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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마지막 구법승 만공 스님(1388~1463)

1417년 7월4일 실록에 등장
중국구법 금지에도 순례강행
명나라 황제도 고승으로 인정
75세까지 대중교화하다 입적

▲중국 산동성 태안시 태산 기슭에 위치한 보조사를 중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져 있는 만공선사탑비.

1417년 7월4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공조판서 신개의 급보에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신개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 승려 11명이 몰래 북경에 들어가 명 황제를 알현했고, 성조(영락제, 1360~1424)는 이들을 남경의 사찰로 보내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에 태종(1367~1422)은 물론 조정대신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치밀한 폐불 정책으로 승려와 사찰 수를 대폭 줄였고, 승려들의 중국 구법 순례도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선의 승려가 중국으로 건너갔고, 또 이들이 명의 황제를 만날 때까지 그 누구도 몰랐다는 사실에 조선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태종은 즉각 그 승려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것을 지시했지만 그들에 대한 행적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드러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1995년,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34)’에 기록된 이 스님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됐다. 동아시아 불교 교류사를 연구해 온 조영록 동국대 명예교수가 중국 산동성 태안시 태안 기슭에 위치한 보조선사(普照禪寺)라는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 만공선사탑비문을 해독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이 스님들의 행적이 비로소 밝혀졌다.


만공선사탑비문은 당송시대부터 존속해 오던 보조선사가 전쟁과 화재로 소실되자, 만공 스님이 다시 중창했음을 기록한 것으로, 여기에는 스님의 행장이 간략히 소개돼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문 속에는 “운공만공선사(雲公滿空禪師)가 몇몇 승려를 이끌고 영락연간(명나라 성조의 연호)에 바다를 건너와 경사(京師, 북경의 옛 이름)에서 성조를 알현했고, 이후 남경 천계사(天界寺)로 보내져 주좌(主坐)가 됐다”고 씌어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만공 스님은 고려 우왕 14년(1388)에 태어났다. 어려서 출가한 스님은 불교교학과 수행에 두루 밝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만공 스님은 중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여러 조사들을 친견하겠다는 발원을 세웠다. 그러나 스님들의 구법순례를 국법으로 엄히 다스렸던 조선 초의 상황에서 중국 구법 순례는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만공 스님의 구법 원력은 꺾이지 않았고, 1417년 자신을 따르던 제자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행을 결행했다. 구법을 끝내고 돌아온다 해도 신라·고려시대처럼 국사가 된다거나 큰 스님으로 존경받는 일도 없는 그 길에 만공 스님은 목숨을 걸었던 셈이다.


만공 스님은 육로가 아닌 해로를 선택했다. 육로는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비교적 안전했지만, 국경을 지키는 경비가 삼엄했을 뿐 아니라 국경을 넘는다 해도 조선의 범죄자나 첩자로 오인돼 붙잡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만공 스님이 중국행을 결행하기 두 달 전인 윤5월 갑자일(5월9일, 태종실록 12)에도 요동으로 건너간 승려가 명의 군사에 붙잡혀 압송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몇날 며칠 목숨을 건 긴 여정 끝에 비로소 명에 들어간 만공 스님 일행은 당시 조선 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명 황제 성조를 만날 수 있었다. 불심이 깊었던 성조는 만공 스님의 법력을 알아채고 그 자리에서 직접 금란가사를 전해주면서 자신이 직접 중창한 남경의 천계사로 가서 오늘날 조실 격에 해당하는 ‘주좌’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성조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만공 스님은 성조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년간 천계사에 주석하며 불법을 널리 전했다.


1428년 천계사를 나온 만공 스님은 처음 구법순례를 발원했던 대로 중국 방방곡곡의 명산대찰을 일일이 돌아봤다. 15년간의 순례를 마치고 55세 되던 해 태산에 들른 만공 스님은 당시 폐허가 돼 있던 보조선사를 중창했고, 이곳에서 20년간 불사를 진행하면서 대중교화에 힘쓰기도 했다. 그리고 1463년 만공 스님은 이역만리 먼 땅에서 75세의 일기로 입적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이 “사람의 발꿈치를 좇아 부산하게 왕래했다(繼踵憧憧)”고 표현할 만큼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왕성하게 이어졌던 구법승들. 하지만 그 길고 험난한 여정은 조선 초 만공 스님을 끝으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400여년 뒤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린 뒤에야 스님들의 구법행렬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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