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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래의 위력

음악으로 교화하고 향가로 세상을 다스리다

대안·원효스님 춤추고 노래하며 설법
국왕·화랑 노래로 천지귀신도 움직여
사뇌가·서동요·도천수대비가 등 전래

 

 

▲악기를 연주하는 신라시대 토우. 가야금을 타는 악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 사람들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래가 유행했다. 젊은 화랑도는 상열가악(相悅歌樂)했다. 화랑도가 노래와 음악을 즐기고 있던 당시 신라사회에는 음악으로 업을 삼는 자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역대의 왕들 중에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경우가 많았고, 국왕이 노래를 지은 경우도 있다. 원성왕은 신공(身空)사뇌가를 지었고, 흥덕왕은 죽은 앵무새를 위하여 노래를 지었다.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의 화랑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을 돕고자 하는 생각으로 노래 3수를 지어 경문왕에게 바치기도 했다. 신라 48대왕 경문왕은 화랑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던 왕이다. 화랑도가 노래와 음악을 즐겼으니 가법성행(歌法盛行)한 것은 당연했다. 승려도 노래를 불렀다.


노래로 소문을 퍼뜨리고 어떤 여론을 형성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진흥왕은 처음 남모(南毛)와 교정(貞) 등 두 낭자를 원화(原花)로 선발했다. 무리들이 300~400명이나 모여들었다. 이것이 화랑의 전신인 원화였다. 그런데 두 원화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했다. 그래서 그는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가 간 곳을 알지 모하는 무리들은 슬피 울면서 흩어졌다.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지어서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 노래는 쉽게 퍼졌고, 남모의 무리들은 이 노래를 듣고 남모의 시체를 북천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이에 그들은 교정을 죽였다. 국왕은 원화제도를 폐지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는 아름다웠다. 이 소문은 멀리 백제에까지 퍼졌다. 서동(薯童)도 이 소문을 들었다. 그는 국경을 넘어 신라의 서울로 왔다. 그는 신라에서도 마를 캐서 동네에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이 친해져서 그를 따르게 되었을 때, 그는 동요를 지어 그것을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사귀어 두고
서동의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노래는 순식간에 퍼졌고, 공주가 남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불미스러운 소문은 궁중에까지 전해졌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함에 결국 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게 되었다. 공주가 귀양 살 곳으로 가고 있을 때 서동이 도중에 나와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노래의 전파력은 강하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노래를 중론 형성에 활용하기도 했고, 어떤 소문을 퍼뜨려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려 할 때도 노래를 이용했던 것이다.


소문은 바람처럼 퍼진다. 여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되면 무쇠도 녹는다. 그야말로 중구삭금(衆口金)이다.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바다의 용이 나와서 순정공의 부인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바다로 끌고 가버렸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남편에게 한 노인이 말했다.


“옛 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 쇠도 녹인다고 했습니다. 바다 속에 사는 용이라고 어찌하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남편 순정공은 주위 사람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해신(海神)아, 해신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 앗아간 죄 얼마나 클까./
네 만약 거슬러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겠다.’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서 바쳤다. 노인의 말은 맞았다. 바다 속의 용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기에….


신라의 승려들 중에는 대중교화를 위해 노래를 이용한 경우가 있었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대중을 교화했던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면서 대중을 교화했던 가장 유명한 이는 역시 원효다. 그는 광대들이 갖고 노는 모양이 괴이한 큰 박을 우연히 얻은 적이 있다. 그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무애(無碍)라고 이름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이는 ‘화엄경’의 게송이다. 원효는 이 구절의 의미를 재발견했고, 이로부터 무애라는 용어를 취했었다. 무애의 춤과 무애의 노래, 그 노래는 큰 법문이었다. 무애하라. 집착하지 말라. 그 어디에도. 부처님은 말씀했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게 되며, 초월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다.”


무애를 노래한 원효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원효는 이 고을 저 고을 많은 마을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했다. 그래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


대안(大安)이라는 스님도 역시 그랬다. 그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서 언제나 거리를 다니면서 동(銅)으로 만든 바루를 두드리며 노래했다. “대안(大安), 대안”이라고.


“크게 편안하라. 크게 편안하라.”

 

 

▲가야금을 들고 있는 악사(가운데). 비파를 연주하는 악사(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언제나 작은 절에 살면서 미친 듯이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스님이 또 한 사람 있었다. 곧 혜공(惠空)이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교리로 설법하는 것은 어렵다. 노래는 즐겁다. 그리고 친근하며 쉽다.
노래로서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서 향가를 지은 스님도 있었다. 고려 초의 균여(均如)는 향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를 지었다. 이 노래는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졌고, 담 벽에도 씌어져 두루 읽혔다. 3년 동안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던 나필(那必)이라는 사람은 균여가 전해 준 보현십원가를 항상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필을 향해 하늘에서 외쳐 말했다.


“너는 대성(大聖)의 노래 덕택으로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다.”


그 후 그 병은 즉시 나았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즐겼다. 그들은 향가나 음악이 능히 천지귀신(天地鬼神)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음악이 갖고 있는 주술적이고 마력적인 힘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향가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진평왕 때다. 거열랑(居烈郞)을 비롯한 세 화랑이 낭도들과 함께 풍악산으로 가려했는데 혜성이 나타나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그들은 여행을 중지하려 했다. 이때 승려 융천(融天)이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이 사라졌다. 국왕은 기뻐하면서 화랑도를 풍악산으로 보냈다.


사천왕사의 월명(月明) 스님은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달 밝은 밤 월명은 사천왕사 문 앞의 큰 길을 피리를 불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달이 그를 위해 멈추어 떠 있었다. 이로 해서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하늘의 달까지도 그의 피리 소리를 듣기 위해 서쪽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는 이미 음악이 천지와 더불어 통한다는 생각이 묻어 있다. 월명은 향가 또한 잘 지었다. 경덕왕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 왕이 근심하며 월명에게 기도를 청했다. 그러나 월명은 염불 대신 향가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곧 두 해가 나타났던 괴변이 사라졌다. 그는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릴 때도 향가를 지어서 제사 지냈다. 그가 원왕생가(願往生歌)를 지어 부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경덕왕 때의 희명(希明)이라는 여자, 그의 다섯 살 어린 아이가 눈이 멀었다. 어느 날 그는 아이를 안고 분황사의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으로 갔다. 노래를 지어서 아리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당신은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졌다고 하니, 그 중 하나의 눈이라도 나누어달라는 내용의 향가였다. 흔히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는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천지귀신을 감동시킨 향가 이야기는 계속된다. 산적을 감화시킨 영재(永才)의 우적가, 처용이 노래하니 역신(疫神)이 물러갔다는 처용가, 신충이 노래하니 잣나무가 말랐다는 원가 등이 모두 그렇다. 이처럼 신라인들은 향가나 음악은 능히 천지귀신(天地鬼神)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과 노래에는 마력적인 힘과 신비가 있다. 사람을 도취하게 한다. 음악은 신나고, 신바람이 나고, 신명이 나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이 음악이 갖고 있는 주술적이고 마력적인 힘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음악관이 단순히 주술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유가의 정치이념인 예악사상(禮樂思想)을 이해하고 있었다. 음악을 통해 정서와 덕성을 함양하려 했던 화랑도의 수행 방법은 주목할 만하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표출인 동시에 인간의 심정에 감동을 주는 것이다. 사실 사람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바꾸는데, 음악만큼 큰 것이 없다. 화랑도의 음악적 인생관은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였다. 음악은 천지간(天地間)의 화기(和氣)고, 그 기능은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김상현 교수
케이팝이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 가수들의 노래에 열광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케이팝은 즐겁고 신난다고. 케이팝은 멀리 천 년 전 신라의 풍류도(風流道)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화랑들이 추구하던 도는 풍류도였고, 풍류는 곧 음악이기에.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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