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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성 관음사

기자명 법보신문

전쟁화마 견뎌낸 관음의 불두 ‘검은 미소’ 가득 중생을 품다

창건연기 ‘원홍장’ 설화는
‘효녀 심청’ 이야기의 모델


빨치산 토벌 때 사찰 전소
잿더미 속에서 불두 발견

 

“처녀 성덕이 관음 모셔오고
최보살이 사라진 불두 찾아”

 

 

▲관음사 원통전에는 빨치산 토벌 때 훼손된 금동관음상의 불두가 남아 있다. 검게 그을린 상처 위로 변함없는 미소가 흐르고 있다. 불단에는 새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돼 있다.

 


곡성 관음사로 가는 숲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마을은 드문드문 나타났다. 백제 고찰이 이렇게 숨어있다니, 흡사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었다. 길은 선세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5킬로미터 정도 이어졌다. 외길은 긴 하품처럼 늘어져 있었고, 유월의 뙤약볕이 등짝을 때렸다. 사람도 집들도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었다. 이윽고 절이 나타났다.


관음사는 높지 않고도 깊었다. 맑은 냇물 위로 금랑각(錦浪閣)이 있었다. 경내로 들어서는 다리이니 일종의 일주문인 셈이다. 금랑각은 이름처럼 정겹고 예쁘다. 금랑각을 지났어도 경내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절이 자연 속에 우뚝하지 않고 자연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아무래도 희미하다. 금강문에는 금강역사가 좌우에서 칼을 치켜들고 있지만 그 기세가 안온해서 보는 이가 오히려 미안하다.

 

 

▲금강역사는 칼을 치켜들고 있지만 그 기세는 오히려 안온하다.

 


301년 성덕보살이 창건했으니 백제가 불교를 공인한 384년보다 훨씬 앞섰다. 관음사는 1700년 동안 불법을 받들었다. 고려말 1374년 이미 5차례나 중창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최초의 사찰이며 관음도량이라고 한다. 근처의 지명이 선세리, 연화리, 성덕리 임을 볼 때 관음사의 불음이 일대에 찬란했을 것이다.


이 깊은 사찰에 심청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바닷가도 아닌 곳에 웬 심청이냐고 따져 묻다가 이야기를 풀어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관음사의 연기설화에 ‘원홍장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이 바로 고대소설 ‘심청’의 근원설화이다. 관음사의 설화는 이렇다.


대흥이라는 고을에 맹인 원량이 살고 있었다. 그는 착하고 예쁜 딸 홍장(洪莊)을 두었다.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의 ‘눈’이 되었다. 어느 날 원량이 마을 길을 더듬거리는 데 화주승이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오늘 장님을 만날 터인데 그가 대단월(大檀越:큰 시주)이 될 것이다’고 일렀습니다. 부디 그 뜻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관음사 입구의 금랑각.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가 아니라 이어주는 다리다.

 


원량은 너무도 놀랐다. 하지만 가난하여 시주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화주승은 부처의 계시라며 시주를 간청했다. 원량은 딸 홍장에게 낮에 일어난 얘기를 했다. 부녀의 근심이 어찌나 무거운지 땅이 꺼질듯 했다. 원량에게는 딸뿐이었다. 결국 딸을 시주하기로 했다. 홍장 나이 16살이었다. 홍장이 떠나는 날 마을 사람은 물론이요 산천초목이 슬피 울었다. 아버지 원량은 그 후 하염없이 울다가 그 눈물이 하늘에 닿아 눈을 떴다.


화주승과 함께 길을 나선 홍장이 소랑포에 이르렀다. 이내 바다에서 붉은 배 두 척이 나타나 쏜 살처럼 다가왔다. 배에서 중국 진나라 사신들이 내리더니 홍장을 보고는 모두 엎드렸다.


“저희 황제께서 새 황후감이 동국(東國)에 있을지니 동쪽으로 가보라 일렀습니다. 과연 저희가 찾던 황후이십니다.”


진나라 사신들은 금은 보화를 예물로 바치고 대신 홍장을 싣고 떠났다. 홍장은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고, 그 인자한 위엄이 하늘을 덮었다. 또한 화주승은 그 예물로 불사를 일으켰다.


홍장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늘 동쪽을 바라보았다. 고향에는 앞을 못 보는 아버지가 있었다. 홍장은 금동관음상을 만들어 돌배(石船)에 실어 백제로 보냈다.


어느 날 곡성 옥과에 사는 처녀 성덕이 해변을 걷고 있었다. 낙안포(지금의 보성 벌교) 근처였다. 그런데 멀리서 돌배 하나가 해안가로 밀려왔다. 뱃속에 빛이 가득했다. 성덕이 안을 살피니 관음보살상이 앉아 있었다. 성덕이 엎드려 절했다. 그리고 관음상을 모실 인연의 땅을 찾아 나섰다. 관음상을 업었더니 처음에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걸을수록 관음상이 무거워졌다. 숱한 들과 마을을 지나 어느 산에 이르자 무거워서 한 발 짝도 뗄 수 없었다. 성덕은 그곳에 절을 짓고 금동관음상을 봉안하니 관음사였다. 그 후 관음사를 품고 있는 산을 성덕이라 칭하며 그녀의 덕을 기렸다.


연기설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홍장이 과연 곡성 여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음사에 ‘효’가 스며있음은 사실이다. 그리고 설화 속 홍장은 후에 많은 작가들이 극적 요소를 보태 심청이로 거듭났을 것이다. 사찰의 창건 설화에는 거의가 남성이자 스님들이 등장하는데 관음사만은 그 주역이 여성이며 재가신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과 친근하고 인간의 아픔을 따뜻하게 품었던 관음보살을 모셨는지도 모른다.


관음사에는 많은 신비스러운 얘기들이 서려있다. 1700년 동안 자비로운 관음보살이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성주괴공, 이야기도 생성되었다가 사라졌다. 관음사에는 지금도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현대적 설화’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거나 아니면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띠며 오래 회자될 것이다. 절의 운명과 함께 할 것이다. 현대적 설화라 일컬을 만한 이야기를 찾아서 옮겨본다.


관음사는 6·25전쟁 때 철저하게 파괴됐다. 밤과 낮을 나눠가진 빨치산과 토벌대가 관음사에 난입했다. 기도와 자비의 공간에 살기가 자욱했다. 총성이 목탁소리를 찢었다. 그런 지옥의 시간은 일찍이 없었다.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앤다며 경찰 토벌대들이 전각마다 불을 질렀다. 국보 273호 원통전과 그 속의 국보 214호 금동관음상이 타버렸다.

 

 

▲소실된 국보 214호 금동관음상의 옛 모습.

 

 


‘자비도량이 어쩌면 이렇듯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할 수 있는 것인가. 관음보살의 자비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그런데 잿더미로 변한 원통전 터에서 ‘웃고 있는 불두’를 발견했다. 기적처럼 관음보살상 두상이 화마를 견뎌내고 남아있었다. 겉치장과 몸통은 불타버렸지만, 목이 부러졌지만, 금빛은 녹아 시커멓게 그을렸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제의 미소였고, 성덕의 미소였으며, 심청의 미소였다. 자신을 파괴한 인간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두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 어느 날 절에 도둑이 들어 훔쳐가 버렸다. 절집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누구도 찾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도 불두는 돌아왔다. 그 과정은 ‘홍장 이야기’만큼이나 신비롭다.


곡성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해운대구 반여동)에 최유선이란 이름의 불자가 살고 있었다. 최 보살은 병을 얻어 3년 동안 앓고 있었다. 백약을 써봤지만 낫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더니 “전라도 곡성 관음사로 가보라”고 말했다.


최 보살은 생전 처음 곡성 관음사를 찾아갔다. 아픈 몸을 이끌고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물어물어 곡성을 찾아갔다. 막상 관음사에 다다르니 절은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눈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아픈 몸을 임시 막사에 부리고 잠을 청했다. 그날 밤 꿈에 다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나는 이곳 성덕산 관음보살이다. 내 몸은 모두 타버렸지만 얼굴은 남아있다. 지금 광주 고물상 마루 밑에 있으니 내 얼굴을 찾아 가져오라.”


최 보살은 놀라 깨어났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광주로 나갔다. 고물상마다 찾아가 뒤졌지만 불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들린 변두리 고물상에서 불에 그을린 불두를 찾아냈다. 최 보살은 불두를 소중히 품고 관음사로 돌아왔다. 그날 밤 꿈에 관음보살이 다시 나타났다.


“관음사에서 피어난 흰 불두화, 흰 만리향화, 흰 진달래를 달여 먹으라. 그러면 네 병을 고칠 것이다.”


그리고 관음보살이 법당으로 들어갔다. 꿈은 생시처럼 선명했다. 최 보살이 일어나 관음사 주변을 살피니 흰 꽃들이 피어 있었다. 잿더미에서도 눈부시게 희었다. 최 보살의 병은 물론 씻은 듯 나았다.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탄복했다.


“그 옛날 처녀 성덕이 관세음상을 업고 왔듯이, 이제 최 보살이 도난당한 불두를 찾아내 모셔왔다.”


관음사 원통전에 들어가 엎드리면 새로 모신 금동관음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 옆에서는 목이 부러진 채 ‘시커먼 불두’가 웃음을 짓고 있다. 검은 미소, 모든 표정은 태워버리고 단 하나 남은 미소. 저 미소는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번쩍거리는 위엄의 새 금동관음상과 이제 미소만 남은 시커먼 불두 사이는 무엇인가.

 

 

▲원통보전. 전소된 전각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대요 스님은 지난해 8월 관음사 주지로 왔다. 첫 법회를 열었는데 참석자가 단 두 명이었다. 천년의 관음도량에 관세보살의 자비로운 미소가 살아있는 제일도량임에도 그랬다. 지금도 열 명 남짓 모인다. 관음사 경내는 거의 비어 있다. 한때 80여개의 전각이 들어서 있고, 절이 번창하여 ‘관음사에 가면 연락부절’이라는 말이 있었단다. 그 영화는 사라지고 마지막 그을린 불두의 미소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간절한 인간의 기도를 어찌 외면할 것인가. 관음보살은 인간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은가.


곡성 군내에서는 심청의 효를 새긴 캐릭터가 나부끼고 요란하게 그 이름을 팔고 사지만, 정작 심청의 효심이 고여 있는 관음사는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절에도 흥망성쇠가 있다. 절은 그대로 있지만 사람들이 들어오고 떠나간다. 관음사는 지금 가장 외롭다. 그래서 가난하다. 수행을 양식으로 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도 대요 스님은 이런 절이 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하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절이 자연의 일부가 되었으니 빈 곳이 오히려 충만하다고 했다. 관음사에는 낮에는 온갖 희귀 새들이 찾아와 울고, 밤에는 온갖 동물들이 도량에 나타나 활개를 친다. 감히 부처님을 올려다 보기도 한다. 빨치산과 토벌대가 밤과 낮을 나눠가졌듯이 이제는 새와 동물이 관음사의 낮과 밤을 나눠가졌다. 관음사는 정녕 평화로웠다. 그 속에서는 인간이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관음사에는 1700년 동안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이야기도 윤회를 할 것이다. 흐르다 세상 어디에선가 다시 피어날 것이다. 관음사에 들리면 원통전에 엎드려 보시라. 온갖 기도가 스며있는,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닳아 없어진, 그래서 가장 자애로운 ‘검은 미소’를 보고 오시라. 그러면 오늘이 충만할지니.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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