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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림선사(柏林禪寺)-하

기자명 법보신문

문화혁명이 지웠던 선의 향기를 되살리다

사찰 파괴 극복한 대가람
준 군사조직 홍위병 앞장
조주탑만 남고 다 사라져
방장·불자 10년만에 중창

 

 

▲발우를 들고 가는 백림선사 대중스님들. 이 무리에서 하루 묵을 방과 빈 방장실을 소개해 준 소중한 인연 명룡 스님을 만났다.

 


중국의 여느 사찰처럼 백림선사는 객당(客堂)이 있어서 신도들이나 스님들이 묵어갈 경우 그곳에서 접수를 받는다.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능력 있는 통역만이 내 눈과 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애당초 두 명의 중국 교포(조선족) 통역을 대동하였다. 그래서 그 진가는 곳곳에서 여러모로 나타났는데 특히 객당에서 그러하였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급한 일이 있을 때 혼자보다는 여럿이 말을 하다보면 훨씬 더 잘 먹혀든다는 것을 느꼈다.


객당에서의 하루 숙박은 절차가 까다로웠다. 일반 재가자는 50위엔의 숙박료를 내지만 스님들은 외국인이라도 그렇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승려증 소지였다. 평소 승려증을 휴대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큰 낭패가 생겼다. 승려증이 없으니 재워줄 수 없다는 것이다. 종무소에는 황색 옷차림의 삭발한 남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신분들이 애매모호하였다. 복장은 스님이라서 스님이 아니라 할 수도 없고, 객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불한당 같아서 스님이라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을 대하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한국의 스님들이 대부분 불친절하고 한국 사찰의 종무원들이 불친절하다는 얘기를 신도들로부터 간간이 들으면서도 중국에 와서 이 꼴을 당하고 보니 친절이 얼마나 값지고 귀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방장스님을 직접 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 백림선사의 방장스님은 근대 중국불교의 중흥조라 칭송받는 허운(虛雲)대사의 손상좌이다. 허운 스님의 제자에 정혜(淨慧) 스님이란 분이 있고 정혜 스님의 제자에 명해(明海) 스님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 명해 스님이 이 절의 방장스님이라고 전해 들었다. 굳이 방장스님을 뵙고자 한데는 사실 하루 자는 문제보다 정말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이 빠져 나간 백림선사를 청소하는 스님.

 


백림선사에서 구입한 책을 보니 ‘정전백수자’를 ‘뜰 앞의 측백나무 씨앗이니라’라고 되어 있었다. ‘자(子)를 굳이 씨앗이라고 쓴 이유가 뭘까?’


화두라고 제시된 것에 잔뜩 붙여진 설명이 오히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이다. 화두는 해설하면 안 된다는 내 고정관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장스님한테 직접 여쭤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방장채 대문 앞에서 여러 번 초인벨을 누르면서 친견을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출타하셨단다.


할 수 없이 아까 보았던 조사전 쪽으로 이동하는데 스님들 한 무리가 지나갔다. 급한 김에 그중에서 한 스님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주 운이 좋게도 자상하면서도 실력을 갖춘 중진급 스님으로 법명은 명룡(明龍)이었다. 명룡 스님은 불학원의 부원장이면서 교무 소임을 맡고 있었다. 불학원은 우리나라의 강원, 승가대학 같은 곳이다. 이런 저런 많은 얘기를 나누다보니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인지 특별히 방장실로 안내까지 해주었다. 빈 방장실이었지만 허운대사, 조주 종심 스님의 귀한 사진을 친견하고 큰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또 스님은 액자로 된 조주 스님의 초상 등을 선물로 내주었다. 명룡 스님은 ‘대웅전에 가 보았느냐?’고 묻더니 ‘공사 중이라 못 들어갔지요?’라며 자문자답하고는 직접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었다.


대웅전은 사찰 뒤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크기와 높이가 중국스케일답다. 어마어마하였다. 전체 가람의 규모는 필자의 출가 본사인 통도사만 하였다. 법당 내부에는 오존불(五尊佛)이 모셔져 있는데 부처님들이 하나같이 그 위용이 대단하다. 바로 뒷날 새벽 예불 시간에 108배를 올리면서 중국 불교의 부흥에 한 없는 감사를 드렸다.

현재의 중국 불교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은 근대사에 문화대혁명의 기간이 있었는데 즉, 1966년에서 1976년 사이에 홍위병(紅衛兵)들에 의해 모든 전통 사찰들이 파괴되었다.

 

 

▲공사 중에도 명룡 스님 안내로 참배할 수 있었던 백림선사 대웅전. 오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때 그 당시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문화혁명이라고 하였지만 자기네 문화를 스스로 파괴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우스갯소리겠지만 일부 중국 사람들은 ‘당시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이 나이가 많아 노망이 들어서 그러지 않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단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당시의 문화혁명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 중국 전체는 그 당시 파괴된 사찰들을 복원하느라 난리법석이다. 온 나라가 불사중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미 많은 절들이 중건 중수되었고, 다니다보면 공사 중인 곳도 자주 눈에 띈다.

 

 

▲백림선사를 중창한 허운대사 손상좌 명해 스님이 방장이다. 방장실 내부.

 


그렇다면 이곳 백림선사는 문화혁명의 위기를 넘겼을까? 백림선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돌로 된 조주탑만 빼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 누가 이렇게 백림선사를 대가람으로 복원시켰을까? 위에서 언급한 방장 정혜 스님이 1988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10년 만에 지금과 같은 가람구조를 완성하였다고 하니 중국 불자들의 신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중국 불교에 있어서 사찰의 중창이나 건립을 중국 정부에서 전적으로 지원한다고 알고 있으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정부는 허가만 해 줄 뿐 모든 재정조달은 해당사찰이 직접 해야만 한다.


명룡 스님의 배려로 우리 일행은 객실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2명의 통역을 둔 보람이기도 했다. 객실은 2인 1실로 간단한 샤워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비누, 치약 등의 준비는 미흡하였다.


객실에서 한숨 돌리고 나니 사찰 경내를 돌아다니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 밖의 고양이를 보자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옛날 조주 스님이 원주 소임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스님이 시장을 보러 가서 절에 없는 사이,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자기네 고양이라고 싸움이 벌어졌다. 조실이신 남전 보원 스님이 지나시다가 그 장면을 보고는 고양이의 모가지를 쥐고는 고함을 치셨다.


“고양이에 대해서 누가 한 마디 일러라. 그렇지 않으면 내 당장 고양이 목을 베리라!”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조실 남전 스님은 단칼에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다. 이 사건이 일어난 저녁 장에 갔다가 늦게 돌아와서 인사차 들른 조주에게 남전 스님은 낮에 있었던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다그쳤다.


“조주, 네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그러자 조주 스님은 말없이 일어나 벗어놓은 짚신을 머리에 이고 문 밖을 나가버렸다. 그때 남전 남전 스님은 말하였다.


“아! 낮에 조주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스토리 전체가 화두이다. 그렇게 재치있고 혜안이 밝았던 조주 스님의 초상을 선물로 받고나니 환희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명룡 스님의 배려로 낮에 들른 방장실에서 ‘조주고불금방광(趙州古佛今放光)’이란 액자를 볼 수 있었는데 과연 조주 스님은 ‘옛부처’란 소리를 들을 만 하셨다. 경내에 고불암(古佛庵)이란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다.


지금도 빛을 발하고 계시는 조주 큰스님! 스님의 가풍은 생활선 그대로 이셨다. 어떤 수행자가 아침 공양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찾아와 물었다.


“큰스님, 어제 저녁 늦게 이 절에 들어와서 이렇게 아침 일찍 인사올립니다. 잘 지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주 스님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아직 발우를 못 씻었겠구나. 가서 발우나 씻어라.”

 

 

▲ 문화혁명으로 불탔던 백림선사를 현재 모습으로 되살린 허운대사.

 


큰스님은 찾아와서 묻는 사람들에게 긴 설명을 하지 않고 그저 ‘끽다거(喫茶去)’라고 하시며 늘 차를 내어놓으셨다. 총림에 처음 왔든 여러 번 왔든 ‘차나 한 잔 하고 가라’ 하였다. 이를 궁금히 여긴 시자가 끽다거의 진정한 의미를 묻자 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자네도 차나 한 잔 하게!”


굳이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말하는 자체가 사족이 될 것 같다. 화두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무자(無字)화두도 생활 속에서 툭 터져 나온 것이지 억지를 부려 만들지 않았다.


상황은 이러하다. 백림선사는 마을과 거의 붙어있는 절이었다. 그러다보니 동네 개가 절 마당에 곧잘 들어온 모양이다. 하루는 조주 스님이 객승과 툇마루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여느 날과 같이 동네 개가 지나갔다. 객승이 느닷없이 물었다.


“큰스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의 답은 촌철살인과도 같았다.

“무(無).”


성지순례를 핑계로 행각을 하다보면 참 고마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번 백림선사의 명룡 스님이 그러하였다. 스님의 배려 덕분에 승려증 없이도 하루를 잘 묵었다. 뒷날 아침 일부러 찾아뵙고 굳이 사양하는 스님에게 책값 핑계로 300위엔을 드리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백림선사는 10년만에 중창불사를 마쳤다. 중국 불자 신심에 고개 숙일 따름이다. 백림선사 경내서 향공양 올리는 중국 불자.

 


백림선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주교’라는 다리가 있다기에 찾아갔다. 절과는 4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곳까지는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빌려 탔다. 이 다리는 수나라 때 세워진 세계 최초의 아치형 다리다. 주위는 조주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작은 유물관도 있다. 조주 스님보다 다리가 훨씬 먼저 생겼지만 큰스님의 명성 때문에 조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열심히 산 사람에게는 산천초목, 무정물조차도 그의 이름을 좇아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곧 법의 힘이다. 아무튼, 조주교에 얽힌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한 학인이 와서 물었다.


“조주의 돌다리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막상 와서 보니 돌다리는 커녕 외나무다리에 지나지 않는군요.”


조주 스님은 점잖게 대답하였다.


“그대는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지 못하였구나!”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그래,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고 소도 건너지.”


백림선사를 참배한 순례객은 반드시 조주교를 건너봐야 한다.
 

우학 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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