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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자유인 원효

너울너울 무애의 춤추던 진정한 해방자

진정한 자유, 이론으로 규명하고
평생 걸쳐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

 

스님의 수행력 초지보살로 기록
원효스님 무애행의 상징적 표현

 

 

▲경주 분황사 원효 스님 진영.

 

 

불교는 인생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불교는 따라해야 할 실천적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아는 것보다도 그렇게 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진리는 인식의 내용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다. 따라서 진리는 온 몸으로 획득되고,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도(道), 그것은 저쪽 어느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아니, 그 길은 걸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차라는 도구를 타고가면 더 빨리 갈 수도 있다. 도리(道理), 도로(道路), 도구(道具)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도(道)는 형이상학이면서 동시에 형이하학의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불도(佛道), 혹은 불교는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진정한 삶이란 이론이나 인식이 아니라, 실존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긴장할 것도 없다. 재미있게 사는 것이고 즐겁게 노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일상의 긴장된 삶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마음 놓고 사는 것이다. 마음을 들고 마음조리면서 사는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그리고 초조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감옥을 탈출할 필요가 있다. 탐욕적인 여러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도 해방될 필요가 있다. 붓다는 말씀하셨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게 되며, 초월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다.”


‘잡아함경’ 중의 ‘연소경’에 있는 이 말씀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원효에게는 굴레가 없었다. 그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불교로부터도, 승려라는 형색으로부터도, 지식으로부터도, 명예로부터도, 계율로부터도,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의 무애행(無碍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효는 일정한 범위나 틀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유방외(遊方外)’, ‘초출방외(超出方外)’ 등의 표현을 즐겨 썼던 것도, 무애의 자유인으로 행동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원효는 ‘화엄경’의 이 게송을 재발견했고, 이로부터 무애(無碍)라는 용어를 취했었다. 걸림 없이 행동하는 원효의 모습을 ‘송고승전’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의 발언은 미친 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지공(誌公)과 같이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기도 했고, 혹은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고,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고, 혹은 산수에서 좌선(坐禪)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여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파한집’에서는 원효가 시중 잡배들과도 어울렸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원효가 노래하고 춤추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다니며 대중을 교화했다고도 했다. 길거리에서 자루 없는 도끼를 빌리고자 노래를 했다거나, 소를 타고 거리를 다니면서 ‘금강삼매경’의 주석을 했다거나, 논에서 벼를 베고 있는 여인에게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했다거나, 혜공과 함께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었다거나, 사복과 더불어 죽은 사복모를 장사지냈다는 등의 여러 모습에서도 원효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어른거린다. 물론 길거리를 다니며 여인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다니는 광경이나,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일부러 냇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는 행동에는 설화적 윤색도 보인다.


뒷사람들은 원효의 환속을 실계나 파계로 평가해 오지만, 원효 자신은 그러한 행위를 과연 파계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특히 일정한 계율의 틀 속에 갇혀버리는 경우야말로 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그의 확신이나, ‘보살계본지범요기’ 등에 나타나는 계율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확신에 찬 그의 이해 등을 염두에 둘 때, 원효 스스로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파계로 생각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설총을 얻은 뒤에 스스로 승복을 벗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왔다. 바람 부는 세상의 거리, 생로병사가 전개되는 삶의 현장으로.


불성(佛性)의 실현은 출세간(出世間)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금욕적인 생활로 자기를 방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현실 속에서 불성은 실현되는 것이다. 적은 선(善)에 머물러 만족할 일은 아니다. 우리들 가슴속 보배를 꺼내어 세상에 쏟아 놓는 적극적인 실천행이 더 중요한 것이다.

 

원효스님 환속 파계라 말하지만
스님은 그렇게 인식했을지 의문

 

가무로 잠자는 영혼 일깨웠지만
결코 현실 속에 함몰되지는 않아

 

 

▲여수 향일암 원효 스님 좌선대.

 


원효는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다니면서 가무(歌舞)로 대중을 교화했다. 원효가 만난 사람들은 다양하다. 거사, 밭가는 노인, 가난한 사람, 산골의 무지몽매한 사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광대, 백정, 술장사, 기생 등 시중잡배들과도 어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부인들까지도 모두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삶에 지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고,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으리라.


원효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일시에 몸을 백 곳에 나타냈다고 하는데, ‘분구어백송(分軀於百松)’ ‘분백신(分百身)’ ‘수처현형(數處現形)’ ‘백처현형(百處現形)’ 등의 표현이 대개 이 뜻이다. 일찍이 원효는 송사로 인해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에 나타냈던 일이 있고, 이로 해서 모두들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했다. 그리고 원효는 현재 화엄지(華嚴地)에 머무는 대권보살(大權菩薩)로 이해되기도 했고,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로 인식되기도 했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등 보살의 수행계위 52위(位) 중의 십지(十地)는 41위로부터 50위에 해당하고, 십지 중의 초지(初地)는 환희지(歡喜地)다. 그런데 십신(十信)으로부터 십회향(十廻向)까지는 범부위(凡夫位), 그리고 초지(初地) 이상은 성자위(聖者位)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구분에 의할 때,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였다거나 그가 화엄지(華嚴地)에 머무는 대권보살(大權菩薩)이었다는 설은 그가 성자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원효가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였다는 설은 김부식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명(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 보인다. 불체성(佛體性)의 종류를 여섯 가지로 분류한 육종성(六種性) 중의 네 번째가 성종성(聖種性)이다. 이것은 십지위(十地位) 중에서 종성(種性)을 증견(證見)하고 범부의 성(性)을 끊은, 즉 성위(聖位)에 증입(證入)한 단계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원효의 설명이 참고 된다. 그는 “십지위(十地位) 중에서 종성을 증견하고서 범부의 성을 끊기 때문에 성종성이라 한다”고 하여 십지의 보살위(菩薩位)는 곧 성종성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에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부지런히 정진하면 백 명의 부처를 볼 수 있고,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원효는 ‘열반종요(涅槃宗要)’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부처의 몸이 실제로는 작은 티끌의 수와 같이 많은 몸이 아니지만, 자재(自在)한 때문에 티끌과 같은 몸을 나타낸다(如來之身 實非微塵 以自在故 現微塵身).”


이처럼 원효는 초지보살이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한 ‘화엄경’의 구절을 자재한 때문에 수많은 몸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따라서 초지보살은 대자유의 몸이 된다는 ‘화엄경’의 내용과 원효가 백 곳에 몸을 나타내었기에 그의 위계를 초지라고 했다는 설화는 같은 문맥이라고 하겠다. 너무 바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몸이 열 개라면 좋겠다”고 말한다. 원효가 일시에 몸을 백 가지로 분신했다는 이야기에는 소박한 사람들의 이와 같은 희망이 투영되기도 했다. 이는 또한 원효 무애행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원효의 위계가 초지였다고 하는 것은 그가 이입(理入)의 경지를 넘어서 행입(行入)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말했다.


“이치에 따라 믿고 이해하였으나, 아직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입(理入)이라고 한 것이니, 계위(階位)가 초지(初地) 이전에 있다. 행입(行入)이라고 한 것은 이치를 증득하여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갔기 때문에 행입이라고 한 것이니, 계위가 초지 이상에 있다.”


행입이란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이해의 단계를 지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의 단계로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효의 위계가 초지에 해당한다는 인식은 그의 실천행에 대한 높은 평가에 그 배경이 있다. 원효의 실천행이 수행은 물론이고 교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사실에 유의하면, 그의 위계가 초지에 해당한다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

 

▲김상현 교수

원효는 누구보다도 호방불기(豪放不羈)한 풍류인이었다. 원효는 혼란의 시대를 열심히 살았지만, 그 현실 속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방외(方外)로의 초월(超越)을 꿈꾸었고, 실제로 흥겹고 신나는 삶을 살았다. 초월을 꿈꾸며 너울너울 무애의 춤추던 원효는 진정한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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