 보내면서도 진리에 대한 열망만은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그녀이기에 마치 폭포수 같이 흘러나오는 균여 스님의 설법을 들으며 얼마나 환희심에 벅차했을지도 짐작할 수 있다. 단 한번 들은 경전을 5년 뒤에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겨 곱씹고 또 곱씹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수명이 경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균여 스님은 누나에게 “세치의 혀로” 경전을 강설했고, 어린시절 객승도 ‘법화경’ 독송을 통해 가르침을 전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수명은 아마도 한문을 익히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균여 스님이 ‘보현십원가’라는 우리말 노래(향가)에 불법을 담아 설하게 된 계기가 바로 누나 수명에게 있지 않을까. 어쩌면 스님은 글을 모르는 누나가 말로써 불법을 배우고 익혀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말 포교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향가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 성행했던 한국 고유의 정형시가로 당시 민중들이 즐겨 부르던 우리말 노래다. 향가로 만들어진 ‘보현십원가’는 곧 글을 모르는 민중들이 불법을 가까이 느끼고 바로 알도록 하기 위한 원력에 기인한다.


노모 봉양하며 동생 출가 독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향가에 대해 놀이를 위한 시문으로 치부하는 풍토가 있었다. 때문에 대각국사 의천 스님은 향가를 활용해 불법을 설한 균여 스님을 일컬어 “말이 글을 이루지 못했다”, “글을 그르쳤다”며 무시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균여 스님은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우리말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균여전’ 제7장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편에 ‘보현십원가’를 지은 스님의 의중이 드러나 있다.


“사뇌(향가)라는 것은 세상 사람이 놀며 즐기는 도구이며, 부처님에 대한 발원이란 보살 수행의 중추이다. 무릇 얕은 곳을 건너서야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비로소 먼곳에 이를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속된말(우리말)에 의지하지 않고는 널리 퍼진 인연의 길을 나타낼 수가 없다. 이에 가까이 있는 알기 쉬운 방편에 기탁해 멀리 있는 근원에 이르고자 11수의 거친 노래를 짓는다. 여러 사람이 보는 눈에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나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 부합하길 간절히 바란다. 글을 전하고 말귀를 지음은 무릇 세속 사람들의 선근(善根)이 생겨나기를 원하는 까닭이다.”


한번 들은 경전을 잊지 않고 단박에 깨치는 총명한 수명이라도, 이를 읽을 수 없고 듣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아마도 균여 스님은 자신의 누나가 독경을 통해 경전을 배워 통달한 것처럼, 민중들도 불법의 진수를 우리말로 익혀 즐겨 부름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랐을 것이다.


균여 스님의 누나 수명과 관련, ‘균여전’을 통해 명확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가  범상치 않은 총명함으로 경전에 통달한 여성이라는 것 정도다. 수명의 삶이나 결혼여부, 혹은 말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균여 스님이 출가했을 때 수명의 나이가 이미 18세였고 세월이 흘러 다시 집을 찾았을 때도 가정을 꾸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수명은 노모를 모시느라 혼기를 놓치고 결혼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초는 성리학이 정착하기 전이어서 여성의 결혼이 강요되지 않았고, 여성이라도 독신으로 살면서 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을 관리하는 것이 효행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일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결국 구도자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아버지가 읽어주는 ‘화엄경’을 듣고 자라 어린시절 ‘법화경’에 심취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동생 균여 스님이 설한 보현보살·관음보살 법문과 ‘천수경’, ‘신중경’을 거듭 되새기며 살아온 그녀였기에 출가한 모습을 상상하기에 무리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떠난 후, 홀로 노모를 봉양하고 집안을 지키느라 불법을 향한 강한 열망을 잠시 가슴 속에 품었다가, 늦게나마 깨달음을 향한 길을 떠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해인사 장경각 한 귀퉁이에 잠들어 있었던 여성불자 수명. 여성의 몸으로 당당하게 집안을 지켜나가면서도 불연의 끈을 놓지 않은 그녀의 일화는 천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현대의 불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