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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변의 처 허씨

전국 산천의 명찰 순례하며 구법의 길 걷다

남편 여읜 후 불교에 귀의
감응사 창건해 왕생 발원
통도사 순례땐 사리 얻기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고려시대를 통틀어 나라에서 대사 칭호를 받은 유일한 비구니 성효 스님. 그녀는 뛰어난 승려이자 한평생 법도에 어긋남 없는 삶으로 당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충숙왕은 그녀가 입적한 후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眞慧大師)’로 추봉했으며, 비구니였음에도 그의 묘지명에는 세속 지위인 ‘관인(官人) 김변의 처 허씨’로써 남다른 인품과 행적이 기록됐다.


무엇보다 그녀는 불교에 통달한 고승이면서도, 유교적으로 모범적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지닌다.


묘지명을 쓴 김개물은 그녀의 이같은 행적을 칭송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귀하면 현명하지 못함에도
현명하고 또 귀했다.
오래 살면 어질지 못함에도
오래 살면서 더없이 어질었다.
부인의 행실은 장부의 기운
많은 아들 사위 모두가 뛰어나다.”


이렇듯 만인이 칭송해 마지않던 그녀의 삶에도 남모를 고충은 있었다.


고려 귀족 허공의 장녀이자 충렬왕대 2등 공신 김변의 아내였던 허씨(1255~1324, 성효)는 매순간 무거운 짐을 지니고 살았다. 부모를 정성으로 모시는 효심 깊은 자식이자 지아비를 따르는 정숙하고 어진 처,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하는 어머니이자 지혜롭게 식솔을 이끄는 안주인까지, 세상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 역할과 그에 따른 책임을 요구했다.


자유롭고 당당한 성품을 지닌 그녀에게 그것은 한없이 무거운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허씨는 누구보다 뛰어난 품격과 면모로서 이를 원활하게 수행해 냈다.


그런 삶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47세 무렵,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하면서부터다.


남편 김변은 그녀가 14살 때 처음 부부의 연을 맺은 후 33년의 세월을 함께한 삶의 도반이었다. 슬픔에 빠진 그녀는 나라의 의식을 거절하고 직접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개경 대덕산의 남쪽 기슭에 남편을 안장한 뒤, 묘소와 마주한 곳에 집을 짓고 항시 살폈다.


허씨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불교에 기대어 다스리고자 했다. 이에 집 옆에는 감응사라는 사찰을 짓고, 매일같이 이 곳을 찾았다.


감응사에서 그녀는 불경을 읽고 금과 은을 섞어 사경을 하는 등 일심으로 남편의 왕생을 발원했다. 감응사를 원찰 삼아 집안의 재물과 보물을 보시해 승려를 청하고 불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꼬박 1년의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슬픔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친지로부터 당나라에서 온 고승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부처님 가르침에 기대 마음의 평안을 갈구하던 허씨는 즉시 스님을 초청해 법문을 들었고 깊이 감화됐다. 한평생 그녀를 옭아맸던 속박과 그로 인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들이 덧없이 흘러가는 한낱 뜬구름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시시각각 일어나던 분별심과 아상을 내려놓고 온 마음으로 불교에 귀의했다. 이듬해에는 철산화상으로부터 대승계를 받았다.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제2의 인생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감응사를 오가며 수행에 매진하던 그녀는 문득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한평생 그녀를 옭아맸던 세간의 잣대들이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 보낸 지 꼭 10년이 되던 해, 그는 마침내 길을 떠났다. 한평생 머물렀던 개경을 떠나 전국의 산천을 순례하고자 발원한 것이다.


“신해년(1311, 충선왕 3년), 57세의 나이로 미륵대원에 올라 장육석(丈六石)에 예를 올리고 여러 산천을 순례하여 열반산(涅槃山)과 청량산(淸凉山)의 성지까지 갔다.”


그녀의 삶을 기록한 묘지명에 행적의 일부가 기록돼 있다. 미륵대원은 당시 행정구역상 충주목,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찰이다. 열반산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며 청량산은 안동도호부(지금의 경상북도)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허씨는 개경에서 충청북도, 강원도, 경상북도까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머나먼 여정을 이어간 셈이다. 특히 금강산과 청량산 모두 당시 명찰이 자리했던 성산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면, 그녀는 이때 전국의 사찰과 불교성지를 찾아 본격적인 순례길에 나선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행보를 5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자동차나 기차가 다니지도 않던 시절, 허씨는 오로지 두발과 마차를 이용해 머나먼 길에 올랐을 것이다. 깊은 신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증명하듯 4년에 걸친 순례의 마지막은 출가로 귀결됐다. 순례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온 61세의 그녀는 무명초를 잘라내고 비구니가 됐다. 법명은 성효(性曉), 계단주이자 스승은 백수 스님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성의 출가는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사례가 많았지만, 허씨의 경우 사분율(四分律)에 의거한 정식절차에 따라 비구와 비구니 각 10명의 스님이 증명하는 가운데 백수 스님을 계단주로 출가했다. 이는 허씨의 여섯 번째 동생이 충선왕과 결혼했고 다른 동생과 조카들도 왕실과 통혼하는 등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교 도리에도 어긋남 없어
입적 후 ‘진혜대사’ 추봉
고려시대 통틀어 유일사례


비구니가 된 이후의 행적을 통해, 그녀가 국가가 공인한 계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과 개경의 승단에 정식 등록된 비구니였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묘지명에 남아있는 기록, “비구니가 된 이듬해 다시 길을 떠난 그녀가 통도사를 찾아 사리 12과를 얻고 계림(경주) 일대를 자유롭게 순례했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통도사는 당시 고려를 찾은 원나라 사신들이 참배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출가 1년차 비구니 신분임에도 국찰이나 다름없었던 곳에서 사리 12과를 받아 모셨다는 사실은 선뜻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허씨, 즉 성효 스님은 왕실의 후원으로 통도사를 찾아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 아닐까 유추해 봄직하다. 어쩌면 그녀는 여섯 번째 동생 충선왕비와의 인연을 기반으로 왕실여성들의 신행을 이끄는 스승으로써, 나라의 지원을 받아 국가적 차원의 불사를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허씨가 출가한 계기도 주목해 볼만하다. 그녀는 대승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한지 10여년이 지난 후 비구니가 됐다. 출가의 직접적인 계기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4년간의 순례행보가 그녀의 출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순례를 통해 그의 불심은 더욱더 깊어져 마침내 본격적인 불제자의 길로 접어들게 됐을 것이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출가이유는 고려시대 당시 여성들의 활동 모습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여성들의 사찰 참배나 순례 목적의 여행은 어느 정도 허용되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어디든 거리낌 없이 나다니기엔 제약이 있었다. 특히 허씨가 살던 시대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로, 이미 성리학이 수용돼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아 가던 때였다.


때문에 남편을 여읜 귀족가문의 안주인 허씨의 순례는 그리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 스스로도 각별히 행동을 조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그녀는 출가를 통해 세속의 지위를 모두 벗어버리고 온전히 자유로운 신분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남편이 죽은 후부터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 때는 반드시 묘소를 찾았는데, 출가한 후에는 이를 그만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병진년(1316, 충숙왕 3년) 통도사에서 사리 12과를 얻고 계림(경주)으로 갔다. 계림은 장관(壯觀)이 많은 까닭에 마음껏 보고 그 뜻을 다하고 돌아왔다. 그녀가 다닌 산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것으로 마친다.”


짐작컨대 그녀는 출가한 이후에도 통도사와 경주 순례를 시작으로 전국의 산천을 돌며 본격적인 순례길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출가 전의 순례가 집안의 안주인을 보필하는 몸종들과 함께한 참배길이었다면, 비구니가 된 이후의 순례는 진정한 의미의 구법여정이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몸으로 나선 순례는 4년이 지난 후인 경신년(1320, 충숙왕 7년)에야 끝났다. 이후 더 이상의 순례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남은 생에서 특이한 점은 순례를 회향한 성효 스님이 말년에는 서울 남산의 장남의 집을 서쪽에 둔 자리에 초당을 짓고 머물렀다는 점이다. 이는 ‘지아비가 죽으면 맏아들을 따른다’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행보로 보여진다. 불교에 귀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평생 지켜온 세간의 가치를 굳이 허물지는 않았던 셈이다.


“허씨는 태정 원년(1321, 충숙왕 11) 2월11일 병이 들어, 3월4일 초당에서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 언변이 어지럽지 않고 동작이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관청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자 그 절의가 시종일관 왕제(王制)를 따른데 대해 찬탄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에 추봉됐으니 극히 드문 일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녀가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충숙왕은 그녀를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로 추봉했다고 한다. 충숙왕이 그녀에에 변한국대부인과 진혜대사의 칭호를 동시에 내린 것은 곧 그녀가 나라의 운영이념인 성리학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불교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했지만,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신행에 멈추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의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허씨.


그녀는 여성의 몸으로도 남다른 구도 열정으로 과감히 세상 밖으로 나아갔으며, 연로한 나이와 시대적 제약을 극복하고 전국 곳곳에 구도의 발자국을 찍으며 한 시대의 스승으로 우뚝 섰다. 그것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그 스스로의 발원한 바를 성취하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이는 열정이 아니었을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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