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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 자락 ‘알 품는 곳’에 부처님을 모시다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2.08.14 17:39
  • 수정 2012.08.14 17:41
  • 댓글 0

3. 청양 포란사

 

▲비봉산 자락이 품고 있는 포란사에는 번듯한 법당도 유려한 전각도 없다. 화재로 전소된 대웅전 자리엔 온갖 야생초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그 속에서 정법도량 복원의 원력도 함께 자라고 있다.

 

 

충남 청양 포란사는 비봉산 자락에 앉아 있다. 늘씬한 소나무들이 열 지어 서있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작은 평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경내에 들어서도 도무지 사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담한 기와집 앞에 ‘큰 법당’이라고 써 붙였다. 보고 있으면 안쓰럽다. 비봉산 포란사는 원래 천태산 약수암 절집을 그대로 옮겨왔다. 약수암 일대가 광산으로 개발되자 비봉면 주민들이 부처님을 ‘알을 품는 곳’으로 모셔왔다. 주민들의 힘을 모았으니 그 부역이 향기로웠다. 그런데 200년도 넘은 대웅전과 그 안에 모신 목불이 그만 불에 타버렸다. 2008년 가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났다. 대웅전을 잃은 포란사는 폐사지와 다름없었다. 그곳에 비구니 자혜 스님이 찾아들었다. 다시 불사를 이뤄 청정도량을 이루려는 원력을 세웠다. 그러자 스님을 따라 멀리서 노보살이 찾아왔다. 자혜 스님 있는 곳에는 그 곳이 어디라도 노보살이 따라갔다. 스님과 노보살, 그 깊은 인연을 따라가보자.


광주에 사는 40대 안순심 주부는 독서를 즐겼다. 그날도 충장로 중앙우체국 옆 서점에 들렸다. 문득 ‘무소유’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제목이 주먹보다 크게 보였다. 법정 스님의 글은 맑고 그윽했다. 특히 ‘무엇인가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홀로 3남3녀를 먹이고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험회사에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다. 6남매는 어머니 바람대로 잘 자랐다.


그녀의 나이도 어언 5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몸은 그리도 바쁘건만 마음이 허전했다. 다시 법정 스님의 책들을 찾아 읽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지만 스님이 곁에 있었다. ‘그분을 닮고 싶어’, ‘스님의 길을 따라가고 싶어’ 불교 관련 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불교는 알듯 하면서도 알 수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할지도 몰랐다. 무조건 조계종 총무원을 찾아갔다. 법회에 참석하고, 강론을 듣고, 세미나에도 쫓아다녔다. 남이 하는 대로 법당에 엎드려 절하고 기도하고 염불을 했다. 열심히 절집을 드나들었지만, 그러나 흉내내기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보살계를 받았다. 법명은 천진화(天眞華)였다.


다시 우연히 신문에서 선운사 도솔암에 관련한 안내광고를 보았다. ‘지장보살을 모신 청정한 기도도량’이라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무작정 찾아갔다. 그런데 도솔암이 안 보살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주변 풍광이 정겹고 지장보살(보물 제280호)의 모습이 포근해 보였다. 직장 일을 마치면 서울에서 마지막 고속버스를 탔다. 고창에 도착하면 한밤중이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선운사로 향했다. 깊은 밤 선운사에서 다시 도솔암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오솔길이었다. 그런데도 그 밤길이 무섭지 않았다.


길이 도솔암과 참당암으로 갈리는 지점에 이르면 개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개 이름은 지혜였고, 도솔암에서 공양을 했다. 안 보살이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앞장서 도솔암으로 걸어갔다. 지혜는 안 보살이 철야기도를 마칠 때까지 법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의 배웅을 받으며 도솔암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한 숨도 자지 않았지만 몸은 가볍고 정신은 맑았다. 친정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온 듯, 가슴에 기쁨이 차올랐다. 떠오르는 햇님이 그렇게 맑게 보일 수 없었다. 어떤 달에는 무려 14번을 찾아갔다. 이틀에 한번 꼴로 지장보살 앞에 엎드린 셈이다. 안 보살의 기도가 제법 깊어졌다. 속으로 뇌었다.


“도솔암 가는 길은 임 찾아가는 길이고, 나 찾아가는 길이다.”
그렇게 신심이 쌓여 갈 때였다. 갑자기 얼굴 반쪽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파왔다. 통증이 너무도 심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29살에 앓았던 중이염이 도졌나 짐작했지만, 막상 병원에 가니 병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휴가를 얻어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차 속에서 불현듯 기도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안 보살은 병원 대신 집안에서 기도를 했다. 오로지 “지장보살”만을 불렀다. 마침내 작정한 일주일 기도를 마쳤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누군가 안 보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너무나 고왔다. 세상에서는 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안 보살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지장보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보니 도솔암의 부처님을 닮은 듯했다. 지장보살은 진주알 같은 하얀 약을 주었다. 그러나 안 보살은 이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지장보살이 안 보살의 손에 약을 놓고 털어넣게 했다. 안 보살이 이를 꿀꺽 삼키면서 꿈이 깨었다. 그리고 얼굴 반쪽을 쪼아대던 통증이 사라졌다.

 

 

▲ 포란사 큰법당은 초라하지만 당당하다.

 


그해(1985년이나 86년쯤) 12월 5일 서둘러 김장을 마치고 선운사 도솔암을 찾아갔다. 역시 깊은 밤 고창에 도착했다. 눈발이 하나 둘 날렸다. 택시를 타고 선운사에 내려서 오솔길로 들어섰다. 도솔암 돌계단을 단숨에 올라 법당에 꿇어앉았다. 부처님을 우러러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엉엉 울었다. 방석이 흠뻑 젖었다. 살아 있음이 부끄러웠고, 또 감사했다. 그러면서 용서를 빌었다.


“먼지만도 못한 제가 너무 교만하고 방자했습니다.”
돌아보니 자신은 욕심덩어리였다. 잘난 체하고 남을 무시하고 살았다. 먼저 간 남편에게도, 이웃에게도 못할 짓만 했다.


안 보살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고요해졌다. 그리고 법당 안에 오직 촛불만 켜져 있을 뿐인데도 빛이 넘쳤다. 그 빛으로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지장보살만이 더 크게 빛나고 있었다. 나중에는 지장보살과 안 보살이 공중에 떠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순간처럼 느껴졌는데 밤이 지나갔다. 새벽이 밝아오는 지도 몰랐다.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살님 예불시간이 지났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비구니 스님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정갈했다.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웠다. 자혜 스님이었다. 스님 뒤로 보살 셋이서 손을 모으고 ‘안 보살의 눈물’에 경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스님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자혜 스님이 다시 말했다.


“간밤에 눈이 내려 쌓였으니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십시오.”
눈 쌓인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안 보살은 자혜 스님이 고맙고 부러웠다.
“저렇듯 어린 데도 단정하시구나.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구나. 나는 언제나 스님의 발밑에라도 이를 수 있을까.”


온 산하가 눈에 덮였다. 눈길을 걸으니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맞는 듯했다. 안 보살은 스승을 얻었다. 그때부터 셋째 딸과 같은 나이였지만 자혜 스님을 지성으로 섬겼다.


자혜 스님 출가에도 법정 스님의 책이 한몫을 했다. 꿈 많은 여고생 박수현은 친구들과 칠갑산을 오르다 장곡사에 들렀다. 장곡사는 한편의 시처럼 다가왔다. 신비롭고 정겹고 편안했다. 장곡사를 오르는 계단에 앉아 주변을 살피니 선경이었다. 마침 화단 위 담장에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걸 보며 유년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수현은 그곳에서 3년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타향살이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경리 사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사장은 2중 장부를 작성토록 했다.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현실이 지옥 같았다. 그리고 서울은 거대한 매연덩어리였다. 그때 법정 스님의 글이 다가왔다. 글 속의 자유로움과 청정함이 그리웠다. 다시 잃어버린 장곡사의 풍경이 살아났다.

 

비봉산 포란사는…


200년 이어져 온 대웅전·목불
4년 전 원인 모를 불로 전소
스님·노보살 원력 모아 복원


안순심 보살과 자혜 스님은…


“50대 넘어 불연 맺은 노보살
“스님 만나 포란사 복원 서원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하나”


어느 날 몸담고 있던 불교단체에서 수련대회 장소를 물색했다. 수현은 주저 없이 장곡사를 추천했다. 그리고 현지답사를 위해 장곡사를 찾아갔다. 장곡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수련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스님을 찾아갔다.

 

“저 같은 사람도 스님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수현이란 이름을 버렸다.

 

자혜 스님은 자주 거처를 옮겼다. 불가의 인연이란 그런 것이라, 안 보살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러면 안 보살은 어떻게든 찾아가 인연을 이어갔다. 스님은 부여 무량사, 칠갑산 정혜사, 안성 칠장사, 강진 정수사, 태백산 정안사, 사자산 법흥사, 음성 미타사, 서울 자인사 등을 전전했다. 그때마다 수소문해서 스님을 찾아갔다.


안 보살은 사경(寫經)을 한다. 거의 20년이 됐다. 도림 스님(법화경근본도량 법화정사 회주)으로부터 법화경 사경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경은 마음공부에 그만이었다. 바르게 앉아야 하고, 바르게 봐야하고, 잡념을 없애야 글자를 옮겨 적을 수 있었다. 안 보살은 사경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식탁에 한지를 올려놓고 사경을 했다.


한 번은 꿈에 저승사자들이 찾아왔다. 13년 전, 71세 때였다. 당시 안 보살은 몸이 많이 아팠다. 한 사람은 하얀 도포차림이었고, 두 사람은 검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저승사자들은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안 보살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는 나이만 먹었지 공부를 못해 아직 유치원생이나 다름없어요. 불교 공부를 더하고 싶으니 가자고 하지 마시오.”


그러자 검은 옷의 사자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하얀 옷의 사자가 알겠다며 그냥 돌아섰다. 올 연초(음력 정월 초닷새)에도 저승사자들은 안 보살의 꿈속에 찾아들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방안에 누워있었다. 꿈속에서도 안 보살이 소리쳤다.


“너희들 누구 말 듣고 여기 누워있는 것이냐.”

그러자 저승사자들이 힐끔거리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자혜 스님한테 전화가 왔다.
“보살님 오늘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안 보살은 대뜸 눈치를 챘다. 저승사자들이 자혜 스님 꿈속에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저승사자들이 스님 꿈속까지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보살님,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꿈에 나타나 보살님을 데려 가겠다 했습니다.”
“스님, 제 꿈에 나타났기에 제가 야단쳐서 쫓아냈습니다.”
스님과 보살이 웃었다. 스님은 절에 있고, 보살은 집에 있었지만 서로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

 

 

▲자혜 스님과 안순심 보살.

 


2004년 7월1일 사랑했던 막내아들이 세상을 떴다. 어미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막내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을 떠났고, 앞길이 확 트인 젊은 과학도였다. 그런데 오하이오 주립대학 기숙사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미국으로 떠날 때 염주와 ‘법화경’을 쥐어주었는데 그것들은 침대 맡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아들과 함께 염주와 ‘법화경’이 돌아왔다. 안 보살이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현세는 그릇이 너무 작아서 더 큰 나라에서 너를 데려갔구나.”
연기와 윤회를 알지 못했다면 그 죽음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러나 안 보살은 내세를 믿었다. 현실의 슬픔보다는 다시 만날 기쁨을 준비해야 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경을 했다. 49재를 맞을 때까지 울지 않았다. 딸이 이를 보고 “독한 엄마”라고 했다. 아들을 화장시키고 그 가루를 밥과 버무려 동물들의 먹이로 뿌려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아들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어미를 용서해주렴. 그리고 부디 큰 스님이 되거라. 나는 상좌가 되어 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싶구나.”


사경을 하는 동안 안 보살은 눈이 좋아졌다. 도수 높은 돋보기를 썼지만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환해졌다. 이제 안경 없이도 신문을 읽을 수 있다. 사경에 대한 부처님의 가피였다. 이에 보답하듯 안 보살은 쉼 없이 정진했다. ‘법화경’ ‘금강경’ ‘지장경’ ‘화엄경’을 베꼈다. ‘법화경’은 한자로만 20번도 더 사경했다.


어느 날 안 보살은 꿈을 꾸었다. 사경 한 장 한 장이 깃발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사경의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게다. 안 보살은 교통사고를 당해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그래서 절을 올릴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사경 정진’을 하고 있다.


안 보살은 이제 84세이다. 군포시 산본동 매화아파트에서 사경을 하고 있다. 날마다 발원에 날개를 달고 있다. 주변에서는 안 보살에게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상일 뿐이라며 뿌리쳤다. 안 보살은 언젠가 저승사자들이 다시 찾아 올 터인데 그때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혜 스님은 포란사에서 날마다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경내 이곳저곳 청소만 하려해도 한나절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여름의 야생초들은 워낙 사나워서 조금만 방심해도 사찰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안 보살이 사찰에 들리면 스님도 긴장해야 한다. 불편한 몸인데도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보살이 감히 스님에게 잔소리를 한다.


스님은 작은 기와집에 부처님을 모셨다. 그리고 그 앞에 ‘큰 법당’이라 써 붙였다. 그것은 그 속의 기도가 마음들을 움직여 대웅전 불사를 이룰 것이라는 염원이 서려 있는 듯했다. 훗날 포란사가 정법도량으로 우뚝 솟아오르면 누군가 자혜 스님과 안 보살의 인연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비록 모든 것들이 엎드려 있지만 스님의 원력은 산처럼 높다. 포란사는 지금 스님과 보살의 아름다운 인연을 품고 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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