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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아나두라 대논쟁

1873년 8월26·28일 스리랑카서
불교와 기독교간의 교리적 논쟁
불교 비판한 목사·전도사에 맞서
구나난다 스님 불교 탁월함 역설

 

 

▲논쟁이 벌어진 곳에 세워진 랑콧트 사원.

 

 

19세기 아시아는 제국주의를 앞세운 서구 열강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졌다.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은 경제적 침탈 뿐 아니라 식민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성 말살 등 문화적 침탈도 함께 진행했다. 대신 단절된 그 자리에 배타성이 강한 기독교를 강제 수혈했다. 19세기 스리랑카도 이런 제국주의의 침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815년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기독교를 앞세워 스리랑카의 전통종교였던 불교를 탄압했다. 스님들의 탁발을 금지시켰으며 사찰소유 부동산까지 빼앗았다. 그런가하면 스님들의 수행공간에 일반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청정 승가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정책까지 일삼았고, 목사와 전도사를 통해 기독교를 주입시키면서 불교를 미신의 종교로 몰아붙였다.


위기를 느낀 스리랑카 불교계가 영국 기독교계의 만행을 규탄하며 불교부흥 운동에 나섰다. 1860년대부터 스리랑카 불교계는 기독교에 대항해 불교포교기구 구성, 활자 매체를 활용해 불교를 널리 알리면서 대중 계몽에 적극 뛰어들었다. 특히 이들은 불교와 기독교의 대중적 논쟁을 통해 어느 종교가 더 타당하고 올바른가에 대해 대중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1873년 8월26·28일 스리랑카의 작은 마을 ‘파아나두라’에서 이틀에 걸쳐 진행된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 논쟁이 대표적이었다.


논쟁은 1873년 6월 영국 감리교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가 파아나두라의 한 교회에서 불교 교리를 폄하한 설교를 하면서 비롯됐다. 이에 대해 스리랑카 구나난다 스님이 맹렬히 비판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결국 양측은 ‘상대 종교에 대한 공격과 그에 대한 반론, 자기 종교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방식’ 등 토론의 규칙까지 마련하고 공개 교리논쟁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양측은 모두 이 논쟁에 사활을 걸었다. 결과에 따라 향후 스리랑카에서 두 종교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73년 8월26일 오전, 파아나두라에 모인 1만여 대중들은 불교를 대표한 구나난다 스님과 기독교를 대표한 데이비드 드실바 목사, 시리만나 전도사의 치열한 공방을 숨죽여 지켜봤다. 선공에 나선 실바 목사는 불교의 무아와 윤회에 대해 공격하면서 불교를 사이비 종교로 폄하했다. 또 오온(五蘊)에 대해서도 부정하면서 영원불멸의 영혼을 믿는 기독교를 믿어 줄 것을 호소했다.


반격에 나선 구나난다 스님은 실바 목사가 지적한 불교에 관한 견해는 불교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나온 무지한 편견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 사상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다. 특히 스님은 “기독교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을 번뇌에서 구제하기보다는 이미 신앙하고 있는 종교에서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구나난다 스님의 반격에 당황한 기독교측은 “불교의 연기설은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또 실바 목사를 돕기 위해 나온 시리만나 전도사 역시 불교의 교리적 허구, 경전에 대한 신뢰성, 삼보의 귀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불교라는 무의미한 종교에서 벗어나 만물의 창조주이며 세상의 수호신인 하나님께 귀의할 것”을 호소했다.


이들의 주장을 묵묵히 듣고 있던 구나난다 스님은 우선 연기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며 “불교 교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깊은 정글 속에서 눈먼 코끼리가 길을 잃고 목적지를 헤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불교의 연기와 경전의 성립과정, 세계관 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틀 간 치열하게 진행된 논쟁은 사실상 불교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배타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선악에 대한 불교의 합리적 판단, 교리의 체계성을 입증시켰다. 논쟁 이후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스리랑카는 2100만여 명의 인구 가운데 70%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이슬람교(7.6%), 힌두교(7.1%)가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영국 제국주의가 스리랑카에 심고자 했던 기독교 인구는 극히 미약하다. 결국 파아나두라 대논쟁은 폭력과 강압을 앞세운 제국주의에 맞서 스리랑카인들이 스스로 전통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각성의 계기가 됐던 셈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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