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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베제클리크(伯孜克里克)석굴

무지·탐심 광풍에 유린당한 위구르 왕가의 ‘아름다운 집’

20C 초 독일·영국·프랑스 등
앞다퉈 실크로드서 유물 약탈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벽화 운반
경쟁자에 뺏기지 않으려 흙칠도

 

무지한 농민·이슬람교도 훼손에
60년대 이후엔 홍위병까지 가세

 

 

 

▲무토강 계곡을 따라 절벽에 조성된 베제클리크석굴은 쉽게 외부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사원이었다. 유물약탈꾼 폰 르콕조차도 이 옆을 지나면서 석굴 사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정비한 번듯한 회랑덕에 마치 성벽 같은 느낌이 든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의 베제클리크석굴은 그 이름덕분인지 일찌감치 유럽 열강 유물탐사꾼들의 표적이 됐다. 독일은 1902~1914년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타클라마칸사막 주변 실크로드에 ‘탐험대’를 파견해 베제클리크를 유린했다. 이어 1909~1910년에는 러시아의 올덴부르그가, 1915년엔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베제클리크에 나타났다. 일본의 사업가이자 가업으로 물려받은 주지승의 자리도 겸하고 있던 오타니 고즈이도 1902~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실크로드 유물 탐사에 나서며 베제클리크를 빠뜨리지 않았다.


각국의 유물탐사꾼들은 베제클리크 뿐만 아니라 투루판 주변에 밀집해 있는 석굴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며 유물을 쓸어 모았다. 독일 탐험대의 폰 르콕은 ‘새롭고 흥분되는 유물을 단 하루도 발굴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후일 회상할 정도였다. 유물탐사꾼들은 어느 곳에서 고대 도시의 흔적이 발견됐다거나 유물이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경쟁자들보다 앞서 도착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가장 먼저 유적에 도착한 탐사꾼들은 엄청난 양의 벽화와 조각상 등을 닥치는 대로 뜯고 파내어 전리품처럼 챙겨갔다. 유물을 실어 나를 말과 낙타, 그리고 시간이 부족할 뿐이었다. 뒤따라 도착한 이들은 앞서 온 탐사꾼들이 다 실어 나르지 못한 유물들을 챙겼다.

 

그래도 서운치 않을 만큼의 벽화와 조각상, 고대문헌 등을 건질 수 있었다. 유물의 양은 방대했고 고대 도시의 유적과 석굴사원 등은 곳곳에 산재해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상자의 유물을 챙겨들고 귀국하면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박물관에서 벽화와 조각상 등을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사막 가운데 미지의 땅에 눈부신 불교문명의 자취와 그 유물들이 산적해있다는 탐사꾼들의 영웅담과 함께. 유럽은 열광했다. 더 많은 유물 확보를 위한 재정지원이 이뤄졌고 2차, 3차 원정대가 파견됐다. 그리고 더 많은 유물들이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실려 나갔다.

총 네 차례 탐험대를 파견한 독일은 1차 탐험대가 46상자의 유물을 싣고 귀국한 후 이곳 베제클리크를 집중 공략했던 2차 탐험에서 103상자, 3차에서는 더 많은 128상자의 유물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4차 탐험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지만 않았다면 더 많은 유물들을 노획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베제클리크 약탈에 있어 르콕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1만2000루블의 금화를 넣은 주머니위에 앉아 한 손에는 라이플권총을 든 채 실크로드에 도착한 르콕은 투루판에 4개월여를 머물며 베제클리크를 비롯한 토욕구천불동 등 일대의 석굴사원들을 마음껏 드나들었다. 떼어낸 석굴 벽화들은 베를린박물관에 전시됐다. 그는 이러한 행동이 유물보호를 위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라 여긴 듯 하다. 르콕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령 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서는 그런 르콕의 자부심이 물씬 묻어난다.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 방은 모든 벽화가 완벽히 옮겨온 하나의 작은 사원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고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해 유물을 ‘약탈’했으며, 그 유물들을 박물관에 완벽하고 안전하게 ‘유폐’시켰다는 자부심 말이다.

 

 

▲독일 탐험대의 폰 르콕이 4개월 간 머물렀던 집. 토욕구천불동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에 머물며 르콕은 투루판 일대의 석굴과 유적들을 마음껏 약탈했다.

 


독일 탐험대가 실어간 벽화와 조각상 등은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베를린 폭격으로 박물관이 파괴되면서 상당수 사라졌다. 특히 뜯어온 벽화를 시멘트벽에 고정시켜 석굴사원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사용된 벽화들은 베를린 폭격을 피해 다른 유물들이 지하수장고로 옮겨지는 동안에도 떼어내지 못해 끝내 박물관과 운명을 같이 해야 했다. 그렇게 사라진 벽화가 절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실크로드에서의 유물 약탈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유물탐사꾼은 비단 르콕 만은 아니다. 이는 당시 실크로드의 정치·문화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신장웨이우얼 지역 대다수는 당시 이슬람교가 장악하고 있어 특히 불교사원과 유물에 대한 파괴행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또 유적지에서 금붙이를 찾아내는데 혈안이 된 도굴꾼들도 많았다. 그들은 벽화나 조각상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금을 찾기 위해 ‘돈이 안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주저 없이 헤집었다. 유럽인들이 벽화나 조각상에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퍼진 후에는 평범한 노인들까지 곡괭이를 들고 유적을 파헤쳤다. 농부들은 볏짚 등이 섞여 있는 유적의 흙 담장을 부숴다가 농토를 복토하는데 썼다. 목재가 귀한 사막지역의 주민들에게 고대 건축물에 사용된 나무기둥과 들보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땔감이나 건축 자재가 됐다. 특히 벽화에 사용된 다양한 색채의 안료를 농작물에 이로운 특수 비료라 여겨 벽화를 긁어가기도 했다. 또 그림 속 인물과 동물들이 밤이면 살아나서 마을사람들과 동물,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고 믿었던 무지한 민중들은 벽화 속 불보살상과 인물들의 눈과 입을 파내버림으로써 ‘악령’이 나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무지하기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둔황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본 중국 관리들은 ‘그냥 있던 자리에 보관하라’고 할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 당국이 자국 내 유물의 해외 반출을 금지시킨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다. 그때까지 실크로드, 특히 당시 유럽인들이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 부르던 텐산남로와 사막남로 상에 산재했던 고대 도시와 유적, 특히 석굴사원들은 정부로부터도, 지역주민들로부터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버려진 과거였다.


이후에도 계속된 잦은 지진과 1960~1970년대의 중국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들이 자행한 무자비한 문화재 파괴행위까지 생각해본다면 과연 어떤 것이 진정 옳은 길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실크로드 일대를 유린했던 유물탐사꾼들의 행위는 분명 ‘탐험’ ‘조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약탈이었고 ‘보호’ ‘구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문명파괴’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앞서 지나온 쿰투라석굴과 키질석굴, 키질카르가석굴에 이어 ‘아름답게 장식한 집’ 베제클리크석굴에 도착했을 때 그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화염산 아래 무토강(木頭江)계곡 옆 절벽 허리에 자리 잡고 있는 베제클리크는 입구에 서도 석굴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몸을 감추고 있다. 무토강 계곡이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입구는 광장같이 넓다. 그 끄트머리에서 절벽 아래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따라 10여 미터를 내려가니 초승달처럼 굽이도는 계곡 절벽 중간에 석굴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베제클리크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은 5세기말부터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굴은 이 지역이 위구르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9~10세기 왕가의 지원하에 조성됐다. 대부분의 벽화도 이 시기의 것이지만 석굴과 벽화 조성은 14세기까지도 계속됐다.


가장 먼저 살펴본 20호 굴은 10세기, 베제클리크석굴 조성이 절정에 달했던 위구르왕국 시기의 벽화가 발견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다. 벽화를 옮기기 쉽게 네모반듯한 모양의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흔적들만 무수하다. 이곳에는 위구르 왕가의 왕과 왕비 귀족 등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각종 공양도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독일 베를린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벽면에 남아있는 위구르공주의 모습은 당시 위구르 왕가의 단면과 함께 이 석굴을 장엄했던 벽화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7호굴 천장엔 천불도가, 31호굴엔 흐릿한 색채의 공양도가 남아있어 벽화의 원래 모습을 상상하게 하지만 대부분 불보살상과 공양자들의 눈과 입은 여지없이 파헤쳐져 있다. 정면 아래엔 와불상이 조성돼 있었으나 일찌감치 파헤쳐졌다. 그나마 뜯어가고 남은 벽화에는 누렇게 흙칠이 돼 있다. 유물탐사꾼들은 다른 경쟁자들이 남은 벽화를 뜯어가지 못하도록 흙칠을 해 놓곤 했다는데 그 흔적인가. 아니면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벽화 위에 진흙을 발라버렸다는데 그 상처인가. 어느 쪽이든 흙을 제거하면 벽화의 색이 같이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자연 탈락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33호굴 정면엔 부처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각국 왕자들을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모습은 누군가 떼어갔는지 흔적도 없고 법신 뒤로 보살과 호법신장들, 그리고 각국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신라의 화랑모와 유사한 모자를 쓰고 있어 신라 왕자라는 설도 있지만 아직은 확실치 않다.


베제클리크에서 답사한 6개의 석굴은 그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더 이상 석굴의 벽화가 훼손되지 않도록 벽 앞에 유리벽을 설치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초라함이다.

 

 

▲베제클리크 20호 석굴에 남아있는 위구르 공주의 벽화. 석굴 내 대부분의 벽화들이 약탈당해 남아있는 것들은 단편에 불과하지만 세련된 선과 색, 인물의 우아한 자태 등은 이 석굴의 벽화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탐험’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약탈꾼들, ‘종교’의 묵인 아래 훼불을 자행한 맹신적 무슬림들, ‘악령’을 막기 위해 벽화의 눈과 입을 파헤친 무지한 농민들, 보물을 찾기 위해 유적을 파헤친 도굴꾼들, 뇌물 몇 푼의 달콤함에 취해 유물의 보호에 관심조차 없던 관리들, 사상과 이념의 깃발 아래 문화유산을 짓밟은 홍위병들. 과연 누구에게 이 아름답게 장식됐던 집의 초라한 오늘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까. 대상을 찾을 수 없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멈추질 않는다. 허무한 바람만 계곡을 따라 베제클르크를 휘감고 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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