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바쉬(蘇巴什)사원과 키질(克孜尔)석굴
4. 수바쉬(蘇巴什)사원과 키질(克孜尔)석굴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07.0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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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경승의 고향서 옛 사람의 소리와 만나다

 

▲키질석굴 입구. 쿠처에서 태어나 수많은 경전을 역경, 중국 대승불교의 시대를 연 구마라습 스님의 청동좌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옛 사람들의 기록은 때때로 후대인들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특히 역사의 흔적을 찾는 답사 길에서 옛 기록과의 대조는 필수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옛 모습을 잃어버린 유적에서조차 한참을 서성이게 되는 이유도 옛 발자취 한 자락 때문이다.


쿠처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지점, 쿠얼러강 기슭에 남아있는 수바쉬사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강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있는 수바쉬(蘇巴什)사원 유적은 황폐하다. 무너진 흙담만 즐비한 이 유적이 본래 사원이었는지, 어느 왕조의 궁궐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고대 도시의 한 귀퉁이였는지를 가늠키란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곳을 사원이라 하고, 누군가는 고성이라 한다. 고대의 어느 도시 같은 이 유적은 그러나 분명 거대한 사원이었다. 7세기 중국의 구법승 현장 스님이 남긴 ‘대당서역기’가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황폐한 성의 북쪽으로 40여 리를 가면 산기슭을 접하고 있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가람이 있다. 똑같이 소호리라고 하지만 동서의 위치에 따라서 각각 동·서 소호리라고 불린다. 불상의 장엄은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승도들은 청정하며 참으로 부지런히 정진한다. 동소호리 불당에는 옥석이 있는데, 면적은 2척쯤 되며 황백색을 띠고 있어 마치 대합조개와 같은 모습이다. 그 위에는 부처님의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데 길이는 8촌이고 너비는 약 6촌이다. 재일(齋日)에는 등불을 밝히기도 한다.…’


수바쉬사원에 대한 묘사다. 현장 스님은 ‘굴지국(屈支國)’이라는 이름으로 쿠처를 소개고 있는데 당시 100여 개의 사찰과 5000여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현장 스님은 쿠처국의 사원과 신행 형태 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유독 수바쉬사원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감탄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장 스님이 이곳 수바쉬사원에 머물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수바쉬사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능산(凌山. 톈산산맥의 주봉)의 눈길이 트이지 않아 출발 못하고 60여일을 머물며 관광도 했다’고 하니 그 동안 수바쉬사원에도 걸음 했을 것이라 추정해볼 뿐이다.


고대의 도시 같이 거대한 사원

 

 

▲수바쉬사원 전경. 쿠얼러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두 개의 사원터가 남아 있다. 7세기 초 이곳을 방문한 현장 스님은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며 사원의 장엄함을 찬탄했다. 그러나 지금은 허물어진 담장 뿐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가람이 있다’는 현장 스님의 기록은 정확하다. 스님이 서역으로 구법의 길을 떠난 것이 629년이니 이곳에 도달한 것도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14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산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다만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했던 불상은 지금 흔적도 없다. ‘대합조개와 같은 모습’의 옥석도, 재일에 등불을 밝히는 사람도 없다. 불상이 봉안돼 있었을 감실은 허물어진 담장 한쪽 벽에 흔적으로만 남아있고 어디가 법당이었는지, 어디가 승방이었는지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흙벽과 구조물의 흔적들은 한 시대의 증인들이다. 더욱이 강 너머로 이와 꼭 닮은 가람의 흔적이 또 하나 있다고 하니 이곳 쿠처의 불교, 그 융성했던 불법의 시대가 얼마나 찬연했는지를 상상해 본다. 다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 그 뒤를 따른다.


수바쉬사원을 뒤로 하고 다시 석굴을 찾아 나선다. 쿠처가 석굴유적의 분포지로 명성을 얻은 데에는 석굴이 많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가운데 키질(克孜尔)석굴이 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질석굴은 둔황(敦煌)석굴, 룽먼(龍門)석굴, 윈강(雲崗)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석굴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키질석굴을 첫 손에 꼽는 이가 적지 않다. 가장 이른 시기 조성되었고 동서교류의 흔적 또한 그만큼 풍부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질석굴을 ‘실크로드 불교의 꽃’이라 부른다.


쿠처현의 서쪽, 키질석굴로 가는 길은 현장 스님이 서역으로 향할 때 지나갔던 루트 그대로다. 고래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오아시스북로가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도로는 잘 포장되어있다. 하지만 길가의 험준한 산세는 이 길을 오가던 옛 사람들의 고단함을 이야기해준다.


큰길에서 벗어나 좀 더 깊숙한 계곡으로 들어가면 무자트강을 따라 절벽같이 깎아지른 초르타크산(雀爾塔格山)이 이어진다. 이 산에 벌집같이 뚫려있는 석굴군이 바로 키질이다.


키질석굴은 산 남쪽면 약 2km에 걸쳐 줄지어 있다. 초르타크산은 산 중앙부를 흐르는 수그트(蘇格特)골짜기에 의해 동서로 대칭을 이루며 나뉜다. 키질석굴도 이 구분에 따라 곡서구, 곡동구, 그리고 골짜기 안쪽의 곡내구와 후산구의 네 구역으로 나뉜다. 산 하나가 몽땅 석굴군인 셈이다. 확인된 석굴의 수만도 250여개다. 지금도 모래더미 속에서 간간이 새로운 석굴들이 발굴돼 이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 가운데 135개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74개의 석굴에는 벽화가 남아있다.


답사는 곡서구에서 시작된다. 각각의 구역 가운데 가장 많은 80여 개의 석굴이 남아 있고 비교적 최근에도 새로운 석굴이 발굴된 지역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벌집같이 보이던 석굴들이 다가갈수록 조금씩 확대되더니 정면에 다다르자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 쪽방촌처럼 보인다. 산비탈을 따라 점점이 조성돼 있는 각각의 석굴 사이에 난간과 계단을 설치해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해 놓은 까닭이다.


그 석굴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앉아 구마라습 스님이 엷은 미소로 일행을 맞는다. 말끔하게 정돈된 키질석굴 정문에 조성돼 있는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이다. 구마라습(鳩摩羅什, 344 ~ 413). 불교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이름으로 남은 구마라습은 평생 경율론 74부 380여 권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특히 그의 역경에 힘입어 중원에 본격적으로 대승경전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대승불교가 싹을 띄웠다. 그 구마라습이 바로 이곳 쿠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쿠처국왕의 누이였으며 구마라습이 어렸을 때 출가하였고 구마라습 역시 어머니를 따라 출가했다. 출가 당시 구마라습은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소승불교를 따랐으며 어머니와 함께 천축으로 가 소승경전과 베다, 범어 등을 두루 공부했다. 이후 우전국(현재의 허텐 지역)에서 대승을 공부하고 귀의했는데, 후일 말하기를 “내가 지난 날 소승을 배운 것은 마치 사람들이 황금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문자와 언어를 익히고 대·소승을 두루 공부한 후 쿠처국으로 돌아온 구마라습의 명성은 이미 서역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웃 나라들은 그를 모셔(?)가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다. 구마라습은 우여곡절 끝에 402년 장안에 도착, 입적할 때까지 역경에 몰두할 수 있었다. 구마라습은 “내 역경에 오류가 없다면 죽은 후 화장을 해도 내 혀는 타지 않으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입적 후 화장을 하니 과연 혀는 타지 않았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구마라습을 향한 존경의 다른 표현이다.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으리”


구마라습 좌상을 청동으로 조성한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쿠처는 모든 물산이 풍부했지만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됐다. 쿠처에서 생산된 철기가 서역 각지의 ‘36개국을 충당 시킨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그만큼 철기가 풍부했으니 대규모 석굴을 조성하기에도 유리했다.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에는 쿠처의 풍부했던 철과 그 풍요로움이 낳은 화려한 유산, 위대한 인물에 대한 자부심이 하나로 응축돼 있는 듯 보인다.


다른 석굴과 마찬가지로 모든 촬영 장비를 입구에 내려놓고 홀가분히 몸만 나선다. 키질석굴이 언제 개착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벽화 등에는 3세기 말부터 9세기 말까지의 특징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석굴개착 초창기인 3세기 말부터 4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 가운데 대표적인 석굴은 38호굴이다. 4세기 초에 조성된 38호굴에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했던 바다 속과 악기를 연주하는 천신, 바람을 다루는 풍신의 모습을 비롯해 석가모니부처님 열반도, 미륵보살 설법도, 본생담 등이 빼곡히 남아 있다. 특히 석굴에 사용된 푸른색 안료는 1700여 년 전 광물에서 채취한 석채. 석굴 입구를 닫아 내부를 어둡게 한 후 손전등을 비추니 벽화의 석채가 빛을 반사시켜 아름다운 푸른빛을 뿜어냈다. 투명한 바다 속으로 햇빛이 퍼져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 옛날 어둠이 내린 석굴 안에서 등불을 밝히고 예배할 때 불빛에 반사된 푸른빛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을까를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입구 위쪽에 조성돼 있는 미륵보살 설법도에는 좌우에 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보살은 모두 남성으로 표현돼 있지만 우측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보살상만은 여성의 모습이다. 일명 ‘동양의 비너스’로 불리는 이 보살의 미소, 그리고 아름다운 자태는 고혹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석굴 입구 양쪽에는 각각 보살상이 그려져 있는데 두 보살상의 모습을 합쳐서 구마라습 청동좌상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구마라습 스님이 살았던 시기에 이 석굴이 조성됐으니 나름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6~7세기 접어들며 키질석굴은 번영기를 맞이한다. 키질석굴의 절반가량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 그 가운데서도 8호굴과 27호굴 등은 절정에 달한 쿠처 불교 예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8호굴의 천장은 바탕에 마름모꼴 문양을 반복해 그리고 각각의 마름모 안에 파란색, 검정색, 녹색, 흰색을 차례로 채색했다. 선명한 색 대비와 반복되는 문양을 통해 입체감과 세련미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마름모 안에 각기 다른 수인과 표정으로 설법하는 부처님, 법을 구하고 듣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천장 전체에 하나의 설법도를 완성하고 있다. 문양의 반복적인 사용과 선명한 색 대비는 쿠처불교 특유의 양식으로 27호 굴에서는 설법을 듣고 있는 천인들의 얼굴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천인들의 얼굴에는 검은색과 흰색이 번갈아 사용됐는데 이러한 표현 역시 입체감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또한 천인 중에는 오뚝한 콧날, 움푹 들어간 눈, 곱슬머리 등 한눈에 보아도 유럽인종임을 알 수 있는 얼굴 표현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는 당시 쿠처에 유럽인들이 많았다는 뜻. 동서를 잇는 교량답게 쿠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어우러진 국제도시, 요즘말로 다문화사회였음이다.


8세기 이후 키질석굴은 쇠락기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도 석굴이 개착되고 벽화가 조성됐지만 그 정교함과 예술성은 앞 세기의 것을 능가하지 못한다. 곡동구에 자리하고 있는 180호굴은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천불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지만 얼굴과 몸의 표현 등이 매우 단조롭고 무디며 사용된 색도 단순하다. 키질석굴이 쇠락기에 접어들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10세기 이후에는 이슬람이 확산되며 키질석굴에는 더 이상 예배의 등불이 켜지지 않았다.


키질석굴은 불교사와 불교예술 뿐 아니라 건축사, 음악사, 무용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점점 더 매력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키질석굴이 간직하고 있는 벽화와 조각, 유물 등 풍부한 자료들이 학자들에게 무궁한 연구 과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이곳을 연구하기 위해 찾아 왔었다. 그 중에는 연구의욕보다는 탐욕이 앞서 석굴의 벽화를 마구 뜯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고 일찍이 석굴의 보호를 당부한 이가 있다. 더욱이 그는 우리와 같은 핏줄, 한민족이었다.


한락연, 진정한 시대의 선구자

 

 

▲키질석굴 38호굴 천장 벽화의 본생담 중 일부. 사진출처 ‘신장석굴의 예술’. 

 


승방굴인 10호굴에 그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다. 벽화가 없는 승방굴에는 벽난로와 창문 등이 조성돼 있다. 그 안에 빛바랜 사진 몇 장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조선족 출신 화가 한락연(1898~1947)이다. 그의 생에 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나와 있으므로 생략한다. 한락연은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키질석굴을 조사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947년 2개월간의 키질석굴 조사를 마친 후 군용기를 타고 란저우(蘭州)로 돌아가던 길에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하며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가 수집한 각종 연구 자료와 모사본, 사진 자료 등도 모두 그와 함께 사라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10호굴에는 그가 키질석굴을 조사하게 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후대에 남긴 당부의 말이 남아있다. 그의 제자가 새겨놓은 명문이다.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946년 6월5일 단신으로 이곳에 왔다. 벽화의 아름답고 기이한 모습이 눈에 가득 차 모두 고상한 예술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른 지역 석굴과 사원은 비교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벽화들이 외국 고고탐사팀에 의해 벗겨졌는데 이는 문화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손실이다.…(중략)…고대 문화를 더욱 빛내고 성대하게 선전하기 위해 이후 참관자들은 특별히 보호하기를 바란다.…’


그와의 대면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당시 횡행했던 약탈자들처럼 탐험과 연구를 빙자해 이곳의 벽화를 탐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화가이면서 사회운동과 민족독립운동에도 남달리 헌신했던 그가 남긴 이 글에서는 문화에 대한 그의 안목과 앞선 의식이 읽혀진다. 약탈자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과 후대에 대한 간절한 당부는 그가 진정한 예술가이자 지성인이었으며 문화의 가치와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이란 무엇인가를 알았던, 선구자였음을 알려준다. 옛 사람의 흔적이, 그 자랑스러움이 또다시 발길을 잡아 오래 도록 10호굴을 서성인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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