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둔황(敦煌)과 모가오굴(莫高窟)-下
8. 둔황(敦煌)과 모가오굴(莫高窟)-下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09.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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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회랑 호령한 토호들의 영화
한여름 밤 꿈같이 화려한 자취뿐

‘장안’ 영향력 약화된 틈에
강한 군사·경제력 앞세운
권문세가들이 교통로 장악

 

 

▲ 강을 따라 줄지어 있는 모가오굴. 석굴군의 총 길이는 1.6km, 석굴수는 492개에 달한다.

 

 

둔황이 중국의 목구멍이라면 하서회랑(河西回廊)은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가늘고 긴 목이다. 둔황부터 동쪽으로 란저우까지 이어지는 하서회랑은 ‘황하의 서쪽에 있는 가늘고 긴 복도와도 같다’하여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도 불린다. 동서로 1000km 가량 이어지고 남쪽으로 치롄산맥(祁連山脈), 북쪽으로는 고비사막을 양쪽에 두고 있다. 그러니 사막의 갈증으로 목숨을 잃거나 거친 치롄산맥을 걸어서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면 하서회랑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야 한다. 더없는 교통의 요지인 것이다. 그 하서회랑의 끝, 혹은 시작이 둔황이었다. 한족의 힘이 강할 때는 하서회랑을 지배하고 둔황을 변방으로 삼았지만 힘이 약해지면 이곳에는 크고 작은 지배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때로는 소왕국의 모습으로, 때로는 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고 독자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간혹 그들은 멀리 장안에 있던 이름뿐인 황제의 ‘충성스런 신하’를 자청하기도 했다.


모가오굴에는 이러한 지방 토호 세력들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일명 ‘가문굴’이 적지 않다. 둔황지역을 호령했던 유력 가문들은 크고 웅장한 석굴을 조성하며 전문 화공들을 고용해 수준 높은 벽화들을 남겼다. 벽화 중에는 석굴을 조성한 가문의 사람들을 수십, 수백 명씩 그려 넣은 ‘공양인화’도 다수다. 이런 그림 속에는 자신들의 공적을 홍보하고 동시에 부귀가 오래토록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을 터이다.


그 가운데 156호굴, 한 눈에 보아도 썩 규모가 큰 이 석굴에도 1200여 년 전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속마음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안사의 난(安史─亂. 755~762) 이후 쇠약해진 당나라의 영향력이 변방에까지 이르지 못하자 9세기 둔황 일대는 티베트왕조인 토번의 영토가 되었다. 이 시기 둔황의 세력가문에서 태어난 한족 장의조는 ‘당나라로 돌아가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둔황 수복 전쟁’을 벌였다. 장의조는 848년 둔황 일대의 사주지역을 평정하고 당나라로 귀속시켰다. 그는 둔황의 실질적인 통치권자였다.


이 시기 장씨 가문은 대규모 석굴을 조성했다. 석굴에는 장씨 일가의 모습을 벽화로 그렸다. 그 가운데 865년 조성된 156호굴의 ‘장의조통군출행도’와 ‘장의조부인송씨출행도’는 당시대에 조성된 공양인화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두 폭의 그림엔 각 폭마다 100여 명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갑옷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탄 장의조 뒤를 군사와 군악대, 재주꾼, 시종 등이 줄을 이어 따르고 있다. 또 당시 군사 훈련법 가운데 하나로 말을 타고 공을 다루던 폴로경기와 같은 모습들도 그려 장의조가 평소에도 열심히 군사훈련에 매진했음을 은유적으로 자랑하고 있다.

 

 

▲ 둔황 모가오굴 61호굴에 남아 있는 ‘위구르공주출행도’. 이 석굴은 조씨 가문 여인들의 보시로 조성됐는데 이 여인들 중에는 조씨 가문으로 시집 온 위구르왕족의 공주도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61호굴 ‘위구르공주출행도’ 속의 여인들도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61호굴은 오대(907~979)시기 이 지역의 실권자였던 조씨 가문, 그 중에서 여인들의 보시로 조성된 굴이다. 모가오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이 석굴에는 석굴 조성에 보시한 조씩 가문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손에 꽃, 과일 등 공양물을 들고 있는 이 여인들은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 의복과 화려한 장신구 등으로 치장돼 있다. 당시 조씨 가문의 권세가 왕을 능가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석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석굴 가장 깊숙한 곳에 조성돼 있는 ‘오대산도’다. 높이 3.42m, 폭 13.45m의 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이 벽화는 중국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사방 250km의 풍광과 사찰, 탑, 건물 등을 세밀하게 묘사한 초대형 지도다. 이 벽화에 기록돼 있는 오대산의 사찰 가운데 10여개가 현재도 남아있다. 중국 측은 이 벽화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지도’라 자랑한다. 세계 최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둔황 지역 벽화 중에서 가장 큰 산수화인 것은 확실하다.

 

 

▲ 둔황 모가오굴 석굴은 밍사산(鳴沙山) 동쪽 끝 절벽에 조성돼 있다.

 


역시 가문굴인 220호 굴은 다른 석굴보다 조성 시기가 조금 앞선다. 석굴 안에 남아있는 명문을 통해 이 석굴이 당 태종 16년인 642년 적씨 가문에 의해 조성된 석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벽화는 송대에 이르러 기존의 벽화 위에 새로 조성했다. 1970년대 벽화 아래에 남아있던 당 시기의 그림이 발견되자 겉에 있던 송대의 벽화를 뜯어내 지금은 옛 벽화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천장은 송 시대에 조성된 벽화 그대로여서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확연히 다른 화풍이 구분된다. 당 시기에 조성된 벽에는 동방극락세계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어둠이 없는 세상을 상징하는 등불과 그 등불을 모아놓은 등대에 기름을 보충하고 있는 보살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다. 또 극락세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무희의 옷자락과 머리가 회오리치듯 휘날리고 있어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유행했던 호선무를 묘사한 것이다.

 

웅장하고 장엄한 석굴 조성
벽화로 남긴 친인척 모습엔
영원한 부귀·권세 염원이

 


모가오굴은 이처럼 여러 세기에 걸쳐 조성되며 각 시대의 특징, 그리고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시에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어 모가오굴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보석들이다.


벽화를 보는 즐거움이 특별한 모가오굴이지만 그 가운데 우리에게도 가장 친숙한 장소는 뭐니 뭐니 해도 17호굴이다. 16호굴 입구 우측에 곁굴로 조성돼 있는 17호굴은 ‘장경동(藏經洞)’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이곳에서 약5만여 권에 달하는 경전과 문서, 그리고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장경동은 출입할 수 없다. 약탈의 생채기가 너무 커서 다시는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입구에서 들여다본 석굴 가운데에는 홍변 스님의 소조좌상이 빈 방을 지키듯 앉아있다. 이 석굴은 홍변 스님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석굴에 왜 그토록 많은 고문서들이 보관되고 또 언제, 어떤 이유로 봉인됐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전란을 피하기 위한 급박한 조치였다는 추측이 힘을 얻고 있지만 정확한 내막은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이 고문서들은 1900년 모가오굴을 관리하고 있던 도사 왕위안루(王圓, 1851~1931)에 의해 발견된다. 그러나 천 여 년 만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고문서들은 불과 몇 해를 넘기기도 전에 서양 열강들에게 편취당해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간쑤성의 교육위원장이었던 엽창치(葉昌熾)는 ‘연독려일기’라는 저서에서 장경동 발견에 대해 ‘그저 조그만 흙덩이 하나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리니, 어찌 세상에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음이 때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경동을 발견한 도사 왕위안루도 장경동 발견을 조정에 알리며 ‘천둥이 치자 바위틈이 갈라졌다’고 했다. 이 고문서들이 세상과 다시 만날 시절인연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세상에 나온 지 몇 해 되지 않아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약탈당한 것 역시 그저 운명이었다는 뜻인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그 과정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아야 했을 저 홍변 스님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조금은 슬퍼 보이고 두터운 가사 속에 가려진 손과 발도 그저 묶여있는 듯 답답해 보인다.

 

 

▲ 둔황 모가오굴의 입구.

 


장경동의 고문서들은 편취당하고 석굴의 벽화 또한 적지 않은 수가 약탈꾼들의 손아귀에 유린됐지만 그래도 앞서 둘러본 여러 석굴에 비하면 모가오굴의 상황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 눈과 입이 파헤쳐지고 그을음에 뒤덮인 벽화, 혹은 벽화를 통째로 떼어내고 남은 칼자국, 파괴되거나 사라진 소조상들의 흔적만 무수했던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여러 석굴들과는 비교도할 수 없을 정도로 온전한 모습이다. 답사팀을 이끈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텍스트비평팀의 석길암 HK교수는 그 이유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가오굴을 비롯한 둔황 일대에서 민중들의 불교 신행이 이어져 온 점”을 가장 먼저 손꼽았다. 불자들의 예배와 공양이 이뤄지고 있는 석굴에서 아무리 약탈꾼이라해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가오굴 벽화에 눈독을 들였던 미국인 랭던 워너가 두 번째 탐사에서 실패했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였다. ‘더 타임스’의 아시아관련 전문기자로 활동했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1989)’에서 당시 모가오굴을 찾았던 워너의 형편에 대해 “미국인들은 지금 갑작스럽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적대적인 주민들뿐 아니라 지방 관리들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고 묘사했다. 물론 이는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해있던 중국 내부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평범한 상인이나 학자, 여행객이었다 하더라도 ‘서양마귀’였던 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시와 적대적인 행동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찌되었든 참 다행한 일이 아닌가.


모가오굴의 벽화와 소조상, 그리고 수많은 고문헌에 손을 대고 자국으로 실어 날랐던 많은 학자, 탐사대, 혹은 약탈자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모호하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키질석굴이나 베제클리크석굴과는 확연히 다른 모가오굴을 보며 한 가지만은 확실해진다. 아무리 유명한 박물관, 혹은 시설 좋은 수장고에 고이 모셔둔다 해도 모든 문화재와 역사의 기록들은 그것들이 원래 있던 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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