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에 들뜨거나 비난에 풀죽지 말라
칭찬에 들뜨거나 비난에 풀죽지 말라
  • 성재헌
  • 승인 2012.06.27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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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잘난놈으로 착각하거나
못난놈으로 자책하지 말아야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특별한 일 없이 사람을 만나면, 그것도 여럿이 만나다보면 참 말이 궁해진다. 그럴 때 무료한 시간을 때울 거리로 가장 많이 선택되는 게 남이야기다.


“A가 B랑 싸웠데.”
“누가 잘못한 거야?”
“A가 잘못했지.”
“아냐, B가 잘못한 거야.”


툭하니 던진 말에도 남이야기에는 너도 나도 쉽게 한마디씩 보탠다. 이럴 때, 참여자는 대략 A를 옹호하는 사람, B를 옹호하는 사람, 중간에서 심판 보는 사람의 세 부류로 나뉜다.


“A가 ~라고 말한 건 큰 실수야.”
“B가 ~라고 한건 잘한 짓이고?”
“둘 다 똑같지, 뭐.”


나름 치열한 변론과 어쭙잖은 판결의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하면, 참여자들은 각자 자기발언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온갖 증거들을 제시한다. 해서 A나 B와 관련된 이야기면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은 물론이고 ‘누가 ~라고 하더라’는 소문까지 끌어들여 열변을 토한다. 그러다보면 ‘A와 B의 다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A와 B의 인성’을 평가하는 자리로 탈바꿈한다.


“A, 그 사람 영 못쓰겠네.”
“B, 그 사람 참 훌륭하네.”


이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다보면 ‘나도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 도마 위 생선취급을 당하겠지’ 하는 생각에 두려워진다. 개인사까지 들먹이며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 참으로 삼가야 할 일이다. 왜 삼가야 할까? 누군가를 평가할 만큼 우리는 그 누군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이 있다. 이름과 실상이 꼭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소문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아마 비슷한 의미일 게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특별히 칭찬할 때 아주 간간히 ‘명실상부하다’는 말이 사용되는 걸 보면, 명실상부한 경우보다 명실상부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즉 실상은 소문대로인 경우보다 소문과 다른 경우가 더 많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생겼겠나. 그러니 직접 경험하지도 않고 남의 말만 듣고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해서야 되겠는가?


또, 직접 보고 직접 들었다 해도 누군가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것은 그 사람의 지극히 부분적인 단면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내리는 평가는 그 사람의 전반적인 삶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늘그막까지 곁에서 지켜본 것도 아니고,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디오 들고 쫓아다니며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파악한 것도 아니니, 그의 삶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보면 그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고, 여기저기서 늘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포도를 “새콤달콤하다”고 평한다. 직접 포도밭에 가서 알이 맺히기 시작하는 늦봄부터 포도를 따먹어보라. 새콤달콤한 시기는 떫고 시큼한 시기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또, 누군가를 오랜 기간 곁에서 직접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나’와 ‘그’라는 특별한 인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순간이라도 ‘너’에게는 ‘그’가 달리 경험된다.


마치 하나의 달이지만 서울에 뜬 달은 구름에 어린 수줍은 달이고, 부산에 뜬 달은 드넓은 창해의 화창한 달인 것과도 같다. 허나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땐 자기의 경험치가 타인에게서도 고스란히 재생될 것처럼 착각한다.


상대적이고 특수한 현상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로 규정하고 강요하는 것, 그건 독단이고 오만이다. 이런 오류들을 모두 극복하고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짐 지운채로 세워놓고 점검해도
앙산은 땀 훔치고 싱긋 웃을 뿐


내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그나마 조심조심 삼가면 된다. 그럼, 누군가 나를 평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앙산록(仰山錄)’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볕 좋은 가을날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마당에 쌓인 볏단을 둘러보던 위산 스님이 앙산과 마주쳤다. 나락을 잔뜩 짊어지고 문을 들어서는 앙산에게 위산 스님이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느냐?”


나락을 지고 오는 걸 뻔히 보고도 묻다니, 참 생뚱맞은 질문이다. 허나 본지(本地)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일거수일투족에서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이 스승의 본분이고, 스승의 뜻을 간판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리까지 챙기는 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앙산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하였다.


“논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나락은 잘 베었느냐?”
“네, 잘 베었습니다.”


나락을 짊어진 채 땀을 뻘뻘 흘리는 제자를 마당 한가운데 세워놓고 위산 스님은 천천히 말씀을 이어갔다.


“자네가 지고 온 나락은 퍼런가, 누런가, 퍼러면서 누런가, 퍼렇지도 않고 누렇지도 않은가?”
나락이 꽤나 무거웠나보다. 앙산은 뚱하니 맞받았다.
“스님 등 뒤에 있는 건 뭡니까?”
그러자 위산 스님은 ‘옳거니 요놈’ 하는 표정으로 두 팔을 활짝 펼쳐 볏단을 가렸다.
“보았는가?”


더 이상 왈가왈부하기가 싫었나보다. 앙산은 휙 하고 위산 스님을 지나쳐 볏단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고는 벼이삭 한 줄기를 집어 들고 씽긋이 웃으며 위산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어찌 이것을 물으셨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얽힌 사회이니, 숱한 평가들을 듣는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다. 나의 행위는 누군가에겐 마땅하고 누군가에겐 못마땅할 게 뻔하다.


하지만 이럴 때, 행여 칭찬과 부러움에 들뜨거나 비난과 꾸짖음에 풀죽지는 말아야 하리라. 귀머거리처럼 독불장군처럼 남들의 평을 아예 무시하고 살아서야 안 되겠지만, 무척이나 잘난 놈으로 착각하거나 무척이나 못난 놈으로 자책하지는 말아야 하리라. 속된 말로, 내가 그들을 알면 얼마나 알고 그들이 나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한발 더 나아가 앙산처럼 담담하게 말하며 싱긋이 웃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게다.
“그들이 어찌 나에 대해 이야기했겠습니까.”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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