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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천추태후

불심 기반으로 ‘강한 고려’ 일궈낸 여성정치가

왕건의 손녀이자 경종 아내
목종의 모후로 집권기 섭정  

 

 

 

 

1009년 2월, 고려의 수도 개경. 남녀 한 쌍이 말 두필에 의지해 급히 성문을 나섰다. 모자(母子)지간인 이들은 오랜 시간 정신없이 말을 달려오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서른살 가량의 아들은 병색이 완연했다. 그럼에도 범상치 않은 옷차림은 이들이 고귀한 신분임을 한눈에 드러냈다. 말을 끌거나 앞뒤로 따르며 보필하는 이는 없었다. 오직 서로를 의지해 말을 달릴 뿐이다. 배고픔에 지치면 옷을 벗어 팔거나 구걸해 음식을 마련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아들이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은 더없이 극진했다. 음식을 마련하면 어머니께 먼저 올린 후 남은 음식을 먹었고 피로로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면 직접 말고삐를 손에 쥐고 이끄는 등 성심으로 보필했다.


이는 역사에 기록된 고려 7대왕 목종과 모후 천추태후의 마지막 모습이다. 목종이 즉위한지 꼭 12년째 되는 해의 어느 날, 이들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쫓기듯 궁궐을 떠나야 했다.


사건이 벌어졌던 그날, 목종은 한가로이 궁궐을 거닐며 관등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병환 때문이기도 했지만, 왕이 된 순간부터 섭정자로 함께해 온 어머니 천추태후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천추태후가 연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으로 목종의 후사를 이으려 한다는 소식이 궐내에 파다하게 퍼진 것이 이유였다.


유학을 신봉하는 일부 신하들에게 혼외 자식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천추태후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왕위의 부계(父系)승계 전통을 거스를 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목종에게 상소를 올리며 “왕위를 모계로 계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간언했다.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시도는 고려왕조의 성씨를 바꿔버리는 엄청난 일이었다.


더욱이 목종이 후사를 이을 자식을 보지 못하고 병이 들자, 궐내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서서히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학자들이 염두에 둔 후계자는 바로 천추태후의 친동생 헌정왕후의 아들 대량원군으로, 천추태후에 의해 신혈사에 유배돼 있었다. 대량원군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친언니 천추태후와 함께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손녀로 경종에게 나란히 시집을 갔다. 경종이 죽은 후에는 숙부인 왕욱(안종)과의 사이에서 대량원군을 낳았는데 왕욱은 바로 왕건의 아들로, 곧 대량원군은 태조 왕건의 유일한 혈통인 셈이다.


목종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그는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궁궐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천추태후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명망 높은 세력가였던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상경을 호위토록 명한다. 사실상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결정한 셈이다.


이에 왕명을 받든 강조는 500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궁궐로 향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조는 목종이 이미 죽었다는 헛소문을 전해 듣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을 견제한 천추태후의 함정이라 오판하게 된다. 고민하던 강조는 “왕권 안정을 위해서는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고 궁궐로 전진한다. 평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강조의 군대는 반역을 꾀한 모양새가 되어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강조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궁궐에 들이닥쳐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고려 제8대 왕으로 추대한다. 강조는 천추태후의 심복이자 연인관계에 있던 김치양을 찾아내 처단했으며, 천추태후가 후대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어린 아들도 가차 없이 죽임을 당했다. 천추태후를 보필하던 무리와 이들을 돕던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궁궐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이른바 ‘강조의 난’이다.


이 사건으로 목종과 천추태후는 목숨만을 간신히 건진 채 일개 양민의 신분으로 전락해 궐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목종은 유배길에 강조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고,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먼저 죽은 아들 셋을 가슴에 묻은 채 본인의 고향 황주로 떠나가 22년 뒤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목종의 어머니이자 태조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시대 초, 여성으로는 유례없이 천하를 호령했던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후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남자에 빠져 권력을 탐한 음탕한 여인’이라는 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녀가 ‘고려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도 근래의 일이다.


부정적 평가의 가장 큰 원인은 호족세력에 기반한 그녀의 정치세력과 권력욕에 기인한다. 그녀는 아들 목종이 1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왕이 됐음에도 스스로 섭정자가 되어 정치의 전면에 나섰고, 김치양과의 사이에 낳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후계자로 추대하려 했다. 후대 성리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평가한 유학자들에게 여성으로서 천추태후가 보여준 이같은 행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시 불교로 대변되는 호족세력을 정치기반으로 삼아 신라계 유학파 귀족들과 극단적인 대치점에 서 있었다.


천추태후의 남편이자 고려 5대왕이었던 경종이 죽었을 때, 그녀의 아들 목종은 불과 2세에 불과했다. 어린 목종을 대신해 천추태후의 오빠 성종이 고려 6대왕으로 등극했는데, 그는 유학에 깊이 심취해 신라계 유학파 귀족들을 중용하고 유학식 의례를 도입하는 등 유학 중심의 정책을 펼쳤다. 팔관회와 연등회 등 전통적인 불교행사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후, 7대왕 목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고려왕실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었다. 섭정자로 나선 천추태후는 오빠와 달리 황주의 호족세력인 외가를 정치기반으로 하여 불교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의 전면으로 나선 그녀는 팔관회와 연등회를 되살리고, 신라계 유학파 귀족 대신 황주 황보씨 계열의 서경 호족세력 등 불교세력을 중용했다. 자연히 유학자들은 정치의 중심에서 세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천추태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목종 2년에 천추태후의 원찰 진관사가, 3년에는 목종의 원찰이 잇따라 창건됐다. 목종이 즉위하자마자 천추태후의 불교 홍포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불교 숭상해 유학세력과 대치
후대 성리학 관점서 비판받아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49회(會) 120권으로 이뤄진 ‘대보적경’을 금(金)으로 사경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보적경’ 금자 사경 가운데 전해지는 32권의 발문에 “보살계 제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이를 사경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어 이들의 깊은 신앙을 대변한다.


특히 천추태후가 외가인 황주의 호족세력과 깊이 연계하며 황주를 기반으로 했던 균여 스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천추태후의 원찰 진관사가 화엄사찰이었고, 그녀가 사경한 ‘대보적경’의 교정을 화엄승려가 담당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천추태후의 적극적인 불교 숭상으로 말미암아, 목종 집권기에 신라계 귀족들은 권력에서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곧 신라계 유학파 귀족들이 기득권 싸움에서 힘을 완전히 잃은 채 물러나야 함을 의미했다.


유학자들이 태조 왕건의 부계혈통을 내세워 대량원군(현종)에게 힘을 실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량원군 역시 애초부터 왕이 될 결심을 하고 신라계 유학파 귀족 세력과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기반을 형성해 왔다.


이같은 사실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 남겨진 천추태후에 대한 기록들이 극히 부정적인 이유와도 직결된다. 그녀는 불교를 숭상하며 유학 세력과 대치했을 뿐 아니라 여성의 몸으로 정치의 전면에 나서 권력을 쥐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관점에서 천추태후는 이미 그 자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록 가운데 “천추태후가 큰아들 목종을 폐위시키고 김치양과 불륜으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려 난을 일으켰다”는 부분은 후대의 왜곡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역대왕대의 기록이 모두 사라져 다시 집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현종대 집권세력인 신라계 유학파들이 재기록하는 과정에서 천추태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악의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천추태후는 ‘고려사’의 기록대로 병이 깊은 목종을 굳이 강제 폐위시킬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김치양과의 사이에 난 자식을 후계자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목종의 결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강조의 난으로 목종이 폐위돼 천추태후와 함께 유배길에 올랐다는 점을 살펴보면 역사적 기록의 왜곡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또 한 가지, 천추태후의 정치적 행보가 과연 후대의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과도한 권력욕에만 기반하고 있는지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천추태후는 17세에 경종의 아들을 낳았지만, 경종이 2년 뒤 26세의 나이로 요절함에 따라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됐다. 뿐만 아니라 오빠 성종이 왕이 되면서 두 살배기 핏덩어리 자식과 생이별하고, 대궐밖 유암산 기슭의 ‘숭덕궁’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설혹 성종에게 아들이라도 생기면 그녀와 어린 아들을 향한 견제나 위협이 심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같은 그녀의 삶으로 미루어 볼 때, 궁궐 밖에서 지난한 외로움과 싸우던 천추태후가 아들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권력의 쟁취를 고민해 왔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후반기에 목종이 후계자로 정해진 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권력의 중심에서 아들과 함께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목종이 남색을 즐겨 후사가 없었다는 점은 천추태후의 또 다른 고민이었을 것이다. 대량원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고려의 집권세력은 또다시 바뀔 것이고, 김치양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음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차라리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면 굳건한 권력이야 말로 소중한 이들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천추태후가 강한 고려를 꿈꾸며 북방의 국경지대에 쌓은 성벽이 거란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 온 것처럼, 그녀의 권력의지는 어쩌면 소중한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숱한 고난 속에서, 평생을 믿고 따른 부처님의 가르침은 외로운 여성정치가의 마음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구심점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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