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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성 고산사

기자명 법보신문

사람이 들어 솟은 절, 산은 낮아도 기도는 높았다

유명 창건설화·수행담 없어도
‘청룡산 자궁 터’ 평안한 도량


남편·자식 갑자기 쓰러지고
한꺼번에 찾아든 병마·가난


벼랑 끝 심정으로 찾은 사찰서
모든것 비우고 ‘여연심’ 얻어

 

 

▲청룡산에 걸쳐있는 고산사는 경내에서 아래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오랜 세월 이어져 오면서도 큰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대전·충남지사=이장권 지사장

 

 

홍성 고산사는 청룡산에 걸쳐있다. 소나무 숲속을 헤치며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윽고 길이 끊긴다. 돌계단을 오르니 기와집 세 채가 나란히 서있다. 아담하고 정갈하다. 뒤 쪽에는 나리꽃이 피어나 저희끼리 두런거리고 있다. 막 장맛비가 그치고 경내는 고요했다. 가끔 울리는 요사채의 풍경소리가 맑았다. 오래된 석불 하나가 이곳이 절이라며 법당을 가리키고 있다. 법당 안 부처님은 단정하시다. 왜 이런 곳에 부처를 모셨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누군가 간절한 마음을 움켜쥐고 산을 올랐을 것이다.


이 작은 절에 나라의 보물이 있다. 바로 대광보전(국보 399호)이다. 법당 자체가 보물이니 흔치 않은 경우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5평 규모로 가운데 기둥이 없다.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조선 초기의 건축물이다. 머리가 몸체보다 크게 보이지만 이상하게 당당하다. 법당을 세운 장인들의 공력으로 그렇게 수 백 년을 버텼을 것이다. 그 안에 아미타불좌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88호)을 모셔놓았다. 부처님 역시 고려 후기 양식으로 조선 초기에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찾는 학자나 신도들은 보물 지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미타불은 말이 없으시다. 대광보전도, 그 속의 아미타불도 어림 600년을 그 자리에 있다.


수많은 변란이 있었고, 그래서 이 땅에 폐사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도 작은 절 고산사는 여여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곱다. 주지 성화스님은 절터가 명당이라서 화를 피했다고 했다. 고산사는 안에서는 아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고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온갖 변고들이 비껴갔다는 것이다. 스님은 고산사 절터가 청룡산의 자궁이라고 했다. 정말 산 정상쯤에서 내려다보니 움푹 들어갔다. 자궁처럼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산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주지를 맡았을 때는 한결 절 살림이 느는 듯했고, 비구스님들이 주지 소임을 맡았을 때는 조금 힘들어 하는 듯했다고 한다.


법당 옆에는 석조여래입상이 덤덤하게 서있다. 인근 산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 옮겨왔다고 한다. 언제, 누가, 왜 불상을 묻었는지 알 수 없다. 손 모양과 옷의 주름으로 미뤄 볼 때 고려 때 불상이라고 했다. 표정이 없지만 그래서 더 인자해 보였다.

 

“경내 풀 한 포기만 뽑아도
복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돈이 없어도 발품을 팔아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고산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창건설화도, 고승의 수행담도, 불도들의 영험한 얘기도 남아 있지 않다. 절절한 인연이 왜 없었겠는가. 아마도 비와 눈에, 바람에, 달빛에 바래고 지워졌을 것이다. 온통 골(骨)산이라서 경내를 넓힐 수 없었을 것이고, 천년이 넘도록 그 넓이에 기도를 담았을 것이다. 그만 그만한 사연들을 들고 와 부처님께 펼쳐 보이고, 말씀 하나씩 얻어 내려갔을 것이다.


고산사는 한 동안 스님이 없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자 모두 산을 내려갔다. 인간이 사라진 절은 속가보다 더 빨리 무너졌다. 절은 사람의 절을 받아야 비로소 서 있을 수 있었다. 절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에서 두 보살이 절로 들었다. 홀로 있는 부처님을 보자 가슴이 무너졌다. 날마다 마을로 내려와 탁발을 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다. 그렇게 보살들이 절을 지켜냈다. 그러나 이제 보살들의 선업도, 또 그 이름도 희미해졌다.


고산사에 다시 여인이 찾아들었다. 평범한 농촌 주부 이현홍(54) 씨였다. 인근에 퍼져있는 그녀의 사연을 추적해보면 사뭇 감동적이다.


이 씨는 듬직한 남편과 함께 착한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병마가 들어왔다. 당뇨병이 힘과 의욕을 앗아갔다. 거기에 하늘 같이 의지했던 남편도 심장병을 앓아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당뇨병과 고혈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들이 취중에 4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병원에 실려갔다. 아들의 모습이 너무도 처참해서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이 씨는 귀한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상이 싫어졌다. 병원에서는 우울증이 왔으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한숨과 울음소리가 담을 넘어갔다. 마을 전체가 가라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노보살이 이 씨를 찾아왔다. 노보살은 그녀의 몰골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대로 가면 안되겠구만. 산 너머에 있는 고산사에 가서 스님을 만나보면 좋을거야.”
노보살은 불심이 깊었다. 그말을 들은 이 씨는 다음 날 고산사를 찾아갔다. 정확히 4월 14일이었다. 초봄이었지만 바람이 매웠다. 이 씨는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의 문을 두드렸다. 주지스님이 비구니라서 쉽게 다가갔는지도 몰랐다.


성화 스님은 이 씨를 보는 순간 속으로 놀랐다. 그녀의 온 몸은 슬픔과 아픔덩어리였다. 건드리면 금방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내 흐느끼면서 속에 든 얘기를 꺼냈다.
“스님, 저는 몸이 많이 아프고 집은 가난합니다.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저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성화 스님이 말을 받았다.
“돈 없어도 괜찮습니다. 경내 풀 한 포기만 뽑아도 복이 됩니다. 발품을 팔아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스님은 이 씨의 아픔을 품었다. 마침내 이 씨는 날마다 절에 오겠다고 약속했다. 주지 스님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러나 속으로 그 약속이 한 달을 갈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연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약속대로 이 씨는 절을 찾아갔다. 절로 가는 길은 청룡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고산사는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에 있었고, 이 씨의 집은 서부면 판교리에 있었다. 이름대로 청룡산이 용처럼 드러누워 면과 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교통편 또한 마땅찮아 청룡산을 완전히 넘어 가야 했다. 이씨 집은 청룡산 자락에 붙어 있었다.


혼자서 주사기를 찔러 인슐린을 투약하고, 다른 여러 약들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절로 가는 길은 고행이었다. 얼마 오르지 않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옛날에는 지름길이었지만, 지금은 인적이 끊겨 산길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쉬다가 오르고 다시 쉬었다. 그렇게 한나절이나 걸려 산을 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다음날 다시 집을 나섰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은 가벼운 듯했다. 부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니 가슴속에 뭉쳐있던 그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듯했다. 그렇게 한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을 뵈었다. 주지 스님이 내심 놀랐다.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이 씨의 얼굴에 희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은 가벼워졌습니다

 

부처님 앞에 눈물 흘리고 나니
가슴 속에 뭉쳐 있던 무언가
빠져 나간듯 후련했습니다”


스님은 그에게 여연심(如然心)이란 불명을 내렸다.(지난 해 10월 수덕사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처음 마음이 부디 변치 말라’는 당부였다. 스님은 “나무 관세음보살”과 함께 산을 오르내리니 “산왕대신”을 외우며 다니라고 일렀다. 그리고 절에 들어와 부처님을 받드는 법을 일러줬다.


보살 여연심은 고산사를 정성으로 보살폈다. 절에 들어오면 우선 경내에 서있는 석조여래불을 뵙고 법당에 들어가 법당 구석구석을 살핀 후 108배를 했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면 스님과 차를 마셨다. 모든 것을 비우고 난 후의 차 한 잔, 그 시간은 매우 향기로웠다.

 

여연심 보살은 염불을 하며 산길을 오르내렸다. 보살 혼자서만 다니는 ‘여연심의 길’이었다. 그 길에 염불이 떨어졌으니 그냥 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산짐승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놀랐지만 갈수록 담대해졌다. 그것은 마음에 평화가 스며들었음이었다. 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요즘은 다가가 지팡이로 갈 길을 열어준다. 산길은 결국 부처에게로 다가가는 구도의 길이었다. 눈이 오면 눈길을, 비가 오면 비속을 걸었다. 가쁜 숨과 눈물과 염불이 스며 있었다.


가피가 있었다. 여연심 보살은 인슐린 주사와 약을 끊었다. 솟아나는 기쁨으로 우울증도 지그시 눌러 없앨 수 있었다. 남편은 산을 오르는 아내가 미욱해보였지만 언제부턴가 부처는 아니더라도 아내만은 믿게 되었다. 아들은 몸을 추스르고 옛날 직장에 복귀했다. 지난 겨울에는 산길을 걷는 어머니를 위해 객지에서 아이젠을 보내왔다. 그걸 신발에 차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자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회향이었다. 1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보살 여연심은 처음처럼 산을 오른다. 염불이 길을 여니 몸과 마음이 가볍다. 부처의 가피가 어찌 한 순간에 흘러들 것인가. 세상은 어찌 한 순간에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여연심 보살의 웃음 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고산사는 작다. 하지만 성화 스님은 말했다.
“우리 법당은 10명이 들어도 꽉 차고 30명, 40명이 들어도 똑같이 꽉 들어찹니다.”
맞다, 고산사는 유마거사의 방이다. 성화 스님은 법당에서 기도를 드리면 모든 것이 충만해진다고 한다.
‘전생에 내가 살던 곳이구나.’
안식을 퍼 올리는 청룡산의 자궁, 사람이 들어서야 비로소 솟아오르는 절, 산은 낮아도 기도가 높은 고산사(高山寺). 욕심은 생겨나는 대로 내려 보내고 고산사는 오늘도 맑다.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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