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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키질카르가(克孜尔尕哈)석굴과 쿠처고성

지극한 신심이 빚은 찬란한 벽화도
탐욕스런 약탈자에겐 금붙이일 뿐

 

▲키질카르가석굴은 쿠처국의 왕들이 조성하고 예배한 왕실 사원이었다. 지극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쿠처의 왕들은 석굴과 벽화를 조성하며 불보살상을 금으로 장엄했다. 그러나 화려하고 지극했던 그들의 신심은 약탈꾼들을 불러 모으는 빌미가 되어 석굴의 훼손을 가속화 시켰다.

 

 

쿠처에서의 일정은 숨 가쁘다. 오랜 역사의 도시인만큼 수많은 유적, 특히 불교 석굴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답사지였던 쿰투라석굴 외에도 키질카르가(克孜尔尕哈)석굴, 타이타이르(臺臺爾)석굴, 심심(森木塞姆)석굴, 마자르보하(瑪伯赫)석굴, 그리고 현재는 바이청(拜城)현에 속해있지만 옛 쿠처불교의 유적인 키질(克孜尔)석굴, 여기에 수바쉬(蘇巴什)사원, 쿠처고성 등이 모두 쿠처불교의 역사를 말해준다. 석굴의 수도 많지만 규모도 크고 조성된 기간도 길어 살펴볼 것들도 많다. 각 석굴의 예술성도 높으니 쿠처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도 여유를 부릴 틈은 없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의 발자취


사실 촉박한 일정만 아니라면 쿠처에서는 하루를 느긋하게 보낼 수 있다. 해가 늦게 뜨고 그만큼 또 늦게 지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9시가 다 돼야 해가 뜬다. 중국은 대륙에 걸쳐있는 넓은 국토의 규모에 걸맞지 않게 전국이 단일시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경을 기준으로 전국이 같은 시간으로 움직이다보니 쿠처 뿐 아니라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대부분 지역의 아침은 늘 컴컴한 새벽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겨울에는 아침9시가 되도록 해가 뜨지 않고 저녁에도 8시가 다 돼서야 해가진다. 여름엔 밤10시까지도 날이 밝다고 한다. 비슷한 경도상에 자리하고 있는 인도나 네팔 등에 비해 2시간 가량 빠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공공기관을 비롯해 상점, 심지어는 호텔의 조식도 9시부터 시작된다. 늘어지게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도 전혀 서두를 일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게으름이 익숙하지 않은 일행은 언제나처럼 걸음을 재촉한다. 다음 석굴로 이동하기 전 시내에 있는 쿠처고성을 잠시 살펴보고 가기로 했다.


3~4세기 무렵 쿠처는 그야말로 풍요로운 도시였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은 삼중으로 되어있다. 불사와 불탑이 천여개에 달한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에 종사하며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머리는 모두 목까지만 기른다. 왕이 사는 궁전은 마치 귀신이 쌓아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리으리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중국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진서(晉書)’에 묘사된 쿠처국의 단면만 보더라도 얼마나 장대한 왕국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한 쿠처국의 고성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고 하니, 그 화려한 역사의 단면을 느껴보자는 취지로 잠시 방향을 돌렸다.

 

 

▲고구려 유민이었던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였던 쿠처의 옛 고성. 지금은 그저 허물어진 흙담장같이 보일 뿐이다.

 


쿠처고성은 도시 외곽이 아닌 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허름한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 말라버린 수풀이 엉켜있는 사이로 ‘쿠처고성유지(龜玆故城遺址)’라는 초라한 팻말이 덩그러니 서있다. 그 너머 쿠처고성의 모습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성 벽은 조금 높은 흙무지 같거나 아니면 무너진 어느 시골집의 담장에 불과해 보인다. 그나마 온갖 쓰레기가 뒤섞여 악취를 풍기고 있으니 관광객은 고사하고 현지 주민들조차 고개를 돌릴 지경이다. 무너진 흙 성벽의 남루함에 초라한 팻말조차 무색할 정도다.


세월의 힘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귀신이 쌓아올린 듯 으리으리한 왕궁’을 감싸고 있던 장려한 성벽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변할 줄이야. 여름철 뙤약볕 아래서 힘없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하릴없이 무너져버린 성벽이 더욱 애틋한 것은 쿠처고성에 서려있는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그림자 때문이다.


고선지 장군은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까닭에 그리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실크로드사를 거론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실크로드 문명기행’을 집필한 정수일 교수는 고선지 장군을 가리켜 ‘명실상부한 파미르의 주인’이라 칭하며 “고선지가 이끈 다섯 차례의 서역원정으로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의 항당세력이 제거되었고, 이 지역에 대한 당의 경영권이 확보됨으로써 고선지는 대당 건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극찬이 뒤따르는 고선지 장군은 누구일까.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한 후 군인으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티베트가 세력을 확장하자 당의 군대를 이끌고 서역 원정에 나서 파키스탄을 비롯해 서역에 흩어져 있던 72개 나라의 항복을 받았다. 사마르칸트, 타슈켄드 등도 점령했다. 명실상부한 당나라의 실크로드 장악이 이뤄진 것이다. 실크로드를 호령했던 고선지 장군의 원정대가 서역으로 출발한 곳이 바로 이곳 쿠처다. 쿠처는 그의 근거지였으며 원정과 개선의 무대였다. 고선지 장군은 751년 이슬람 군대에 맞서 탈라스에서 처절한 싸움을 벌였지만 아쉽게 패배했다. 그의 서역원정에 있어 첫 패배였다. 이때도 그는 쿠처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반격을 꾀했다. 그러나 반격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 등으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고선지 장군마저 모함으로 참수당하게 된다. 이와 함께 실크로드에 대한 장악력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고선지 장군의 발자국이 사라짐과 함께 실크로드도 빛을 잃은 셈이다.


2천년된 봉화가 버티고 있는 길

 

 

▲사막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봉화대. 쿠처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벌써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다. 그러니 이 낡고 무너진 성벽에서 고구려의 후예, 한민족의 피가 흐르던 고선지 장군의 자취를 찾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래도 자꾸 눈길이 머무는 것은 아마도 같은 핏줄이 주는 묵직함 때문 아닐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목적지인 키질카르가석굴로 발길을 재촉한다. 산도, 풀도, 나무도 없는 막막한 사막의 반복이다. 단조로운 풍경, 그 지루함을 깨는 기둥 하나가 사막 가운데 불쑥 솟아있다. 봉화대다. 봉화대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도대체 무엇에 쓰는 기둥인지 조차 알 수 없겠다. 지금은 도로변으로 바뀌었지만 그 옛날이라면 영락없이 사막이었을 허허 벌판 한 가운데 봉화대라니. 산봉우리 위에 있는 줄만 알았던 봉화대를 사막 한가운데서 만나니 좀 어색하다. 이 봉화대는 한나라 시대의 유적이다. 역사가 족히 2000년은 되었을 터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높이만도 13.5m다.  늙은 봉화대 치고는 제법 장골에 건장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다. 덕분에 이 봉화대는 쿠처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앞서 답사한 쿰투라석굴의 ‘쿰투라’라는 이름 역시 ‘사막 가운데의 봉화대’라는 뜻. 바로 이 봉화대를 일컬음이다. 쿠처를 소개하는 책자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꽤나 유명한 봉화대를 만난 셈이다.


날아갈 듯 가벼운 비천의 발놀림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키질카르가석굴이니 여기서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키질카르가석굴은 쿠처의 왕들이 조성하고 예배한 석굴이다. 그 화려함도 극치를 이뤘다. 벽화에는 수많은 금이 칠해졌다. 특히 불보살상에는 아낌없이 금을 입혔다. 그러나 그 정성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이교도와 도굴꾼들은 금을 떼어가기 위해 불보살상에 칼질을 했다. 남은 상처는 처참하다. 벽화를 훼손하기 위해 이슬람교도들이 피운 그을음이나 통째로 떼어간 약탈꾼들의 흔적보다 더 잔혹한 흉터다. 홍수도 키질카르가석굴 훼손의 주범 가운데 하나다. 사막에서 웬 홍수냐 싶겠지만 쿠처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강이 범람하면 석굴은 눈 깜빡할 사이 물에 잠긴다고 한다.


문이 열린 석굴 안에는 도난과 훼불, 홍수를 이겨낸 벽화와 석실들이 지난 천여년 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머리를 길러 평민들과 외모를 구분했던 쿠처의 귀족들. 지극한 귀의와 신심의 마음을 담아 금빛으로 조성했던, 그러나 이제는 금을 뜯기고 남은 흔적으로만 알아볼 수 있는 불보살상들. 16호 굴에는 ‘1968’ ‘1939’ 등 낙서도 수두룩하다. 20세기 이곳을 찾아왔던 탐험대, 혹은 약탈꾼들이 남긴 이 낙서들은 근대 들어 쿠처의 석굴들이 당했던 굴욕의 흔적이다.

 

 

▲키질카르가석굴 30호굴의 비천상 벽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생생한 비천의 자태와 달리 천상을 수 놓았던 보석과 꽃은 금을 뜯어가려는 약탈꾼들에 의해 모두 훼손 당했다. 사진 출처=‘신장석굴의 예술’

 


유독 눈길을 끄는 석굴은 30호 굴이다. “키질카르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이라는 안내인의 설명답게 벽화가 단박에 시선을 휘어 잡는다. 후실 천장에 남아있는 비천상은 금방이라도 옷깃을 휘날리며 날아갈 듯 우아하다. 발을 땅에 딛을 필요가 없는 비천들의 다리는 부는 바람 위에 얹어 놓은 듯 자유자재로 하늘거린다. 각각의 비천들은 비파, 하프, 피리 등의 악기를 손에 들고 끝이 없는 천상의 노래를 지금도 연주하고 있는 듯하다. 온통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는 배경과 점점이 새겨진 보석, 그리고 천상의 꽃들은 그들이 지금 날고 있는 곳이 바로 극락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금빛으로 빛나야 할 천상의 보석들은 모두 벗겨져 점점이 검은 흙빛으로 남아있다. 미소를 머금었을 비천들의 얼굴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돼 있다.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된 27·28호 승방굴도 흥미롭다. 화려한 벽화나 장식 대신 석굴의 벽을 깎아 만든 침상과 벽난로, 그리고 책장 등이 남아있다. 넓은 창문도 예배용 석굴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곳에서 벽난로에 불을 지펴 차를 끓이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책장에 꽂아 두었던 경전을 꺼내 읽으며, 딱딱한 침상도 마다 않은 채 수행했을 스님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키질카르가에는 모두 61개의 석굴이 있지만 벽화가 남아있는 석굴은 11개에 불과하다. 그만큼 훼손이 심했다. 그런 역사의 보상인가. 일행을 안내해준 키질카르가석굴 관리인 러허만씨는 중국의 유명인사라고 한다. ‘중국민을 감동 시킨 10인’에 뽑히기도 했던 러허만씨는 지난 18년간 키질카르가석굴을 보호하고 규정을 엄격히 적용해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공로로 중국 정부로부터 상도 받았다. 15억 중국인 가운데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니 그가 키질카르가석굴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된다. 늦게나마 이 석굴이 알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니 다행이다. 다만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살펴보는 러허만씨의 눈길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관광객들이 키질카르가석굴을 보러 올 때가 가장 즐겁다”는 러허만씨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니 그가 오래오래 이 석굴을 보호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사람이야말로 이 삭막한 사막의 희망 아닌가.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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