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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림선사(柏林禪寺)-상

기자명 법보신문

조주선사의 뜰 앞에서 화두삼매에 빠지다

 

▲조주 스님이 말년에 주석하며 40년간 전법활동을 펼쳤던 백림선사 경내.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중국불교 이해가 필수적이다. 사실 중국불교는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스님들 법문과 어록 속에는 지금까지도 중국불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는 사실을 스님인 나부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선종(禪宗)에 관한한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부터 중국 선종 사찰과 그와 관련된 옛 조사들 발자취를 더듬어 볼 것을 큰 원처럼 세웠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 희망을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의 칭다오도량에 거주하면서 실현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 소개할 중국 선종 사찰은 필자가 움직인 여정에 따른 것으로 30곳 내외다.


백림선사(柏林禪寺)는 무(無)자 화두로 유명한 조주 스님의 행화(行化) 도량이다. 중국은 26개 성으로 나눠져 있는데 백림선사는 하북성(河北省, 허베이성)의 성 소재지인 석가장(石家庄, 스자좡)에 위치하고 있다. 백림사라고 해도 될 것을 선종 사찰임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백림선사라고 한다. 중국 소재 선수행과 관계되는 모든 사찰들은 ‘선(禪)’자를 붙인다고 보면 된다.


조주 스님 마지막 주석처

 

 

▲중국 하북성에 위치한 백림선사 일주문.

 


아무튼 칭다오에서 백림선사를 찾아가려면 먼저 한 시간쯤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비행장에서 다시 버스와 택시로 두어 시간이나 이동해야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비행기 값이 780위엔, 버스비가 20위엔, 택시비가 110위엔이나 들었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택시 청결상태가 너무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매었는데 그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지 안전벨트의 묵은 때와 먼지로 승복의 상의가 완전히 새까맣게 돼 버렸다. 택시 안은 운전석을 온통 철망으로 보호해서 정서적으로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택시 강도가 많아서 그렇다고 조선족 가이드가 귀띔했다. 온갖 교통수단을 이용해가며 우여곡절 끝에 백림선사에 도착했는데 일주문에 걸린 백림(柏林)이라는 글이 반가웠다.


그 옛날에 이러한 얘기가 있었다. 조주 큰스님에게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조주 큰스님 답변은 간결했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당시 백림선사 이름은 관음원(觀音院)이었다고 한다. 관음원에 백수자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 모든 한국 스님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백수자가 잣나무인 줄로 알고 경내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잣나무를 찾아다녔다. “정전백수자, 뜰 앞의 잣나무니라.”

 

 

▲‘잣나무’로 잘못 알려진 백림선사 측백나무.

 


그러나 잣나무는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았다. 번역의 크나큰 오류였다. 뜰 앞을 거닐다가 우리나라에서 봄직한 향나무 같은 큰 고목들이 여기 저기 서있기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나무 명찰에 ‘백수(柏樹)’라고 쓰여 있었다. 수령이 1800여년이나 된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잎과 열매를 보니 측백나무였다. ‘아~,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 한동안 멍한 상태로 꼼짝없이 서 있었다. 휴대하고 있는 옥편을 뒤져보니 백(柏, 栢) 자는 잣나무와 측백나무에 공통으로 쓰이는 글자였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웃지 못할 오류가 생겼을까?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역은 1992년부터다. 1992년 이전 백림선사에 가본 사람은 전혀 없었다. 중국이 개방된 그 후로도 북쪽 지방에 위치한 백림선사에 갈 수 있는 여건이 원활치 못했다. 그런데 한국 스님들에게 널리 알려진 화두, 정전백수자는 뜰 앞의 잣나무로 각인된 채 지금 세월까지 구전되어왔다. 그러니 상좌를 가르치고 불교대학을 이끄는 필자 입장에서는 여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잣나무가 되었든 측백나무가 되었든 그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라고.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화두로서의 생명력이 없어졌다는 방증이다.


화두는 현재적, 사실적이어야 한다. 내용도 맞지 않는 남의 화두를 들고 씨름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꼴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남이 쓰던 화두를 빌려서 잡는다손 치더라도 그 상황이 옛것의 그것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래서 정전백수자는 ‘뜰 앞의 측백나무’라고 고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보지 않고 스스로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논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백림선사 경내에 들어서면 특별히 눈에 띄는 전각이 조사전이다. 가운데 앉아 계시는 분은 보리달마 대사요, 왼쪽에 앉아 계시는 분은 육조혜능 대사요,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분은 남전보원 대사다. 안내 현판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현판을 보기 전에, 지나가는 한 중국 스님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모르겠단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절에 모셔진 조사가 누군지도 모르다니….


남전보원 큰스님은 조주종심 스님의 은사되는 분이다. 두 분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남전선사께서 ‘서상원(瑞像院)’이라는 조그만 집에 머무르실 때 객승 한 명이 찾아왔다. 14살짜리 사미승 조주였다. 마침 남전선사는 집 옆 양지바른 곳에서 낮잠을 즐기시다가 인기척에 눈을 뜨고는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상스러운 모습을 보았는가?”


“아니요, 상스러운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워있는 여래, 와여래(臥如來)는 보았습니다.”


그말에 남전 선사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는 임자가 있는 사미인가, 임자가 없는 사미인가?”


“임자가 있는 사미입니다.”


“어디 계시는가?”


그러자 사미승 조주는 다짜고짜 넙죽넙죽 세 번 절하였다. 그리고는 남전 선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날씨가 추워지는데 큰스님 늘 존체만복하소서.”


이렇게 남전보원 스님과 조주 사미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이후 조주 스님은 남전선사로부터 많은 교계(敎誡)를 받는데, 한번은 조주 스님이 스승 남전선사께 여쭈었다.


“스님, 어떤 것이 도입니까?”


은사의 답변은 간단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이니라.”

 

 

▲‘조주 스님(사진 좌)의 은사 남전 스님은 ‘평상심시도’(사진 우)를 강조했다.  

 


필자는 백림선사의 한 요사채를 안내해주던 부학감스님 집무실에서 일본 사람이 선물로 써서 걸어주었다는 ‘평상심시도’라는 붓글씨를 만날 수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글귀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아무튼 조주종심 스님은 남전선사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은 후 이곳 백림선사, 옛 이름의 관음원에서 교화를 펼치다가 여기에서 열반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조주 스님은 백림선사의 주인으로서 우뚝 서 계신다. 바로 조주 스님의 7층탑이다. 탑명은 ‘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지탑(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之塔)’인데 1330년 원나라 때 건립되었다. 높이는 33m, 탑은 육중하면서도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였고 탑 층마다 새겨진 돌조각은 목조의 그것보다 세밀하였다. 조주 스님의 가풍을 보는 듯한 감동이었다. 여러 차례 합장한 채 수십 번이고 탑돌이를 하면서 글로 배운 큰스님의 여러 행적을 떠올려 보았다.


탑은 기초부터 높은 곳에 세워졌다. 탑 기단 바닥에 서면 수백 년, 수천 년 도량을 지켜온 측백나무와 최근에 심어놓은 어린 측백나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음을 본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그 옛날 관음원 조주 스님의 분신인양 타방 땅에서 온 객승을 따뜻이, 반갑게 맞이해 주는 듯하다.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하다.


조주 스님은 ‘조주종심(趙州從諗)’이라고도 하고 ‘조주종념(趙州從念)’이라고도 부른다. 여기 저기 비문을 보노라면 예부터 같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조주 스님은 778년에 태어나 897년에 열반하였다. 14세에 출가하여 80세까지는 은사스님도 모시고 행각도 하면서 내공의 힘을 다졌다고 한다. 스님의 본격적인 제자 양성과 교화는 80세가 되어서야 이곳 백림선사, 즉 옛날 관음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조주 스님은 얼마나 오래 사셨을까? 무려 120세에 열반에 드셨다.


40년간 후학 양성·전법에 매진

 

 

▲백림선사 경내에 있는 조주교.

 


참으로 기록적인 장수였다. 자그마치 40년을 이곳에서 전법을 하셨으니 백림선사는 조주 스님의 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관음원은 그전부터 있던 절이었다. 조주 스님은 무자(無) 화두 등 수많은 공안들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였는데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이 도량, 오늘의 백림선사에는 간화선의 수행풍토를 찾을 길 없다. 마주치는 스님들마다 화두선에 대해서 물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불교와 같은 안거 제도도 있지 않았다. 이들의 수행은 주로 수식관(數息觀)이었다. 여름에 잠깐, 한 달여 모여 수식관을 하는 정도라니 ‘간화선의 본고향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오래오래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의 근기가 둔해져서 그러한가, 아니면 간화선을 가르칠만한 스승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면 수식관으로도 수행의 만족과 완성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중국 선종 사찰 순례 첫 절부터 화두 아닌 화두를 걸망 가득히 짊어지게 되었다. 내 생에 있어서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는 행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옛날 조주 스님께서 행각하면서 남긴 화두 하나를 떠올렸다.


조주 스님이 어느 한 암자에 이르러서 그 절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안에 누구 안 계시는가?”


그러자 주지가 나와서 말없이 주먹을 내어 보였다.


조주 스님은 그 모습을 보고 “물이 얕아서 배 댈 곳이 없구나”하고 돌아 나왔다.

 

 

▲조주 스님을 기리기 위해 원나라 때 건립한 높이 33m의 조주탑.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암자가 있었는데 조주 스님은 거기 가서도 똑같이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랬더니, 주지라는 스님이 나와서 아까처럼 똑같이 주먹을 내보이며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주 스님의 가르침이 전혀 달랐다. 스님은 선 채로 삼배하면서 말하였다.


“능히 빼앗고 능히 주도다.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도다.”

행각은 자기 공부가 먼저이겠지만 조주 스님의 경우처럼 남의 살림살이도 기웃거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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