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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달마동굴과 초조암

기자명 법보신문

습기 가득한 동굴서 선종의 초조를 만나다

소실봉이 품은 달마동굴은
달마대사 9년 면벽했던 곳 


혜가의 잘린 팔뚝조형물엔
‘본래면목’이란 글자 남아

 

 

▲소실봉 정상에 올랐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집채보다 더 큰 달마대사는 초조암과 달마 동굴을 굽어보고 있었다.

 


달마대사는 달마 동굴로 가기 전에 소림사에 얼마동안 머물렀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달마 동굴에서 9년간 거(居)하는 동안 큰절인 소림사로부터 공양물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아마 달마대사는, 유서 깊은 소림사라 하더라도 법을 전할 제자를 찾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하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림사는 정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소림사는 496년 ‘북위’의 효문제라는 황제가 당시에 고승이었던 불타선사를 위해서 창건한 절이다. 즉, 국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지은 절이다보니 그 이후로도 내내 정치인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그 유명한 당태종도 소림사와 인연이 있었다. 쫓겨 다니던 시절에 소림사와 달마굴에서 피신하여 목숨을 건져 후일 황제가 되었다고 하니 사찰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얼마만큼 컸겠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TV에서 자주 방영되는 소림사 관련 무술영화는 그런 입장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예로부터 소림사 스님들이 무술을 배우고 익히며 전승해 온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곳 소림사 스님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관광객들을 상대로 무술시범을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소림사 안에서는 무술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저번에 왔을 때 필자가 만난 어떤 청년은 소림사 안에서 2년째 무술을 배운다고 했다. 충청도 천안 출신인데 한국 승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반가워서 뛰어왔다고 하였다. 타방 땅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더니….

 

 

▲ 달마 동굴 속 달마대사. 달마는 이곳에서 9년 도안 면벽수행 했다.

 


아무튼, 소림사 무술은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특징을 가지면서 소림사가 속해 있는 정주시 전체를 무술 도시로 만들었다. 아침 일찍 나가보면 여기저기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필자가 묵었던 여관 골목에서는 저녁 늦도록 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통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소림사 마당에 서있는 선무성지(禪武聖地)라는 돌기둥을 정주 시내에 옮겨야 할 것 같다. 정주의 경제 동력이 소림무술임을 보면서 이천년을 지켜온 중국 불교의 역할이 얼마만큼 대단한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소림사 쪽에 머무는 동안 볼만한 야외 공연이 있다고 해서 쫓아가 관람한 ‘선종소림음악대전(禪宗少林音樂大典)’은 그 스케일과 내용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산 전체가 무대인데 기획, 조명, 연출이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하였다. 2007년부터 공연을 시작하였다니 그 생명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공연을 보고 중국과 중국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웅장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면서 음악과 함께 나타내 보이는 선불교(禪佛敎)의 철학은 그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하다. 관람가격은 백위엔에서 천위엔까지 그 위치에 따라 다른데 좌석은 매일 매진된다고 한다.


중국은 지금 전통문화를 첨단기법과 잘 조화시켜 큰돈을 버는 방편으로 쓰고 있다. 그 때문에 불교 포교 또한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내심 필자는 방편바라밀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소림사, 왜 소림사라고 불릴까?


소림사가 속해 있는 산 전체는 숭산(崇山)이다. 숭산에는 소실봉과 태실봉이 있는데 소림사는 소실봉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소림사라고 불린다. 소림사도 중요하지만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의 행적을 좇는 입장에서는 달마 동굴이 훨씬 의미가 깊다. 쉬엄쉬엄 한 시간 반 정도 동굴까지 오르는 길은 그런대로 재미있다. 10년 전 처음으로 달마 동굴을 찾았을 때 ‘달마대사 숭산에서’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연둣빛 그리움으로 달려와
떡갈잎사귀 하나마저 살아 숨 쉬는 만고의 숭산은
5월의 풀냄새 가득 늘린 살갗으로
우리를 덥석 안았다.
서쪽의 일광보살과 동쪽의 월광보살은
한 하늘 한시에 촛불로 어우러져
우리의 해후를 그렇듯 증명하고
인과의 날줄과 씨줄은
소림굴의 먼지 앉은 거미줄일 뿐,
귀촉도는 그날처럼 무진 법문을 읊어 대었다.

 

 

▲달마 대사가 주석했던 초조암 입구.

 

 

소림굴은 곧 달마굴을 말한다. 달마굴을 가자면 ‘초조암’을 만난다. 요즘, 초조암은 비구니 스님들이 지키고 있다. 육조수식백(六祖手植柏), 육조 스님이 심었다는 천 삼백년 된 측백나무가 일품이다. 암자답게 당우는 서너 채에 지나지 않아 소박한 살림임을 엿볼 수 있다.


가는 길도 초조암과 달마 동굴을 닮았는지 고즈넉하다. 아랫동네, 소림사의 북적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차량 이동이 불가능한 이쪽 코스에는 통 관심이 없는 듯하다. 긴 산길을 오르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정말이지 달마 스님에게 반쯤 미친 사람들이 아니고는 애써 땀 뻘뻘 흘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두 번째 찾아가는 나로서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달마 스님과 분명 큰 인연이 있음을 느낀다.


동굴 입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불광보조(佛光普照)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고 쓰여진 깃발이다. ‘부처님 빛이 널리 비추니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응한다’라는 뜻이다.

 

 

▲ 달마 동굴 입구. ‘부처님 빛 널리 비추니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응한다’는 글이 먼저 눈에 띈다.

 


동굴은 비구니 노스님 한 분과 10대 후반 순하디 순한 여자 행자가 관리하고 있었다. 동굴 내부는 저번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에는 달마대사상 쪽을 돌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전면에서만 참배할 수 있는데 두어 평 되는 공간에 달마대사를 아주 크게 모셨기 때문에 사람 서너 명 들어가기도 힘들다. 동굴 진입 입구는 2~3m 거리로 소재는 모두 돌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동굴 벽면 여기저기 물이 줄줄 새는 것을 보고 비구니 스님에게 왜 그런가 물었더니 아마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은 동굴에 금이 가서 방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곳에서 정진하면 습기 때문에 금방 건강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필자는, 유심히 벽면을 살피면서 그 옛날 젊은 시절 토굴 생활의 어려움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여기서 면벽 9년! 제자 혜가 대사를 맞았던 눈 오는 날의 달마 동굴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슴 뭉클하다. 돌 벽면의 어느 한 쪽이 용암이 흘러내린 듯 윤기가 나면서 사람 팔뚝처럼 보였는데 비구니 노스님은 혜가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자른 팔뚝이라고 하였다. 눈여겨보니 누가 썼는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 혜가 스님이 법을 구하기 위해 자른 팔뚝이라는 벽면에 본래면목이 새겨져 있다.

 


아무튼 달마대사는 이곳에서 9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면서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여러 운동을 했을 텐데 그것이 달마권법의 원조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굴 크기에 비해 뜨락은 꽤 넓은 편이다. 안에 모셔 놓은 지금의 달마상은 흔히 우리가 그림이나 조각에서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눈썹은 짙다. 수염은 산적의 그것처럼 거칠게 나있고 양 입가는 처져 있다. 사진을 좀 찍으려고 했더니 비구니 스님이 안 된다며 만류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스님으로 달마대사를 많이 선전하는 사람입니다. 달마대사를 좋아해서 그림도 그려서 나눠주고,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빛’이라는 달마대사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몇 컷만 찍겠습니다.”


간곡히 부탁하자 그제야 마음이 동했는지 슬쩍 자리를 피해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 틈에 나는 제대로 된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순한 아가씨가 촛불을 잡고 거기에 의지해 후레쉬를 터뜨리니 어려웠지만 일이 된 것이다.
그 뒤로 오랫동안 그 아가씨의 고마움이 잊혀 지지 않아 앞으로의 삶이 전도양양하기를 마음 속 깊이 축원하였다.

 

 

▲ 소림사 앞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아이들.

 


우리 일행은 일주문처럼 크게 세워져 있는 묵현당이란 석조물을 뒤로하고 급히 소실봉 정상에 올랐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달마 동굴에서 정상까지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정상에는 집채보다도 더 큰 달마대사가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기를 당할 뻔한 일이 생겼다.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도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여권 든 지갑을 도난당해 크게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쪽으로 성지순례를 갈 사람은 참고할 일이다.


달마대사! 520년, 중국에 오셔서 우여곡절 끝에 제자 혜가를 만난 뒤 후위의 광통율사, 보리유지 등의 시기심에 희생되어 다섯 번이나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간신히 이겨냈으나 여섯 번째는 다 알면서도 자신의 열반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 후 달마대사는 ‘수휴척리(手携隻履)’ 즉, 신 한 짝만을 메고 총령고개를 넘어서는 신통을 보이시기도 하였다. 양무제는 늦게나마 이렇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아!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으니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것을 원망하고 그것을 한탄하노라.”
오늘날 우리들이 양무제 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 볼 일이다.


달마대사의 주된 사상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다.


우학 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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