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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최충헌 부인 진강후비 왕씨

권력의 무상함 깨닫고 화두 참구에 매진

최고권력자 아내로 권세누려
권력 아귀다툼 속 허망함도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갈한 글씨체로 정성껏 써내려간 편지에는 깨달음을 갈구하는 한 여인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구절구절마다 여인의 절절한 불심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참선 공부에 마음이 간절했으나 업장에 얽매여 그 한끝도 친히 듣지 못하고 오직 그리워할 뿐이었습니다. 여러 곳의 노장 스님께서 때때로 저를 찾아와 말씀하기를, ‘마음이 트일 때는 어디로 가나 걸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진정한 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변두리만 맴돌 뿐 아직 철저히 깨치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스님께서 제게 화두를 주시어 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가르침을 구하는 그녀의 지극한 발원도 그렇지만, 편지의 주인공이 무소불위의 권력자 최충헌의 부인 진강후비 왕씨라는 점이 더욱 스님을 놀라게 했다. 진강후비 왕씨는 전 대왕 강종의 여식으로 최충헌과 결혼한 후에는 왕녀의 호칭인 ‘정화택주’로 불릴 만큼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있다 들은 터였다.


그렇기에 이 같은 편지를 받고 보니 더욱 기특했다. 최상의 지위, 풍족한 삶 속에서 화두를 참구하며 깨달음을 이루고자 발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화택주가 혜심 스님에게 화두를 받은 당시만 해도 여성들의 참선수행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고려 초중기 불교는 교종 중심이었고 명종(1170~1197), 신종(1197~1204)대에 이르러서야, 보조국사 지눌 스님 등 고승의 활약과 더불어 선종(조계종)의 교세가 확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생에서 무상의 대도를 얻기 위한 참선 수행보다는 경전을 읽거나 기도·보시를 통해 극락왕생과 복을 구하는 신행생활이 여성들에게는 더 보편적이었던 셈이다.


혜심 스님이 그녀의 편지를 받고 “정화택주가 이런 줄은 미처 몰랐다”고 거듭 감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따르면 혜심 스님은 정화택주에게 조주 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을 화두로 내렸다. 말에 집착하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전했다.


“편지 잘 받았습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화두 공부에 뜻을 두니 감사한 일입니다. 다행이 옛 성인이 남긴 화두가 있으니 이를 언제나 참구하시면 될 것입니다. 마조 선사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인 동시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님(非心非佛)’을 거듭 밝혔으니, 말을 생각지 말고 그대로 깨달아야 옛사람의 참마음이 분명히 나타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모든 망상을 떨쳐버리고 조주 스님의 ‘방하착’이라는 한 가지 공안(公案)을 오래오래 고요히 참구하면 저절로 의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방하착은 “내려놓다” “놓아버리다” 등의 의미다. 중국의 엄양 선사가 조주 스님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이 “놓아버려라(放下着)”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혜심 스님이 정화택주에게 ‘방하착’이라는 화두를 내린 연유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왕실권력의 중심에서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과거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정화택주에 대한 기록을 역사서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정화택주는 왕의 여식임에도 묘지명조차 남아있지 않아 생몰연도마저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강종의 삶과 남편 최충헌이 집권하던 시기 고려시대의 왕실 계보를 살펴보면 그 속에 숨겨진 그녀의 삶의 궤적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진강후비 왕씨 정화택주, 그녀는 고려시대 제22대 왕 강종의 딸이다. 아버지 강종은 19대왕 명종의 아들로 왕의 적자였지만, 무신정권에 의해 허수아비처럼 살아가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명종 3년(1173) 22세로 태자에 책봉됐고, 1197년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폐위될 때 46세의 나이로 부왕과 함께 강화도로 쫓겨난다. 최충헌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20대왕 신종과 21대왕 희종을 잇따라 갈아치운 뒤에야, 강종은 비로소 왕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1211년 왕이된 이후 고작 2년밖에 살지 못했다.

결국 최충헌에 의해 왕실에서 쫓겨났고 10여년이 지나 최충헌에 의해 다시 돌아왔지만 정작 왕으로서는 제대로 살아볼 기회조차 없었던 셈이다.


강종의 딸 정화택주의 삶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왕의 딸이었지만 서녀였다.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했던 탓에 고려 공주열전의 기록에서도 제외됐다.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됐을 때 태어났다는 추측도 있지만, 최충헌과 그녀 사이에 둔 두 아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아버지 강종이 태자시절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왕실에서 생활하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강화도로 쫓겨날 즈음 최충헌과 결혼한 듯하다.


결혼시점이 당시 여성의 결혼평균연령인 15~16세 무렵이라면, 정화태후는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보다 세살 많은 48세의 최충헌과 결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그녀는 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자 했던 최충헌의 권력욕 혹은 가족과 친지들이 최충헌으로부터 권력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나이차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는 강제적인 결혼인데다, 그 상대가 할아버지를 폐위시키고 가족을 귀양 보낸 당사자였으니 어린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만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그녀의 심경과 반대로 명종이 폐위된 후 최충헌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혜심 스님에게 가르침 구해
법화·정토신앙에도 관심


명종 폐위 후 옹립된 신종(1197~1204)이 본인을 왕으로 만들어 준 최충헌의 눈치를 보느라 왕권을 휘두르지 못한데다, 최충헌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만적의 난 등 농민·천민의 난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무신세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것이다.


급기야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본인의 독재정치를 제도화함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신종이 죽은 후 왕이 된 희종을 6년만에 폐위시킨 후 강화도에 있던 정화택주의 아버지 강종을 다시 불러와 왕으로 옹립하기까지 최충헌은 무려 4명의 왕을 폐위시켰다. 왕을 제멋대로 갈아치우며 권력의 향락을 만끽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을 탐하는 또 다른 이들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충헌의 독재기구였던 교정도감 역시 처음에는 그를 살해하려했던 청교역리 세력과 왕권을 지지하려 했던 승려들을 수색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시작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충헌의 아내였던 정화택주 역시 왕실에서 그리 안전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희종은 왕이 된지 6년째 되던 해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 측근 내시들과 결탁해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최충헌에 의해 결국 폐위된다. 강화도에 유배됐던 강종은 이를 계기로 왕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정화택주 입장에서는 남편이 죽을 고비를 넘김으로서 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정화택주가 혜심 스님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 아버지 강종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강종이 최충헌에 의해 왕실에 돌아온 희종 6년 수선사 정혜결사를 이끌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입적했고, 이어 계승자가 된 혜심 스님에게 강종이 직접 결사 참여의사를 밝히고 수선사 증축을 도왔다는 기록이 ‘수선사중창기’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충헌의 손아귀에서 유명무실한 허수아비 왕으로 살았던 강종. 그가 불법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구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아버지와 함께 혜심 스님의 가르침에 기대어 세속에서 벗어난 정신적인 자유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그녀는 고려 무신정권시대의 정점에서 왕의 딸이자 최고 권력자 최충헌의 아내로, 피비린내 가득한 권력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차별 살인도 서슴지 않는 남편과 목숨을 걸고서라도 권력을 취하려 하는 이들의 아귀다툼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헛된 욕망과 집착으로 하루아침에 왕이 바뀌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왕실 모습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한낱 부질없는 세상사에 불과함을 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이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더 불법에 심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혜심 스님이 정화택주에게 ‘놓아버리라’는 화두를 전한 까닭이 그녀의 삶을 염두에 둔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깊은 상처와 불안정한 삶 속에서 이 화두는 그녀를 지탱해주는 굳건한 힘이 되었으리라. 불법을 향한 마음과 스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그녀 역시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욕망과 집착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정화택주는 혜심 스님에게 받은 화두를 깊이 참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37년(1250)에 건립된 ‘진각국사비’에 기록된 제자 명단에 ‘정화택주 왕도인’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혜심 스님과 서신교환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받다가, 최충헌이 죽은 후 제자로 출가해 본격적으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또한 정화택주는 화두 참구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정토신앙과 법화신앙 등 불교의 다양한 가르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 고종23년(1236) 신행운동 ‘백련사 결사’의 내용을 담은 ‘법화영험전(法花靈驗傳)’에 정화택주에 대한 언급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정화택주는 권세가 얼음덩이와 같이 오래가지 않음을 알았다. 인간세상이 불난 집과 같아 편안함이 없음을 탄식하고 생사를 벗어나는 길을 수행하고자 생각했다. 이에 정화택주는 백련결사 초기에 동참해 무량수불을 조상해 봉안하고 ‘묘법연화경’을 금으로 사경하기를 원했다.”


정화택주가 권력의 무상함을 일찍이 깨닫고 오탁악세를 떠나 한 차원 높은 깨달음을 지향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고종 19년(1232) 고려는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했기 때문에 백련결사 당시 고종의 누나인 정화택주가 전란을 뚫고 강화도에서 강진의 백련사를 찾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법회에 동참하는 대신 개인적인 신행 형태로 수행을 이어가지 않았나 추측된다.


한평생 참선수행을 통해 개인적인 깨달음을 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아미타불을 염하고 ‘법화경’을 독송했던 정화택주. 어쩌면 그녀는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남편을 비롯해 권력의 희생양이 됐던 이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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